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움 수업> 책을 보면, 회사 후배랑 정기적으로 하는 독서 모임이 나옵니다. 같이 한양도성 순성길을 걷고, 또 책을 권해주고 그럽니다. 12월 초에 남산 둘레길을 걷기로 했는데요. 갑자기 일정이 생겼어요. 새 책 준비하며 바빠져서 약속을 미뤘어요. 12월 19일에 만나기로 했는데, 날씨가 너무 추운거예요. 미안하더라고요. 12월 초에는 그나마 걸을 만 했는데, 나 때문에 고생하겠구나... 어떡하지? 문득 두 달 전 한겨레 신문에서 본 기사가 떠올랐어요.
'국립한글박물관의 기획특별전 ‘서울 구경 가자스라, 한양가’(내년 2월12일까지)는 조선 후기인 1844년에 쓰인 한글 가사 ‘한양가’를 바탕으로 당시 번화했던 서울의 모습을 그리는 전시다. ‘한산거사’라는 필명을 쓴 저자는 누구인지 알려지지 않았지만, 당시 한양의 풍성한 볼거리를 최초로 한글로 생생하게 표현한 이 작품은 인기를 끌었고, 1880년에는 목판인쇄를 통해 상업용 출판으로도 이어졌다. 작품이 세상에 나온 뒤 반세기 가까운 시간이 흐르는 동안에도 그 화제성과 인기가 사그라들지 않은 스테디셀러였던 것이다.
이 작품이 인기를 끌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한양가’에서 소개된 흐름에 따라 서울을 여행하는 방식으로 꾸며진 전시실을 따라가다 보면 이 작품의 매력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 특히 양반들의 한문 문학에서 점잖게 묘사된 한양 이야기를 1부에서 보고 나면, 2부에서 펼쳐지는 ‘서울 구경’은 유쾌함의 정수를 보여준다. 한산거사는 보통의 대중이 궁금해할 만한 서울이 무엇인지 완벽하게 파악하고, ‘써야 하는 것’이 아닌 ‘읽힐 만한 것’으로 작품을 구성했다. 당시 도성 안에 실재하는 것 중에서 사람들이 궁금해하거나 보고 싶어 할 만한 요소들을 쏙쏙 골라 한글로 상세하게 묘사한 것이다.'
https://www.hani.co.kr/arti/culture/music/1113977.html
한양도성 순성길을 같이 걸은 친구랑 200년 전 한양 구경을 가도 좋겠구나, 싶어서 박물관 나들이를 제안했고요. 친구도 흔쾌히 받아주더군요. 이렇게 날짜를 바꾸고 장소도 바꿔도 너그럽게 받아주는 친구가 있어 좋아요. 시간의 힘이지요. 10년 이상 서로 힘든 시절을 지켜준 인연의 힘.
4호선 이촌역에 내리니 박물관길이라고 지하보도가 국립박물관까지 이어져 있어요. 마침 이곳은 친구가 카투사로 복무한 미군 부대가 있던 자리라고요. 한글박물관이 있는 곳은 헬기장이었다고요.
먼저 2층 상설전시관부터 봅니다. 한글 창제의 의미에 대한 전시가 나오고요. 여행을 다니며, 한글의 소중함을 매번 느낍니다. 베트남의 경우, 수백년 전 지배계급은 중국의 한자를 공용문서에 썼지만, 일반 백성들을 위한 문자는 없었어요. 그래서 프랑스인 선교사가 베트남 말을 표기할 수 있는 문자를 만들어주지요. 물론 선교를 위한 목적으로요.
왕이, 백성들의 불편함을 헤아려 직접 문자를 만든 예를 역사적으로 찾아보기 힘듭니다. 중국의 한자는 너무나 방대하고 어려워 일반 백성들이 배울 수는 없었어요. 그래서 중국 공산당도 한자 개혁을 해서 글자 수를 줄였지요. 일본의 경우, 한자를 기본으로 히라가나를 만들었고요. 지금도 여전히 한자가 병용됩니다. 이웃나라를 살펴봐도 왕이 백성들을 위해 배우기 쉽고 쓰기 쉬운 문자를 직접 만든 예가 없어요. 세종 대왕님의 애민 정신에 다시 한번 고개가 숙여집니다.
