지난 12월에 3주 일정으로 스리랑카 배낭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스리랑카는 가는 사람이 적어서 그런지 가이드북을 구하기가 어렵네요. 저는 무거워서 종이책은 안 가지고 다니는데요. 전자책이 없어요. 이럴 때 일단 종이책을 읽어 가고 싶은 도시부터 찾습니다. 스리랑카 여행의 3대 테마, 1. 아누라다푸라 등 불교 성지 순례, 2. 캔디 주변 차밭 여행 3. 서핑의 성지인 미리싸 해변. 이 순서대로 여행을 해보려고요. 먼저 역사 유적을 돌아보고 기차타고 여행을 한 후, 마지막에는 바닷가에서 휴양을 하는 여정.
비행기로 수도인 콜롬보에 도착한 후, 기차를 타고 아누라다푸라에 왔어요.
같은 숙소에서 묵었던 이태리 친구입니다. 아누라다푸라의 신성도시 입장료는 30달러, 무척 비쌉니다. 여기를 돌아보려면 또 몇만원을 내고 툭툭을 대여해서 다닙니다. 저 친구는 툭툭을 빌려서 갔고요. 저는 자전거를 빌렸어요. 1일 자전거 대여료 5천원. 운동도 하고 구경도 하고 1석2조. ^^
처음 간 여행지에서 자전거 여행 경로를 짜는 법. 트립어드바이저에 들어가 아누라다푸라 10대 여행지를 검색합니다. 추천수가 많은 곳을 찾은 후 구글 지도를 보고 근처에 있는 명소들로 묶습니다. 멀리 떨어져있는 장소는 굳이 가지 않습니다. 여기는 워낙 더워서 낮에 장거리 자전거 라이딩은 비추. 아누라다푸라 신성도시에는 많은 유적군이 근처에 밀집해있어 자전거로 돌아보기 좋습니다. (물론 이건 제가 자전거 여행이 능숙하니 하는 이야기고요, 그렇지 않다면 툭툭을 빌려도 좋습니다. 3시간 대여에 2~3만 원선입니다. 여럿이 함께 움직이면 이게 낫지요. 저는 혼자니까 자전거~)
자전거를 타고 맨 처음 간 곳은 제타바나라마 Jetavanarama라는 불탑입니다. 높이는 122미터로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사리탑이자 건축 당시 세계에서 세 번째로 높은 구조물이었어요.
아누라다푸라는 2400년 전 싱할라왕조의 수도였습니다. 인도의 아쇼카 왕으로부터 불교가 전해지고 1400여년동안 아누라다푸라는 스리랑카 최대의 도시이자 불교의 중심지였어요. 한동안 정글에 묻혀 있다 최근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렇기에 불탑과 사원같은 유적이 제 모습을 유지하고 있어요. 번성했던 도시라면 과거의 흔적은 사라지기 십상이거든요. 거기에 최근 수십년 동안 스리랑카가 내전에 시달린 탓에 관광 산업도 크게 발달하지 않았고요. 뒤늦게 발굴된 오지라고 할까요?
불탑 주위를 걷다 툭툭을 타고온 이태리 친구를 만났어요. "멀리 못 갔네?" "네 자전거가 무지 빠른 거지." ^^ 그 친구가 가이드북에서 읽은 정보를 알려줬어요. 이 불탑은 벽돌을 구워 만들었는데요. 이 탑에 쓰인 벽돌로 담을 쌓으면 런던에서 에딘버러까지 이어진답니다. 우와, 1700년 전에 이 무더운 곳에서 저 불탑을 만들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땀을 흘리며 고생을 했을까요?
다시 자전거를 타고 5분 거리에 있는 루완웰리 세야 사원에 갔습니다. 제타바나라마가 오래된 유적이라 외국인 관광객들만 찾는다면, 이곳은 스리랑카의 불자들이 즐겨찾는 사원입니다. 일요일 오전 불공을 드리러 온 신자들이 가득해요.
사원 유적 답사를 할 때는 긴 바지를 입고 가는 게 편하고요. 사원 내부를 볼 때는 신발을 벗고 보관소에 맡겨야 합니다. 이때 팁을 주는 용도로 적은 액수의 지폐를 미리 여러장 준비해둬야 합니다. 지폐가 없어 동전을 내면 째려봅니다. ^^ '넌 부자 나라에서 왔잖아. 그런 녀석이 왜 이렇게 인색해?'라는 눈으로 쳐다보면, '당신들 시간당 최저임금은 430원이잖아. 10분간 신발 보관료로 500원을 줬으면 많이 준 거 아냐?'라는 눈으로 대꾸하듯 웃어줍니다. 반나절 동안 서너개의 사원을 돌아보는 입장료로 5만 원이나 냈는데 말이지요.
