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소설 '시간여행자의 아내'를 읽고, 웹진 '크로스로드'에 기고한 글입니다. 

이것은 궁극의 판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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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살 난 여자 아이가 사람이 오지 않는 공터에서 혼자 놀고 있는데, 벌거벗은 삼십대 후반의 남자가 덤불 뒤에서 번쩍 하고 나타난다. 적절한 가정교육을 받은 여자 아이답게 남자에게 누구냐고 외친다. 그가 안녕, 지구인아.’하고 외계인 흉내를 내자, 영리한 소녀는 바로 꺼지라며 구두를 던진다. 코피가 터진 채 나타난 벌거숭이 남자는 여자아이에게 자신은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라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아이의 눈앞에서 마술처럼 사라져버린다. 이것이 시간여행자 헨리와 그 아내 클레어의 첫 만남이다.

 

시간 여행자 헨리는 훗날 자신의 아내가 될 어린 시절의 클레어를 찾아온다. 삼십대 후반의 헨리는 때때로 시간여행을 통해 클레어를 찾아와 6살 소녀의 놀이 친구가 되어주기도 하고, 10대 소녀가 된 클레어를 위한 보디가드가 되어주기도 하며, 아내의 성장 과정을 내내 지켜준다.

스무 살 처녀가 된 클레어는 아직 자신의 존재조차 모르는 28세의 헨리를 찾아간다. 클레어의 어린 시절을 찾아온 헨리는 36세의 헨리, 즉 미래에서 날아온 헨리였으므로 현재의 헨리는 클레어를 낯선 사람으로 대한다. 클레어는 청년 헨리와의 첫 만남에서 자신은 당신의 아내가 될 사람이라고 말한다.

 

오래전부터 결정지어진 운명에 따라 둘은 사랑을 나누고, 결혼하고, 생을 같이 보낸다. 그리고 36살이 된 시간 여행자 헨리는 다시 여섯 살의 클레어를 만나러 과거로 시간여행을 간다. 이렇게 두 사람의 사랑은 꼬리를 물고 다시 시작된다.

 

예전에 한 일본인 학자가 이런 주장을 한 적이 있다. ‘생물학적으로 봤을 때, 인간은 일생에 3번 결혼하는 게 이상적이다. 어린 20대 여성은 40대 중년 남자를 만나 정서적으로나 물질적으로 안정적인 지원을 받고, 30대에는 동년배의 남녀가 같이 살며 자녀를 양육하고, 40대에 들어서 성적 욕구가 왕성해지는 여성은 역시 성적인 활동력이 가장 왕성한 시기인 20대 남성과 맺어져야 이상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다.’

 

처음에 이 주장을 듣고, ‘원조교제나 연상녀 연하남 만남을 설명하기 위해 일본 학계도 참 애 쓰는구나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편으로 어린 여자와 나이든 남자, 나이든 여자와 어린 남자가 끌리는 현상에 대해 나름 논리적인 설명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일부일처제 현실에서는 실현 불가능한 얘기 아닌가?

 

현실에서 실현 불가능한 문제를 상상력의 도움을 얻어 단숨에 해결하는 것이 소설의 역할이다. ‘시간여행자의 아내는 과거와 미래를 오가며 사랑을 나누는 헨리와 클레어의 관계를 통해 궁극의 로맨스를 펼쳐낸다.

 

하지만 소설에서 시간 여행을 통해 생겨나는 서로의 나이 차이는 생리 욕구를 해결하기보다 두 사람을 정서적으로 더욱 끈끈하게 맺어주는 역할을 한다. 니페네거의 소설이 완전한 사랑을 꿈꾸는 이들에게 궁극의 환타지로 다가오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불안한 사춘기를 보내는 10대의 클레어에게 정신적으로 성숙한 30대 후반의 헨리는 최고의 연인이다. 심지어 헨리는 발정난 10대 소년처럼 육체적인 관계에 연연하지도 않고, 좋은 말동무만 해줄 뿐이다. 모든 10대 소녀들이 가진 미래에 대한 불안은 다음과 같다. ‘어떤 남자와 결혼할까?’ ‘내가 행복한 결혼에 성공할까?’ ‘예쁜 아기를 가질 수 있을까?’ 등등. 클레어는 6살 때부터 이런 고민을 할 이유가 없었다. 가끔 천사처럼 나타나는 멋진 아저씨가 미래의 남편이란다.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고 있는지, 얼마나 사랑받게 되는지 확인한 10대의 클레어는 데이트 상대가 없다고 안절부절 못할 이유가 없다.

 

헨리의 입장에서도 시간여행은 최고의 결혼 상대를 찾는 이상적 수단이다. 그는 자신의 아내의 어린 시절로 찾아가, 사춘기 시절의 방황과 괴로움을 견디도록 도와주고, 성인이 된 아내가 자신을 찾아오도록 사랑에 빠뜨린다. 생각해보면, 이건 모든 남자의 로망이 아닌가! 아내의 어린 시절로 날아가 그녀가 엉뚱한 녀석에게 눈길을 주지 않도록 아내의 시선과 사랑을 단단히 묶어 둘 수만 있다면! 우리의 사랑은 미래에 대한 불안, 과거에 대한 후회로 늘 불안하다. 사랑을 지키는데 시간 여행만큼 확실한 방법은 없는 것 같다.