정조가 어릴 때, 원손 시절 큰외숙모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서릿바람에 기후 평안하신지 문안 알고자 합니다. 뵌 지 오래되어 섭섭하고 그리웠는데 어제 편지 보니 든든하고 반갑습니다. 할아버님께서도 평안하시다 하니 기쁘옵니다. 원손.'
전시 설명은 디지털 인터랙티브로 되어 있기에 원문을 터치하면 지금 쓰는 한글로 풀어주거나 확대해서 보여줍니다. 전시관 설계를 참 잘해뒀어요. 이렇게 멋진 문화 공간이 공짜라니 짠돌이 다시 한번 감읍함니다. ^^ (네, 국립 한글 박물관은 특별전시며 상설전시며 다 무료 입장이에요.)
이제 3층 특별전시관으로 갑니다. 한양구경의 시작은, 지금 현재의 서울 사진 사이로 그래픽으로 재현한 한양의 모습이 나옵니다. 이제 시간 여행을 떠나봅니다.
임금님이 있는 궁궐이며, 조선 팔도에서 온 가지각색의 상품을 벌여놓은 가게들, 정승과 판서가 수행원을 거느리고 행차하는 모습이 펼쳐집니다.
기사에 나온 문화재 칼럼니스트 신지은 선생님의 글을 다시 인용합니다.
'‘한양가’에 등장하는 광경들은 한양에 간다고 해서 아무나 다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궁궐에 드나들며, 번화가를 훤히 꿰고 있으며, 이름난 기생과 악공들을 섭외해 한바탕 공연을 벌일 화려한 무대를 디자인하고, 과거에 급제한 이들이 합격 축하를 받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재력과 직업을 갖춘 사람이어야 했다. 즉 작품 안에서 독자를 안내하는 인물은 한양의 별천지를 오락으로 소비할 수 있는 사회적 지위를 가졌으면서도 제일 재미있게 놀 줄 아는 ‘인싸’였던 것이다.
왕의 경호원이었던 별감들이 무대를 차려놓고 기생과 악공을 모아 춤과 노래를 즐기던 승전놀음, 임금을 모신 행렬이 배로 다리를 이어 강을 건너가는 장면, 과거시험 같은 행사들은 어떠한가. 아무리 서울이라고 해도 매일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당시에는 평생 한양에 살았어도 작품 속 장면들을 직접 보지 못한 이들도 많았을지 모른다.'
저는 항상 일용할 일상의 설렘을 찾아다닙니다. 매일 아침 집으로 배달되는 한겨레 신문을 읽을 때도 설렘을 찾아봐요. 어떤 책을 읽을까, 어떤 영화를 볼까, 어떤 전시에 갈까, 기사를 볼 때마다 가슴에게 물어봅니다. 너 지금 두근거리는 거니? 가슴을 뛰게하는 글을 보면, 이제 다리를 움직여야 합니다. 아, 물론 그 전에 손부터 움직여요. 일단 그 기사를 메모해 둡니다. 당장 갈 수는 없더라도 내일의 나를 위해 기록해둡니다.
지역 강의를 다니며 다양한 박물관 구경을 합니다. 예전처럼 딱딱한 역사 자료 전시가 아니에요. 이제는 박물관에서 눈을 즐겁게 해주는 영상 콘텐츠를 전시에 활용하고 있거든요. 한양가 전시도 마찬가지에요. 옛 문헌 속 세부 묘사를 바탕으로 다양한 영상과 체험을 꾸며두었어요. 디스플레이 하나하나 들여다보고 눌러보고 과거와 지금의 한글을 비교해보는 재미가 있어요.
추운 겨울, 집안에 웅크리고 계시지만 말고요. 박물관 나들이도 즐겨보시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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