일요일 아침 온 가족이 예불을 드리러 오는 이도 많습니다. 나오는 길에 앉아서 신발을 신고 있는데, 지나가는 중년 여성분과 눈이 마주 쳤습니다. 씨익 웃었더니 마주 웃는군요. 그러더니 제 옆에 앉았어요. 같이 가던 가족들이 갑자기 막 웃으면서 뭐라고 합니다. 여성분이 꿋꿋하게 뭐라고 한마디해요. 그랬더니 또 다들 와악!하고 웃습니다. 오빠로 보이는 어떤 분이 저에게 그랬어요. "You take her. Take her." (네가 데려가라. 데려가.) 응? 이게 무슨 분위기지?
스리랑카 여성은 결혼을 일찍 합니다. 열여섯에 시집을 가기도 하는데요. 나이 서른을 넘기면 만혼이랍니다. 우리도 예전에는 그랬죠. 나이가 든 딸이 있을 때 온 가족이 잔소리를 했죠. "너는 언제 시집 갈래? 오늘 부처님한테 가서 빌자, 좋은 인연 만나게 해달라고." "아유, 난 결혼 안 하고 혼자 산다니까." 그런 농이 오고가던 중에 혼자 여행 온 외국인 아저씨를 본 거죠. 그 남자가 웃어주는 걸 보고 제 옆에 앉은 거죠. "너 거기서 뭐하냐?" "응, 이 남자가 나 마음에 들어하나봐. 나 이 남자랑 같이 살래." 말을 못 알아듣는 외국인 남자를 두고 그런 농담이 오고갔나봐요. 그걸 보던 어린 조카가 폰으로 사진을 찍어요. "혼기를 넘긴 우리 이모 드디어 시집갈 듯." 자세한 영문은 모르지만 가족들의 즐거운 장난에 저도 장단을 맞춥니다. 웃으며 함께 사진도 찍었어요.
말은 안 통해도 그냥 웃는 걸로 충분할 때가 많아요.
그날 빌린 자전거는 제가 1970년대 타던 그런 자전거입니다. 낡았지만 괜찮아요. 달리는 데는 지장이 없어요. 어차피 자전거의 엔진은 제 다리입니다.
낡은 자전거를 타고 스리랑카의 시골길을 달려요.
이수루무니야라는 사원을 찾아갑니다. 앞에 커다란 연못이 있는데요. 악어가 살고 있습니다. 물 가까이 가지 않는 게 좋아요. 자세히 보면 눈과 콧구멍만 물 위에 나와있어요. 은근 무섭네요.
'이수루무니아는 기원전 246년 스리랑카에 불교를 전한 마힌다 스님에게 봉헌된 스리랑카 최초의 사원이다. 또한 그로부터 500여년 후인 312년 인도로부터 석가모니부처님의 치아사리가 전래됐을 때 가장 먼저 봉안된 스리랑카 최초의 불치사이기도 하다.
이수루무니아에 불치가 봉안된 후 불치는 싱할라왕조의 상징이 되었고 민중들에게는 ‘불치를 모신 이가 싱할라왕국의 지배자’라는 인식이 형성되었다. 물론 시리메가완나는 아버지와는 달리 마하위하라파와의 관계를 회복, 백성들의 마음을 되찾는 데에도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불치도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불치의 도래 시점, 그리고 왕실의 위기극복이 우연의 일치라고 보기에는 너무도 절묘하게 맞아떨어지고 있다.'
이 글은 남수연 성지탐사 전문기자의 <꺼지지 않는 법등 스리랑카>라는 여행기에서 가져왔습니다.
https://www.beopbo.com/news/articleList.html?sc_serial_code=SRN394
법보신문
세상을.바꾸는.불교의.힘
www.beopbo.com
스리랑카에 여행가는 사람이 없어 그런지 인터넷에서 좋은 정보를 찾기가 어려운데요. 불교 성지 순례기를 읽으며 여행 정보를 얻을 수 있었어요. 좋은 기록을 남겨주신 기자님, 고맙습니다!
이수루무니아 사원 안에도 커다란 연못이 있습니다. 바위 동굴에 사원을 조성했고요.
