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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의 경제 공부

돈 쓰는 건 너무 쉽다

by 김민식pd 2024. 2. 26.

대학 다닐 때 음악을 참 좋아하는 선배가 있었어요. 90년대 대학가에는 음악 감상실이라고 해서 LP 레코드로 음악을 들려주는 곳이 있었어요. 그곳의 스피커에서는 집에 있는 트랜지스터라디오나 카세트 플레이어로는 들을 수 없는 천상의 소리가 흘러나왔지요. 그곳 소파에 앉아 디제이에게 신청곡을 적어내고 스피커에서 레드 제플린의 <천국으로 가는 계단 Stairway to heaven>이 흘러나올 때는 천국이 따로 없었습니다.

그렇게 음악을 좋아하던 선배가 회사에 취직하고 가장 먼저 한 일은 할부로 차를 사는 것이었어요. “민식아, 최고의 음악 감상실은 바로 내 차 안이야. 너만의 공간에서 네가 원하는 노래를 마음껏 크게 들을 수 있어.” 그런데 자동차에 기본 옵션으로 나오는 스피커는 왠지 마음에 차지 않았어요. 오디오 전문 회사의 스피커를 차에 달았고요. 스피커를 바꾸니 왠지 저음이 약한 것 같다고 서브 우퍼를 추가로 달더군요. 와, 의자를 쿵쿵 울려주는 우퍼의 소리, 박진감이 끝내줬어요. 선배는 저음을 보강하니 고음이 달린다며 고음 전용 트위터를 달았어요. 앞 유리창 하단에 달린 조그만 스피커에서 짹짹 새가 지저귀듯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어요. 그렇게 월급을 탈 때마다 카오디오 시스템을 업그레이드했어요.

그런데 사람 마음이 참 이상한 게요. 하드웨어를 업그레이드하면 소프트웨어 욕심이 생깁니다. 음반을 한 장 한 장 사서 모으고요. 운전하다 CD를 한 장 한 장 손으로 바꾸는 건 귀찮다며 아예 트렁크에 외장 CD 체인저를 설치했어요. 그 시절에는 가수의 음반 한 장을 플레이어에 넣으면, 끝날 때까지는 계속 그 가수 노래만 들었는데요. 간단한 버튼 조작으로 음반이 바뀌는 건 정말 신기했어요. (90년대 이야기입니다. ^^) 선배의 취미는 이제 월급을 타서 음악 라이브러리를 늘려가는 게 되었고요. 심지어는 이미 구매한 음반도 리마스터링 버전이 나오면 음질이 더 좋다며 추가로 구매했어요. 

어느 날 저를 불러 드라이브를 가는데요. 와, 소리가 정말 빵빵하대요. 길을 걷는 사람들이 지나가다 한번씩 쳐다볼 정도였어요. “민식아, 나는 차에다 경차 한 대를 업고 다닌다.” 네, 오디오 시스템 업그레이드하는데 천만 원이 넘게 들어가니 경차 한 대를 차 위에 싣고 다니는 격이더라고요. “기껏 오디오 다 바꿨는데, 이제 차를 바꿔야 할 것 같아.” “왜요?” “지금 타는 차는 작아서 도로 주행할 때 소음이 타고 들어오거든. 더 큰 차를 타면 묵직하니 외부 소음을 막아줄 수 있어.” “형, 이 차 아직 할부 남지 않았어요?” “괜찮아. 어차피 같은 할부인데, 기간이 좀 더 늘어나는 거지 뭐.”

비싼 외제차를 타더니 선배의 씀씀이가 더 늘었어요. 주말에 그냥 차를 세워두는 게 아깝다고 틈만 나면 외곽으로 드라이브를 다녔고요. 주차장이 딸린 고급스러운 레스토랑만 찾아 다니다 보니 지출은 계속 늘었어요. 월급은 받자마자 통장을 스쳐 사라지더군요. 자동차 할부에 카드 할부에 마이너스 통장으로도 막을 수 없는 지경이었고요. 신용불량에 월급에 차압이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1998년에 IMF가 터집니다. 기업들은 구조조정을 실시하는데요. 인사부에서 연락이 옵니다. 급여 차압을 당한 사람부터 정리해고하라고요. 회사 일을 하다 보면 경비 처리며 대리점 입금이며 회사 돈을 다뤄야하는데요,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은 나쁜 유혹에 빠질 가능성이 큽니다. 자기 관리가 안 되는 직원은 사고 예방 차원에서 미리 자르는 거죠. 자기관리를 못했다고 회사에 정리해고의 빌미를 준 겁니다. 갚아야 할 빚이 많아 계속 회사를 다녀도 부족한 판에 심지어 권고사직까지 당한 선배. 그냥 음악을 좋아했던 것뿐인데, 어쩌다 인생이 나락으로 떨어졌을까요?

『호모 아딕투스』라고 중독을 다룬 책이 있습니다. 책을 쓴 사람은 심리학자나 정신과 의사가 아니라 경영학자입니다. 연세대 경영학과 교수인 김병규 저자는 경제적 관점에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중독경제 시대라고 정의합니다. 우리는 무수하게 많은 중독 기제에 노출되어 있는데요. 그중 하나가 소비중독입니다. IT 기술과 핀테크가 발달하면서 지출의 고통이 사라지고 소비중독이 늘었어요. 

