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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독서 일기

단순한 것을 지속하는 힘

by 김민식pd 2024. 1. 17.

최재천 교수님과 김병종 화가가 공저한 책 <생명 칸타타>를 읽었어요.

두 분은 각자의 영역에서 ‘생명’을 주제로 끊임없이 탐구하신 분이지요. 김병종 화백은 〈바보 예수〉와 〈생명의 노래〉 연작을 통해 끊임없이 생명을 화두로 작품 세계를 펼쳐왔고요. 최재천 교수님은 동물과 곤충들의 행동 연구를 통해 인간의 삶, 나아가 생명의 과학적 진리를 찾아 나서고 과학의 대중화를 위해 노력하셨지요. 책에서 가장 좋았던 대목은 중반부에 나오는 두 저자의 대담이에요. 두 거장이 자신이 살아온 과정을 두고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는 장면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최재천 교수님은 원래 서울대 의대 진학을 희망했으나 떨어지고 재수하여 다시 의대에 원서를 넣었으나 떨어지고 제2지망으로 쓴 동물학과에 겨우 턱걸이로 입학했대요. 전공이 마음에 들지 않아 방황하다 대학교 4학년 때 그래도 내가 몸담은 이 전공이 뭔지는 알아보자는 생각에 겨우 공부를 시작했는데, ‘어라. 은근히 재미있네?’ 싶은 거예요. 동물학에 깊이 빠지게 된 계기가 있어요.

조지 에드먼즈 유타대 교수라고 하루살이를 연구하시는 분이 한국에 채집 여행을 오셨는데, 하루살이는 물속에서 1~2년을 사는데 성충이 되면 하루나 이틀 정도밖에 못 사는 수서곤충이에요. 그걸 연구한다는 말을 듣고 ‘참 공부할 것도 없지. 어떻게 하루살이 같은 걸 연구하나’ 싶었다고요. 그런데 60대 노인이 개울물만 보면 신발을 신은 채로 물에 첨벙첨벙 들어가는데, 일주일을 따라 다니며 느낀 점. 남들의 눈에는 그냥 놀고먹는 영감님 같은데 직업은 멀쩡한 유타대학 정교수지, 집도 좋은 게 있고, 플로리다 바닷가에 별장도 있지, 하루살이 연구하러 전 세계를 돌아다니는데 우리나라가 102번째 나라라고. 

그 분의 삶이 너무 부러워요. 이야기를 듣다 벌떡 일어나 “아이... 아이... 음, 라이크 유. I... like you...”라고 소리를 질렀다고요. ‘나도 당신처럼 살고 싶다. I want to live like you.’ 라고 말하고 싶은데 영어가 서툴러서 꼬인 거죠. 그 노교수가 웃으며, “응, 나도 네가 나 좋아하는 거 알아.”라고 받았다고요. 그분이 유학을 권해서 최재천 교수님은 공부하러 미국에 가게 됩니다.

좋은 어른을 만나는 게 이렇게 중요합니다. 저는 의료기 영업 사원으로 일하던 1994년, 종로외국어학원에 갔다가 한민근 선생님을 만납니다. 동시통역사를 난생처음 만나고 영어라는 무림의 세계에도 초절정 고수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문득, 나도 저렇게 영어로 최고수의 경지에 오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요. 그런 고수들이 모여있다는 외대 통역대학원에 가고 싶다는 마음에 첫 직장에 사표를 내고 나왔지요.

요즘 저는 책의 세계에서 초절정 고수들을 만납니다. 자신의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분들이 쓴 책을 읽다 보면, 달인의 경지에 오르는 사람들에게는 다 배울 점이 있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그런 점을 보면 기록하고 그 장점을 어떻게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을까 고민하는 한편, 다른 분들에게도 소개하고 싶어져요. 그래서 독서일기를 꾸준히 쓰는 거지요. 



최재천 교수님이 글 잘 쓰시는 건 익히 알았지만, 김병종이라는 화가분이 이렇게 달필인 줄은 몰랐어요. 책도 30권 넘게 내신 작가시더라고요. 대담 중에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아주 오래전에 <뉴욕타임즈>에 어떤 여성 미래학자가 앞으로는 전 분야 전 영역에서 글을 잘 쓰는 사람이 득세하게 될 것이라고 했어요. 우리나라에 정말 쟁쟁한 과학자가 많은데, 대표 과학자 하면 많은 분이 최 교수님을 떠올리는 건 글의 힘이 아닐까요.”