바위에는 코끼리가 조각돼 있습니다. 스리랑카는 인도 남쪽에 있는 섬나라입니다. 인도로부터 힌두교와 불교의 영향을 받았어요. 그래서 조각이나 사원을 보면 두 종교의 영향이 다 보입니다.
이제 다시 자전거를 타고 스리 마하 보리수를 찾아갑니다.
불상이나 불탑이 아니라 나무를 경배하는 모습이 신기합니다. 스리랑카에 불교를 처음 전파한 이는 인도 아쇼카왕의 아들인 마힌다 스님입니다. 스님의 가르침을 받고 귀의한 스리랑카의 왕비가 출가의 뜻을 밝혔어요. 하지만 당시 스리랑카에는 왕비에게 비구니계를 전해줄 비구니스님이 없었어요. 마힌다 스님은 부왕 아쇼카에게 비구니계를 전할 스님을 파견해 달라고 청합니다. 그러면서 비구니가 된 자신의 여동생 상가미타 스님을 보내달라고 합니다.
아쇼카왕은 잠시 고민해요. 남매가 모두 부모의 곁을 떠나는 것은 서운했겠지요. 하지만 오빠의 전언을 받은 동생이 스리랑카로 가겠노라 하고요. 아쇼카왕은 손수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이룬 보드가야 보리수의 가지를 하나 꺾어 상가미타 스님에게 건네주었어요. 그 가지가 자라나 지금의 스리 마하 보리수고요. 많은 이들이 참배를 오는 곳입니다.
아쇼카왕, 이름이 낯익은 인도의 왕입니다. 검색해보니 왕자로 태어났는데 형제가 101명이에요. 왕위 계승 다툼에 친동생 한 명을 뺀 이복형제 99명을 모두 죽이고, 왕좌에 올랐고요. 무수한 정복 전쟁 끝에 인도를 통일합니다. 자신이 왕좌에 오르고 나라를 통일하는 과정에서 형제 자매를 포함해 무수한 사람을 죽였으니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겠지요. 그런 왕에게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 준 건 불교의 가르침이었어요. 불교에 귀의한 뒤 불교를 보호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인도 전역은 물론 해외로 전법사를 보내 불교의 가르침을 전하게 합니다.
솔직히 저는 미힌탈레와 아누라다푸라에 조성된 거대한 불교 사원유적을 보면서 마음이 조금 불편했어요. 이런 거대한 불사를 일으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백성들이 고생했을까? 부처님이 원하신 게 이렇게 높고 큰 불상이었을까? 그러다 다시 생각해보니...
아쇼카 왕이 왜 자신의 아들 딸을 스리랑카에 전법사로 보냈을까요? 아쇼카 왕 역시 부왕처럼 왕비와 여러 후궁을 거느리고 많은 아들딸을 두었어요. 자신이 한 일을 생각해보면, 자신의 사후에 아들 딸도 서로 혈육끼리 또 죽고 죽이고 하겠지요. 살생을 금지하는 불법을 받아들이고 계율을 지킨다면, 적어도 아들 딸이 서로 죽고 죽이는 일은 피할 수 있지 않을까요? 자신의 아들을 전법사로 만들어 바다 건너 스리랑카로 보낸 건 그런 뜻 아닐까요? 다가올 왕위 계승 전쟁에서 아들을 지키고 싶은 마음? 자신의 업보가 이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스리랑카에 전법사로 온 마힌다 스님은 불법을 전하는 스님이 되어 천수를 누렸고, 지금까지도 존경받는 인물이거든요. 자식들간의 권력 승계 싸움을 미연에 방지한 아쇼카 왕. 물론 이것도 어디까지나 저의 해석입니다. 수천년 전 사람의 마음을 어떻게 알겠어요. 지금 여기에 나와 같이 있는 이들의 마음도 알 수 없는 게 세상사인데요.
콜롬보에 있는 힌두교 사원입니다. 바로 이웃한 인도가 힌두교의 나라고요. 그래서 스리랑카에는 불교와 힌두교가 공존합니다. 지난 수십년간 내전에 시달린 원인 중 하나가 종교 갈등이에요. 사랑과 평화와 자비를 가르치는 종교가 어느새 사회적 갈등을 부추기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어렵네요.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이제 겨우 일주일된 제가 이 나라의 신앙생활과 문화에 대해 함부로 예단할 수는 없겠지요. 공부하는 자세로 돌아보려고요.
스리랑카 여행기는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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