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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짜 PD 스쿨

나는 일과 삶의 균형을 원하지 않는다

by 김민식pd 2018. 11. 9.

(전북 문화저널 2018 11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제 직업은 드라마 피디입니다. 일과 삶의 조화를 이루기 참 어려운 직업이지요. 작가, 배우, 촬영진 등 각 분야의 전문가들과 협업을 하는데요, 대본 작업에서부터 촬영, 편집, 음악 선곡에 이르기까지 모든 작업에 참여하기에 노동 강도가 무척 높습니다. 예전에 미니시리즈 <내조의 여왕>을 연출할 때는 하루에 2시간씩 자면서 일했어요. 새벽 5시에 촬영이 끝나고 집에 들어가서 씻고 나와 아침 7시부터 다시 일하는 날도 있고요. 드라마가 끝나고 면역력 저하로 대상포진에 걸려 고생하기도 했어요. 어느 날 아내가 회사에 해외 파견 근무를 신청하더군요. 늦둥이 딸이 당시 다섯 살, 한창 재롱을 부릴 나이인데 헤어져 산다고 생각하니 너무 속상했어요. 가지 말라고 붙잡는데 아내가 일침을 놨어요. “어차피 당신은 드라마 연출하느라 집에도 못 오잖아.” 기러기 아빠가 늘어나는 건, 잦은 야근과 주말 근무로 아빠의 부재가 아이들에게 너무 익숙한 탓인지도 모르겠어요. 

지난 봄 <이별이 떠났다>라는 드라마를 만들었는데요. 조연출하는 후배가 어느 날 회사에 여행용 캐리어 가방을 끌고 나타났어요. “어디 여행 가니?” 촬영 시작하면 퇴근하기 쉽지 않으니까 아예 갈아입을 옷을 회사에 가져다 놓고 생활하더군요. 밤샘 촬영하고 편집실에 와서 소파에 누워 토막잠을 자고 화장실에서 옷 갈아입고 다시 촬영 나가는 거죠. 저는 예전에 커다란 배낭에 갈아입을 옷을 싸가지고 다녔어요. 겨울에 야외 촬영을 할 때는 방한복을 몇 겹씩 껴입어도 추워요. 며칠씩 집에 못 들어가니 면도도 못하고요. 잠을 못 자 벌겋게 충혈 된 눈에 배낭을 메고 지하철을 타면 사람들이 다 멀찍이 피합니다. 집에 와서 거울을 보니 그 속에 노숙자가 한 사람 있더군요.

예능 조연출의 경우, 평균 노동시간이 일주일에 100시간이 넘습니다. 앞으로는 52시간 노동시간에 맞춰야 합니다. 방송 분량은 줄지 않는데 일하는 시간은 반으로 줄여야합니다. 공중파끼리 경쟁하는 시대를 지나, 케이블과 종편에 이어 이제는 유튜브 등 1인 미디어와도 경쟁해야 하는데 말입니다. 노동시간을 어떻게 하면 줄일 수 있을까, 예능 피디들이 모여 대책회의를 하는데 누가 볼멘소리를 했대요.

“잘 나가는 유튜버들은 더 재미난 콘텐츠를 만들기 위해 밤을 새워 방송을 만드는데, 공중파 예능을 만드는 우리가 주당 52시간 노동시간을 지키며 어떻게 경쟁할 수 있겠습니까?”

취미로 유튜브를 만드는 사람과, 직업으로 예능을 만드는 사람의 차이가 여기에 있어요. 일과 취미의 차이. PD가 노동시간을 준수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유튜버는 자신을 혹사하는 걸로 끝나지만 PD의 과다 노동은 스태프들의 과다 노동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일하는 방식을 바꿔야 할 때입니다. 

저는 대학 졸업하고 1992년에 첫 직장에 들어갔는데요. 당시로서는 드물게 주5일 근무하는 회사였어요. 미국계 기업이었거든요. 일은 육체적으로 힘들지 않은데, 정신적으로 괴로웠어요. 치과 외판 사원으로 일을 하는데, 바쁘게 일하는 의사 선생님들에게 영업하기가 쉽지 않았어요. 무작정 찾아갔다가 욕을 먹고 쫓겨나기도 하고요. 일이 힘들어 회사를 그만두려고 했더니 동료들이 말렸어요. “원래 먹고살자고 하는 일은 힘든 게 당연한 거야. 대신 우리 회사는 주5일 근무에 정시퇴근을 하니까, 취미 생활하기에 좋잖아?” 요즘으로 따지면 ‘워크 라이프 밸런스’가 좋은 직장이지요. 일에서 오는 정신적 괴로움을 잊기 위해 퇴근 후 영어 공부에 매진했습니다. 학창 시절에는 공부가 참 싫었는데, 직장인이 되어 스스로 마음을 내어 하는 공부는 참 즐겁더군요. 대학생들 사이에 양복에 넥타이 차림으로 앉아 수업을 받는 것도 재미있고요. 역시 돈은 버는 것보다 쓰는 편이 더 즐겁습니다. 미국 드라마에 자막 다는 일을 돈 한 푼 안 받고 하는 사람들 마음을 이해할 수 있어요. ‘이렇게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을 수는 없을까?’ 결국 사표를 던지고 나와 외대 통역대학원에 진학했어요. 

재미난 일을 먼저 찾고, 그 일을 직업으로 삼자는 건 그 이후 제 삶의 모토가 되었어요. 통역대학원에 다닐 때는 미국 시트콤을 보는 재미에 빠졌어요. 시트콤을 직접 만들고 싶다는 생각에 나이 서른에 MBC PD가 되었고요. 예능 PD로 사는 동안, 취미는 퇴근 후 드라마를 보는 것이었지요. 결국 나이 마흔에 드라마 PD로 이직했어요. 지난 몇 년, 책 읽고 글을 쓰는 게 참 즐겁더라고요. 그래서 지금은 작가라는 직업에 도전하는 중입니다. 

워크 라이프 밸런스가 필요한 이유는, 일이 너무 힘든 탓 아닐까요? 일하는 게 너무 힘들면 일과 삶을 분리하려고 하지요. 직장 상사의 갑질을 견디고 고객의 갑질을 견디며 일하는 일상이 내 삶의 전부라고 인정하는 순간 괴로워지니까요. 일은 삶을 유지하기 위해 돈을 버는 수단에 불과하고, 나의 삶은 일이 끝나는 순간 시작한다고 믿어야 힘든 직장생활을 버틸 수 있는 게 아닐까요? 그런데요, 어쩌면 진짜 좋은 삶은 이렇게 일과 삶을 분리하는 것보다 하나가 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저는 일과 삶의 균형을 원하지 않아요. 아니 오히려 일과 삶이 하나가 되기를 바랍니다. 피디와 작가라는 일은 제게 있어 노동과 공부와 놀이의 삼위일체입니다. 나의 노동으로 무언가를 만들기에 이것은 일이요. 그 과정에서 나 자신과 사회에 대해 배우기에 좋은 공부입니다. 또 사람들과 모여 재미난 무언가를 만들기에 최고의 놀이기도 하고요.  

워크 라이프 밸런스가 필요한 이유는, 고객의 갑질을, 상사의 갑질을 견디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일하는 환경이 너무 열악해서 그래요. ‘워라밸’도 중요하지만, ‘워라밸’을 신경 쓸 필요가 없는 일터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퇴근 후 나의 삶이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일터에서 서로의 삶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그런 문화가 자리 잡히기를 소망합니다. 퇴근시간만을 간절히 기다리며 사는 건 삶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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