이에 대한 최교수님 말씀.

“글을 잘 쓰는 사람이 득세할 것이라는 예언은 이미 현실로 드러났습니다. <이기적 유전자>를 쓴 리처드 도킨스가 유사 이래 가장 훌륭한 생물학자는 아니잖아요. 그러나 많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다윈 이래 가장 탁월한 생물학자 중 한 사람으로 자리 잡았지요. 리처드 파인만도 마찬가지예요. 두 사람의 공통점이 뭔가요? 둘 다 연구도 열심히 했지만, 대중이 읽을 수 있도록 책을 많이 썼다는 겁니다. 여기서 말하는 대중은 동료 생물학자나 동료 물리학자를 포함한 대중입니다. 그러다 보니 도킨스가 책에서 설명한 내용들이 실제로 진화생물학의 발전을 견인하고, 파인만의 이론이 보다 널리 퍼지면서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많은 IT 기술들이 실용화되는 길이 열리게 된 겁니다. 과학자가 글을 잘 쓰면 본인만 유명해지는 게 아니라 과학이 더불어 발전하게 됩니다.”
 
저는 2007년 <PD가 말하는 PD>라는 책에 공저자로 참여했어요. 흔히들 피디는 대학에서 신문방송학이나 언론홍보학을 전공한 사람들이 하는 직업이라고 생각하는데, 저는 피디가 다양한 학문적 배경을 갖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공대를 나오고도 피디로 즐겁게 살 수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글을 썼지요. 나중에 모 공중파 피디를 만났는데, 자신도 공대를 나왔는데 제 글을 보고 용기를 얻어 지원했다고요. 그분의 감사 인사를 받고 완전 뿌듯했어요. 새벽에 일어나 블로그에 연출일기를 올리고, 고등학교 진로 특강을 다닌 나 자신을 긍정 받은 느낌이었어요. 자신이 하는 일을 사랑하는 마지막 단계는 그 일의 즐거움을 글이나 말로 대중들에게 전하는 것이라 생각하거든요. 

생명이라는 주제를 갖고 두 거장이 대화를 이어갑니다. 과연 생명의 시작은 언제부터일까요? 흔히 알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 이런 논의를 하는데 최재천 교수님은 당연히 알이 먼저라고 하십니다. 알 속의 DNA가 닭을 만들어내고, 그 닭이 더 많은 알, 더 많은 DNA를 만들어낸다고요.

저도 알이 먼저라고 생각합니다. 복잡한 것(닭)보다는 간단한 것(달걀)을 만드는 게 더 쉽거든요. 모든 일은 단순한 것부터 먼저 이루어져야 합니다. 드라마도 마찬가지예요. 먼저 석줄 짜리 아이디어가 있고, 거기에 살을 붙여 세장 짜리 기획안이 나오고요. 그걸 대본으로 쓰지요. 그런 다음 배우나 촬영진이 붙어 영상을 제작합니다.

제가 요즘 중년을 위한 노후대비 강의를 다니면서, 인생 이모작을 하라고 권하면 이렇게 묻는 분들 있어요. “선생님은 잘 나가는 피디였으니까 작가도 할 수 있지요.” 글쎄요. 모든 피디가 노후에 작가가 되는 건 아닙니다. 제가 어려서 꿈이 피디였던 것도 아니고요. 저는 항상 가장 단순한 일을 가장 열심히 합니다. 영업 사원으로 일할 때는 새벽에 일어나 영어 문장을 외웠고요. 피디로 일할 때는 새벽에 일어나 블로그에 글을 올렸어요. 단순한 것을 지속하는 데 힘이 있어요.

지금 이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는 삶, 그 속에 보람과 즐거움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이 책에서 더 하고 싶은 이야기는 팟캐스트 & 유튜브 <내가 빌린 책>에도 올렸어요.

유튜브 뮤직에서도 검색 가능합니다. 팟빵에도 있고요. 유튜브 채널, 구독과 좋아요는 큰 힘이 됩니당~^^ 

https://youtu.be/W7cf0Qywd1Q?si=MCbJESHR3UOR3qJ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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