교통범칙금을 낼 때, 사람의 뇌는 고통을 느낍니다. 자기 재산이나 소유의 일부를 포기하는 순간 뇌는 스트레스를 받아요. 켄터키대학교에서 실시한 심리학 실험이 있어요. 참가자들을 두 그룹으로 나누고, 한 그룹에는 진통제 한 알을 먹게 하고, 다른 그룹에는 플라시보(가짜 약)를 먹게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모든 참가자에게 머그컵을 선물로 주고는 이 컵을 다른 사람에게 판다면 얼마에 팔고 싶은지 물었습니다. 결과를 비교해보니, 진통제를 먹은 참가자들은 플라시보를 먹은 참가자들보다 더 낮은 가격에 컵을 팔겠다고 응답했습니다. 즉 진통제를 먹으면 고통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이 가진 소유물을 더 쉽게 포기하는 것입니다.

돈은 소유물입니다. 그래서 돈을 쓸 때 뇌는 고통을 느낍니다. 힘들게 번 돈일수록 쓸 때 더 큰 고통을 느낍니다. 지출의 고통 때문에 사람들은 좀 더 합리적으로 소비하고 절약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업은 소비자가 이런 과정을 겪지 않기를 원합니다. 기업입장에서는 소비자들이 돈을 쓸 때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않길 바랍니다. 그래야 돈을 쉽게 쓰니까요.

지출의 고통을 덜어주는 게 신용카드입니다. 현금으로 돈을 주고받을 때는 자신이 얼마를 벌었고 얼마를 쓰는지가 눈에 명확하게 보입니다. 그래서 돈을 쓸 때 큰 고통을 느낍니다. 하지만 신용카드로 결제할 때는 돈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돈을 쓴다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다. 당연히 사람의 뇌는 지출의 고통을 적게 느끼는 거죠. 최근 플랫폼에서 간편하게 이용할 수 있는 전자결제 서비스는 신용카드를 쓸 때보다도 더 돈을 쓴다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다. 신용카드로 대금을 지불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지갑에서 신용카드를 빼서 신용카드를 ‘긁는’ 행위가 필요합니다. 전자결제에서는 이 모든 것이 생략되어 있습니다. 비밀번호를 입력하거나 엄지손가락으로 지문을 인식하는 것만으로 결제가 완료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돈을 쓰고 있지만 정작 뇌는 자신이 돈을 쓴다고 생각하지 못합니다.

만약 그 선배가 새로운 오디오를 살 때 현금으로 지불했으면 어땠을까요? 지갑에서 돈을 꺼내고 나니 지갑이 홀쭉해져요. ‘잠깐만, 이 돈을 내고 나면 당장 오늘 저녁을 먹는 것도 힘들 것 같은데, 굳이 스피커를 새로 달 이유가 있나? 어차피 지금 자동차에 달려 있는 스피커도 소리는 잘 나는데?’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오디오 가게에서 “손님, 6개월 할부 가능합니다.”라는 순간, 한 달에 10만 원밖에 안 드는데, 그것도 카드 대금 결제는 월급 받고 하는데 뭐. 하고 바로 결제하게 되겠지요. 만약 차를 할부가 아니라 현찰로 사야 한다면, 가방에 지폐 다발을 들고 가서 한 장 한 장 돈을 세어서 영업사원에게 건네야 한다면 차를 사는 사람은 팍 줄어들 겁니다. 구매가 일어나지 않으면 자본주의 경제는 굴러가지 않아요. 소비할 때 지출의 고통을 줄이는 방식으로 자본주의의 수레바퀴는 돌아갑니다.

사람이 느끼는 고통은 생존에 도움을 주는 중요한 정보입니다. 뜨거운 불에 다가가면 두려움이 느껴지고 더 가까이가면 통증을 느낍니다. 고통은 우리의 소중한 신체가 화상을 입지 않도록 지켜줍니다. 돈을 쓸 때 느끼는 고통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소중한 자산을 지켜줍니다. 하지만 카드 할부나 쇼핑 플랫폼의 전자결제는 그런 고통을 줄여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쉽게 소비중독에 빠져들지지요.

소비중독을 막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요? ‘이만하면 괜찮다’라고 매 순간 되뇌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저는 요즘 음악을 들을 때 노트북에 연결한 블루투스 스피커를 이용합니다. 도서관 강연 갔다가 선물 받은 거고요. 유튜브로 음악을 듣습니다. 90년대 음악 감상실에 가서 디제이에게 노래 신청하던 시절에 비하면 엄청 편하게 음악을 듣습니다. 그 시절에는 디제이의 취향에 맞지 않으면 안 틀어주거나, 음반이 없으면 들을 수 없었거든요. 음악감상에 있어 소프트웨어의 선택은 무한대로 늘어나고 하드웨어의 가격은 거의 공짜에 가까운 수준으로 떨어졌어요. 음악 애호가의 천국이 바로 이곳에 있습니다.

'내 삶에 부족함은 없다. 내가 있는 이곳이 바로 천국이다. 쇼핑 지옥, 절제 천국!'

매일 스스로 되뇌며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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