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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독서 일기

아버지의 손가락

by 김민식pd 2018. 10. 12.

<2018 이상문학상 작품집>에 실린 '손홍규 문학적 자서전 - 절망한 사람'을 읽었습니다. 농사꾼으로 살던 작가의 아버지가 어느날 탈곡기에 손이 빨려들어가는 사고를 겪습니다. 집게 손가락을 잃어버리고 농부로서 좌절을 겪습니다. 아버지는 이후 논마지기를 팔고 트럭 행상을 시작합니다. 하지만 장사꾼으로서 덕목을 갖추지 못한 아버지는 장사도 실패합니다. 

'언변이 좋았던 것도 아니고 넉살이 좋았던 곳도 아니다. 앞을 내다보는 밝은 눈도 없었고 신념까지는 아니라 해도 당신 일에 대한 믿음 자체가 없었다. 아버지는 트럭 행상으로 돈을 벌어도 뜻밖에 용돈을 받은 아이처럼 어리둥절해했다. 이런 일로 돈을 벌 수도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위의 책 149쪽)

책을 읽으면서 놀랐어요. 탈곡기 사고가 그렇게 흔한 일이었던가? 저희 아버지도 본인이 중학생이던 시절 비슷한 일을 겪어요. 아버지의 중지와 약지 끝은 없어요. 손톱 대신 뭉툭한 흔적만 남아있지요. 희안한 일은, 평생을 살면서 제가 아버지의 그런 상처를 인지하지 못하고 산다는 겁니다. 밥을 먹고, 모시고 한 달씩 여행을 다니면서도 한번도 아버지의 잘린 손가락을 의식한 적이 없어요. 

어머니도 아버지의 손가락 끝이 없다는 걸 모르고 결혼하셨대요. 그 시절에 드문 연애 결혼이었는데도 말이지요. 항상 백장갑을 끼고 다니는 멋쟁이라고 생각하셨대요. 젊어서는 잘린 손가락을 감추려고 장갑도 끼고 하셨나본데 요즘은 그러지도 않아요. 유심히 보지 않으면 모르거든요.

문득 그런 생각이 듭니다. 어쩌면 나의 결함이나 장애는 나에게만 신경쓰이는 일이 아닐까. 정작 주위 사람들은 무심한 거 아닐까. 아들로 평생을 살면서도 아버지의 잘린 손가락을 신경쓴 적이 없어요. 아버지 역시 교사로 살면서 잘린 손가락 탓에 힘든 적도 없고요. 손홍규 작가는 아버지의 좌절을 깊이 들여다봅니다. 

'아버지는 결국 실패했다. 빈 들판을 지나다가 거기 어딘가에 잔해로 묻혔을 당신의 손가락을 떠올렸을 테고 일단 한 번 그런 생각이 들면 장갑 낀 손이 탈곡기에 빨려 들어가던 순간으로, 운명이 완력을 쓰며 당신을 지어삼킬 듯이 끌어당기던 순간으로 되돌아갈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화들짝 놀라며 손을 당겼을 때는 이미 장갑과 집게손가락이 어두컴컴한 탈곡기의 아가리에 삼켜진 뒤였다. 불시에 닥쳐온 개인의 재난. 그 앞에서 흔히 옛사람들이 그렇듯이 당신은 스스로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런 벌을 받는 것일까 생각해보았을 테고, 이런 처벌을 받아도 괜찮을 만큼 큰 죄를 지은 적은 없는 것 같은데 왜 당신에게 이런 형벌이 주어졌는지 의아해했을 것이다. 운명을 이해해보려는 시도는 이처럼 실패할 수밖에 없었을 테고 이윽고 아버지는 이 세계를, 당신 자신을 증오하게 되었을 것이다.'

(위의 책 150쪽)

살면서 그런 날이 와요. '어쩌다 나는 이 지경에 처하게 되었을까?' 몇 년 전, 드라마 연출을 하지 못할 때 그런 생각을 많이 했지요. '나는 실력이 부족한 걸까? 인성이 부족한 걸까?' 사장님이 나를 싫어하신다는 얘기를 들으면 그런 생각이 들지요. '아, 파업할 때 좀 더 공손하게 할 걸 그랬나?' ^^ 그런 생각이 깊어지면 결국 나 자신을 미워하게 됩니다. '너는 그 때 왜 그랬어?'로 고민이 귀결되거든요. 자학으로 끝나는 고민이 싫어서, 저는 고민 자체를 잘 안 합니다. 그냥 지금 이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찾아보려고 합니다.

문학적 자서전의 끝에 손홍규 작가나 남긴 글이 마음에 오래 남습니다.

'오래전 내 꿈은 소설가였고 지금 나는 소설가인데 여전히 내 꿈은 소설가이다.'

소설가 대신 무엇을 대입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저의 경우에는 피디건, 작가건, 아버지이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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