 

모든 시청자는 시간여행을 꿈꾼다.

 

드라마를 볼 때마다 느끼는 점이다. ‘모든 시청자는 시간여행을 꿈꾼다.’ 드라마 속의 사랑을 완성시키는 방법은 시간여행이다. 여기서 시간 여행은 물리적인 시간 여행이 아니라, 결혼 상태와 관계의 역행이다. 최근 유행하는 연속극의 줄거리를 딱 한 문장으로 표현하면? 바람난 남편에게 버림받은 이혼녀가 젊은 재벌 2세를 만나 사랑과 일에 성공한다. 시장은 정직하다. 이런 드라마가 많다는 것은 이런 사랑을 꿈꾸는 시청자가 많다는 뜻이다. 이미 30대에 들어서고, 애도 있고, 남편도 있는 주부들이 꿈꾸는 궁극의 로맨스는 시간을 되돌려 연애 시절로 돌아가는 일이다. 다시 싱글로 돌아간다면, 다시 젊은 남자를 만나 사랑할 수 있다면. 까칠한 재벌 2세를 만나 아줌마의 성숙한 인간적 매력으로 감싸 안아 줄 수 있다면! 시간을 되돌리고 싶은 주부들의 소망이 숱한 연속극으로 표현되는 것 아닐까?

 

드라마 속에서는 다들 시간을 초월한 사랑을 꿈꾸지만, 정작 시간여행을 소재로 다룬 드라마는 좋아하지 않는다. ? 아직은 시간여행을 본격적으로 다룬 드라마가 없었다. 현실에서는 시간여행은커녕, 시간여행을 다룬 시트콤도 성공하기 어렵다.

 

SF 매니아라고 자부하는 나는 오랜 세월 시간여행을 다룬 작품을 연출하고 싶었다. 그래서 시간여행을 소재로 한 판타지 시트콤을 만들었다. 제목은 조선에서 왔소이다.’ 그때 주위의 모든 작가들과 연출이 나의 무모한 도전을 말렸다. 한국에서 아직 시간여행은 대중적인 소재가 아니라고, SF는 시기상조라고, 다들 말렸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나는 작가들의 우려대로 처참하게 실패했다. 조선시대 양반과 그 종놈이 300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현재로 오는 이야기였는데, 시청률 저조, 광고 판매 부진, 제작비 초과라는 연출가의 3대 죄악을 범하고 조기종영 되고 말았다.

 

물론 이제껏 시간 여행을 다룬 작품이 성공한 적이 없다고 앞으로도 성공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대장금부터 뿌리 깊은 나무까지 날이 갈수록 탄탄한 필력을 구사하고 있는 한국 드라마 최고의 작가, 김영현 박상연 콤비가 차기작으로 현대에서 시작해 미래로 가는 SF를 구상중이라고 밝혔다. 한국 대중문화계에서 SF를 더 널리 알릴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 기대한다. 무엇보다 소재 고갈로 비슷한 얘기만 반복하고 있는 한국 드라마가 SF에서 빌려 온 새로운 상상력으로 더욱 진화하기 바란다.

 

시간여행은 물리적으로는 불가능할까?

 

시간여행은 과연 소설이나 드라마 속에서만 가능하고 기술적이나 물리적으로는 불가능한가? 소설 시간 여행자의 아내는 이 딜레마를 어떻게 해결했을까? 오드리 니페네거는 꽤 영리하게 시간 여행의 문제를 피해간다. 시간여행자 헨리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찾아가는 사람은 물리학자가 아니라 유전학자다.

 

만약 헨리가 물리학자를 찾아가 시간 여행의 비밀을 풀려고 했다면 여러 가지 딜레마에 봉착했을 것이다. 소설은 유전학자 켄드릭 박사의 입을 빌어 헨리의 시간여행이 유전학적 질병이라고 설명한다. 어쩌면 진화의 결과, 새롭게 나타난 현상일지 모른다는 것이다. ‘사람에게는 시간 유전자가 있습니다. 태양의 움직임에 따라 생체주기 리듬을 관장하는 역할을 하지요. 그 유전자에 이상이 생기면 시간장애가 발생하지요.’ 우리의 작가님은 주인공을 도와주는 과학자를 물리학자 대신 유전학자로 설정함으로써 물리학자들과의 설전을 피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시간여행은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내가 항상 하는 말이 있다. “지금 기술로는 당연히 불가능하지. 하지만 지금 불가능하다고 미래에도 안 된다는 보장은 없어.”

