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이별이 떠났다> 촬영중입니다. 바쁠 땐, 예전에 써놓은 여행기를 올립니다. 뒤늦은 런던 출장기에요~)
지난 2월 영국 런던에 출장갔을 때, 웨스터민스터 사원을 찾았습니다. 입장료가 22파운드(한화 32000원)나 하더군요. 심각한 고민에 빠졌어요. 예전에 봤는데 굳이 비싼 돈을 내고 다시 봐야할까? 외관을 본 걸로도 충분한데 말이지요. (외관 구경은 공짠데... ^^)
큰 마음 먹고 들어갑니다. 본전을 뽑아야한다는 생각에 오디오 가이드를 들으며 (입장료에 포함) 구석구석 샅샅이 돌아봅니다. 선교사로 일했던 데이비드 리빙스톤의 묘비가 있고요. 동인도회사를 설립한 사람의 기념비도 벽에 있고, 또 바닥에는 2차 대전 때 목숨을 잃은 무명 용사의 비가 있군요.
1000년된 예배당입니다. 종교에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도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공간이지요. 유발 하라리는 그런 말을 했어요. 호모 사피엔스는 이야기의 힘으로 문명을 발전시켜왔다고. 같은 이야기를 믿는 사람들이 문화와 문명을 발전시켰다고요. 웨스트민스터 사원을 돌아보며 드는 생각. 대영제국은 이야기 위에 지어진 제국이로구나.
선교사는 종교라는 이야기의 전달자입니다. 그 뒤를 따라 전능한 파운드화를 믿는 식민지 개척자들이 들어가지요. 무역을 이루는 매개체는 화폐입니다. 그 화폐는 동전이나 지폐에 새겨진 여왕이나 황제의 얼굴로 권위를 세웁니다. 선교사와 무역상을 지키는건 군인이고요. 웨스터민스터 사원에 잠든 선교사, 무역상, 군인의 사연을 읽다보니, 이곳은 대영제국이라는 이야기 체계를 지켜온 사람들의 영령을 기리는 곳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대영제국을 건설한 왕들의 무덤도 있고요, 처칠이나 아이작 뉴턴처럼 정치가나 과학자의 비석도 있어요. 재미난 건 시인의 코너지요. 에밀리 브론테, 오스카 와일드, 키플링, 찰스 디킨스 등 작가들의 기념비가 모여있는 공간도 있어요. 로렌스 올리비에 공의 비도 보이네요.
이야기꾼들이 여왕과 왕들 곁에 잠들어있다는 것, 이게 바로 대영제국이 이야기의 제국이라는 걸 실증하는 장면 아닐까요? 작가에 대한 영국사회의 오랜 존중이 있어요.
이혼한 싱글맘 조앤 롤링이 카페 구석에 앉아 해리 포터를 쓰게 된 원동력이 여기 있지 않을까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내 삶의 마지막 역전을 위해 노릴 수 있는 건 작가가 되는 일입니다. 왕으로 태어나지 못해도, 뛰어난 정치가나 학자가 아니라도, 작가가 될 수는 있으니까요. 누구나 글은 쓸 수 있으니까요.
작은 섬나라가 세계를 지배하는 대제국이 된 것이 이야기의 힘 덕분이듯이, 평범한 삶이 비범해지는 것도 이야기의 힘 덕분이에요.
오디오 가이드를 들으며, 사원 곳곳에 비석으로 새겨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비싼 돈을 낸 김에 영어로 들어요. 영어 청취 공부를 겸해서. 그런데, 듣다가 문득. '어라, 되게 낯익은 목소리인데?' 앗! 생각해보니, 이 목소리의 주인공은 제레미 아이언스?
직원에게 물어보니 맞군요. 영어 오디오 가이드의 나레이션은 제레미 아이언스가 했어요. 역시 이야기를 숭상하는 나라답게, 자국을 대표하는 배우에게 이 공간의 소개를 부탁했군요.
종교 사원인지라 내부 촬영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어요. 아쉬운 마음에 밖에서 사진을 찍습니다. 마침 제레미 아이언스가 나오는 연극을 웨스트엔드에서 올리고 있다는데, 가서 연극이나 봐야겠어요. 제레미 아이언스를 실제로 볼 수 있는 기회가 얼마나 되겠어요.
어려서 영어를 공부한 덕에 덕질도 국제적으로 할 수 있게 되었군요. 오늘도 20대의 김민식에게 감사하는 하루를 보냅니다. 매일 매일 부지런히 글을 올리는 50대의 김민식은, 70대의 김민식에게 은인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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