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공짜 PD 스쿨/딴따라 글쓰기 교실

번역자의 마음

by 김민식pd 2018. 5. 30.

1992년에 첫 직장에 들어가 회사를 다니면서 직장 생활이 쉽지 않다고 느꼈어요. 무엇보다 판에 박힌 시간에 출퇴근하고, 별로 재미있지 않은 일을 하며 평생을 살아야 한다는 게 싫었어요. 직장 생활에서 가장 힘들었던 점. 한 달 동안 열심히 일해서 세일즈 계획 기안을 올렸는데, 상사가 보고 "별로야. 다시 해."하면, 한 달간 일한 게 휙 날아가더라고요. 일한 성과가 남았으면 좋겠는데, 그런 일이 어디 없을까? 회사 때려치우고 남은 평생 책만 읽으며 살아도 좋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번역가의 삶을 꿈꾸게 되었습니다. 좋아하는 소설을 마음껏 읽고, 내가 작업한 결과가 수많은 사람들에게 즐거움이 되는 직업. 

<출판하는 마음> (은유 / 제철소)에는 출판에 관련된 일을 하는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오는데요. 그 중에는 번역자의 사연도 소개됩니다. 시사주간지 <시사인>에 '편집자가 뽑은 올해의 번역자'로 뽑힌 홍한별 님. 이 분은 영어를 어떻게 공부했기에 번역가로 이름을 날리게 된 걸까요?


영어를 사랑한 소녀가 영어 번역자로 산다. 영어와 한평생 살아온 영어 고수의 영어 공부법은 무엇일까. 역시나 "영어는 공부를 특별히 안 했다"고 한다. 고등학교 다닐 때도 20세기 영어 공부의 바이블 <성문종합영어>는 잘 안 봤고 교보문고에 가서 재미있는 문고판 영어책을 사서 읽었다. <소공녀>와 애거서 크리스티 소설을. 

(<출판하는 마음> 120쪽)


역시나 그렇군요. 저 역시 대학 다닐 때, 스티븐 킹의 소설을 원서로 읽은 것이 영어 독해 실력을 키우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어요. 영어의 고수가 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기에, 공부를 놀이로 접근해야 합니다. 홍한별씨도 저같은 국내파 영어 고수에요. 외국에 나간 적이 없고, 말하기 듣기 쓰기 훈련을 한 것도 아니랍니다. 오로지 책만 읽었대요. 


결론은 재밌는 읽기 활동이다. 재미를 느끼면 지속하게 되고 양이 쌓이면 실력이 는다는 얘기다. 그는 아이들에게도 특별히 영어 공부를 시키지 않는다. 아이들이 각각 중학교 1학년과 초등학교 4학년인데, 큰아이는 알파벳 정도 알고 입학했고 작은애는 모르고 들어가서 학교에서 배웠다. "영어가 공부해서 되는 게 아니고 좋아하면 저절로 되는 것"이므로 못해도 내버려두고 불필요한 사교육에 힘을 안 썼으면 좋겠다고 조언한다.

(위의 책 121쪽)  


영어 조기교육을 반대하는 사람으로서 크게 공감한 글입니다. 유명 번역자가, 심지어 영어로 먹고 사는 사람이 아이에게 심지어 알파벳도 안 가르친답니다. 아직 한글도 익숙하지 않은 아이에게 너무 이른 시기에 영어를 가르치려고 하면 아이가 책이나 어학 공부 자체에 흥미를 잃을 수도 있어요. 어린 나이에는 가급적 아이가 좋아하는 일에 집중할 수 있도록 시간을 줘야한다고 믿습니다. 

홍한별 님이 번역자가 된 비결은 무엇일까요?


어릴 적 양옥집에 살았다. 넓은 거실의 한쪽 벽면이 책꽂이였다. 아버지가 보는 일본어 책과 영어 책이 대부분이었지만 잘 뒤지다 보면 한국어 책이 한 권씩 나왔다. 주로 문고판으로 된 작은 책이었는데 종이가 누렇게 변색되고 삭아서 책을 만지면 톡 부러졌다. 그 오래된 냄새와 질감이 좋았고 책 종이를 자꾸만 부러뜨리고 싶었다. 손의 촉감으로 책을 익혔고, 습관적으로 책을 보는 아버지 덕분에 집 안에서 독서하는 분위기는 자연스럽게 형성됐다. 초등학생 무렵, 막연하게 생각했다. 나는 나중에 글을 쓰는 사람이 될 거야.

(위의 책 96쪽)


책 읽는 부모의 영향이 크지요? 저 역시 어린 시절 꿈이 작가였는데요, 공대에 진학한 후, 문학과 거리가 멀어졌다고 생각하고 포기했어요. 그러다 번역가라는 직업을 통해 다시 책의 세계로 진입하게 되지요. 번역도 매력적인 직업이라 생각합니다. 나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욕심이 너무 커서 번역을 접고 피디가 되었지만, 책을 좋아하고 영어에 자신이 있다면 한번 도전해볼만한 작업이라 생각해요.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