 

난 요즘 싱가폴에 해외 파견 근무 중인 아내와 매일 저녁 아이패드 영상통화 기능인 페이스타임을 한다. 아이들과 나는 전면 카메라와 후방 카메라로 시점을 교차해가며 서로의 공간을 넘나들며 이야기를 나눈다. 아이들의 얼굴과 아이들이 보고 있는 풍경을 교차로 보다보면, 내가 시공을 초월한 대화를 나누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수 십 년 전에는 생각도 못했던 일이 이제는 우리의 일상이 되었다.

 

내가 만약 20년 전 스무 살 청년인 나를 만나, 이런 얘기를 한다면 그는 나를 믿어줄까? 손 안의 작은 기계로 전 세계 사람들과 얼굴을 보며 대화를 나누고, 손안의 작은 기계로 수 십 년 전 영화도 찾아내어 볼 수 있다는 얘기를 그가 믿어줄까? 스무 살 시절의 나를 찾아간다면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 ‘AFKN에서 하는 클래식 영화를 비디오로 녹화하느라 그렇게 밤샐 필요 없다. 나중에 다 공짜로 다운받아 보면 된다. 아니, 무엇보다 그 많은 비디오, 이사 다닐 때 마누라에게 구박받는 짐이 된다. 심지어 20년 뒤에는 비디오 플레이어가 없어져 그때 가서는 보고 싶어도 못 본단다.’

 

나는 직업이 드라마 PD라 시간여행을 현실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방법은 모르겠다. 그러나 시간여행을 가상 체험하는 방법은 두 가지 알고 있다.

 

시간여행 같은 사랑을 경험하는 방법.

 

사랑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 일이다. 아내를 처음 만났을 때 아내는 스물 네 살이었다. 난 아내의 스무 살 때, 혹은 열일곱 살 때 모습이 늘 궁금했다. 날 만나기 전 어린 시절의 아내는 어땠을까? 그런 궁금증은 딸을 얻은 이후 사라졌다. 딸이 둘인데, 키우는 재미가 쏠쏠하다. 아빠로서 아내를 닮은 딸들과 사랑에 빠지는 건, 아내의 어린 시절로 시간여행을 떠나 어린 시절의 아내와 사랑에 빠지는 것과 같다.

 

시간여행을 경험하는 또 다른 방법. 책을 두 번 읽는 것이다. 서평을 쓰기 위해 3년 전에 읽은 책을 다시 꺼내들었다. 예전에는 이야기의 결말이 궁금해서 밤잠 설쳐 가며 읽은 책인데, 결말을 알고 있는 두 번째는 마치 미래에서 온 시간여행자처럼 좀 더 느긋하게 사건의 흐름을 즐길 수 있었다. 물론 소설 속 주인공들에게 위기가 닥칠 때 마다, ‘안돼! 그렇게 하면 안돼!’ 하고 미리 외치긴 하지만, 내가 아무리 주인공에게 일러줘도 책의 내용은 바뀌지 않는다. 마치 시간여행자가 아무리 노력해도 이미 정해진 과거는 바꿀 수 없듯 말이다.

 

시간여행은 아직 불가능해도, 시간을 초월한 사랑은 가능하다. 또한 독서를 통해 시공을 초월한 여행을 즐기는 것도 가능하다.

 

마지막으로 책 첫머리에 나오는 문장 하나........

 

도서관에 들어서면 나는 성탄절 아침에 아름다운 책으로 가득 찬 선물 상자를 받은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아직 읽지 못한 책을 소개받을 때도 나는 선물 상자를 받아든 기분이다. 나는 지금 여러분께 시간여행자의 아내라는 선물을 드리고 있다. 이제 그 상자를 열고 선물을 즐기는 것은 여러분의 몫이다.

(웹진 '크로스로드'는 '책 대 책'이라는 Book Battle을 진행중입니다. 서평과 함께 대담 행사도 준비중이에요. 기사 원문과 시간여행에 대한 다른 서평을 읽으실 분은 이 글을 클릭해주세요~)

Posted by 김민식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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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런 영화도 있었네요 2012.02.06 19: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 소설 꼭 봐야 할 거 같네요. 전 작가 교육을 받던 초기에 시간 여행에 관한 걸 썼는데 SF를 매우 좋아하던 작가분이라 다행히 집어 치우란 소리가 아니라 조언을 들었어요. 애니매이션으로 가라는 권유. 그리고 꼭 드라마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저에게 충고하시길 꼭 유작으로 하라고... ^^ 유작은 아니어도 작가로 입지라는 게 생기면 꼭 써보고 싶어요~ 아직 SF를 놓지 않으셨다면 그때 모른 척 하지 말아주세요! ^^

    • 김민식pd 2012.02.08 08:2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시간여행... 쉽지 않은 소재이지만 그러기에 그만큼 더 매력적인 이야기지요~ 작가로서의 입지가 높아지시면 작가님이 먼저 저를 쌩!하실거라는데 한 표! ^^

  2. 2012.02.08 09: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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