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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독서 일기

행복한 남자로 사는 비결

by 김민식pd 2018. 4. 23.

예전에 소개한 임승수 작가님의 새 책이 도착했습니다. 

<나는 행복한 불량품입니다> (임승수 / 서해문집)

첫 촬영을 앞둔 주말, 서둘러 책을 펼쳤습니다. 역시 한 쪽 한 쪽, 스승님의 금쪽같은 말씀이 펼쳐집니다. 특히 눈길을 사로잡은 대목이 있어 감히 필사해봅니다. 좋은 글은 베껴쓰는 것도 공부거든요. 임승수 작가는 부부가 모두 전업작가로 일하고 있는데요, 아내를 만난 대목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아내는 모 일간지의 문화부 기자였는데, 당시 <차베스, 미국과 맞짱뜨다>를 출간한 저자인 나를 인터뷰하면서 처음 만나게 됐다. 약속 장소는 신촌의 민들레영토였는데 당시 아내는 보라색 원피스를 입고 나왔다. 어떻게 오래전에 입었던 옷을 그렇게 구체적으로 기억하느냐고? 처음 만난 아내의 모습이 충격적으로 예뻤기 때문이다. "미인에게 마음이 가면 상처만 돌아온다."

당시 30대 남성으로서 삶의 경험을 통해 체득한 금언이다. 나는 아내를 보자마자 마음속에 견고한 만리장성을 쌓았다. (중략)

그러나 아내는 외모가 아니라 뇌주름을 보는 여자였다. 인터뷰 때 슬쩍 엿본 내 뇌주름이 썩 괜찮았는지, 이래저래 인연이 이어져서 함께 수원 성곽도 거닐고 갈비도 구워 먹을 기회가 생겼다. 쥐구멍에도 볕 들 날 있다더니, 멀쩡한 직장 때려치우고 불확실한 삶을 선택한 나에게 흔치 않은 기회가 온 것이다. (중략) 나는 아내가 1분 이상 내 얼굴에 집중하지 못하도록 노력했다. 뇌주름 위주로 어필하면서 끊임없이 재미있는 얘기를 쏟아내어, 자칫 시각 쪽으로 쏠릴 신경을 청각 쪽으로 분산시켰다. 정적이 흐르는 가운데 상대 여성이 1분 이상 내 얼굴에만 집중하면 솔직히 일이 잘 흘러갈 리가 없지 않은가.

만난 지 2년 만에 아내에게 웨딩드레스를 입혔으니 작전은 그야말로 대성공이었다. (중략) 수입이 간헐적이고 불안정한 작가 나부랭이와 결혼해준 아내에게 지금도 여전히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다. 하지만 당시 내 입장에서 보면 실리적으로 무척 바람직한 결혼이었다. 내 간헐적 수입과 기자인 아내의 꾸준한 수입이 어우러지니, 이 얼마나 아름다운 조화란 말인가.

(위의 책 146쪽)


아, 이 얼마나 멋진 사랑고백인가요. 사랑에 빠진 작가는 출판을 통해 아내를 향한 열렬한 애정 표현을 하는군요. 저만 그런 게 아니네요.^^ 비싼 명품 선물을 사 줄 자신이 없습니다. 그래서 글을 통해 마님에게 립서비스, 아니 펜 서비스에 최선을 다하지요. 책을 읽다 문득 눈을 감으니 20년 전 아내를 처음 만났을 때 옷의 디자인까지 떠오르더군요. 남자는 다 똑같은가봐요. 

1997년 외대 통역대학원 신입생 환영회에서 아내를 처음 만났어요. 저는 2학년, 아내는 1학년. 신입생들 중에서 가장 외모가 눈에 띄는 아이가 있기에 덥석 옆에 앉았는데요. 그게 지금의 아내입니다. 아내는 처음에 제가 동남아에서 온 교환학생인줄 알았다고..... 남녀간의 첫 인상의 격차가 이 정도면, 비극의 시작입니다. 

저도 임승수 작가님과 비슷한 전략을 썼지요. 만나면 무조건 웃겨줬어요. 아내가 저의 청혼을 받아들였을 때, 제가 더 놀랐어요. "왜 나랑 결혼해주는 거야?" "선배를 만나면 하루에 한번은 꼭 웃는 것 같아." 네, 그 시절, 정말 열심히 웃겨줬어요. 하도 웃어서 아내가 눈물까지 찔끔거릴 정도로 배를 잡고 웃게 만들었지요. 결혼하고 나니 개그 감각은 사라지더군요. "이렇게 진지한 사람인지 몰랐네." ^^ 네, 치사하지만, 남자가 좀 그래요... 연애 시절엔 개그맨 뺨치다가, 결혼만 하면 묵언수행을 합니다... 

임승수 작가님은 작가의 간헐적 수입과 기자의 꾸준한 수입이 어우러지는 만남이라고 표현했는데요, 저는 아내에게 역공을 펼쳤지요. 아내는 졸업 후 한동안 프리랜서 통역사로 일했거든요. 통역사의 간헐적 수입과 피디의 꾸준한 수입이 어우러지는 만남. 아내를 보며 느꼈어요. '아, 그 고생해서 통대에 간 건, 오로지 이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였구나...'  

임 작가님은 <나는 행복한 불량품입니다>라고 쓰셨는데요. 당연히 행복하실 것 같아요. 아내를 향해 이런 절절한 헌사를 쓸 수 있는 사람이라면 당연 행복하지요. 행복은 멀리 있지 않아요. 아내를 처음 만난 순간을 생생하게 떠올리고, 그 첫 마음을 평생 간직하면 됩니다. 그럼 아내를 볼 때마다 막 뿌듯하고 고맙고 그렇게 되거든요.

내 곁에 있는 소중한 인연에게 감사한 마음으로 살기, 그게 행복의 첫걸음이 아닐까 싶어요. 


ps. (글의 마무리가 기승전-사랑고백으로 좀 뜬금없지요? 요즘 드라마 촬영으로 많이 바빠졌어요. 아내에게 점수를 만회하려는 몸부림으로 이해해주시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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