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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여행예찬/짠돌이 세계여행

괴로움이 즐거움이 되려면

by 김민식pd 2018. 1. 24.

매년 추석에 아버지를 모시고 여행을 갑니다. 


5년 전, 추석을 앞둔 어느날 아버지에게 여쭤봤어요. 

"아버지, 이번 추석에 어디로 가실래요. 영동에 있는 큰집? 아니면 속초에 있는 고모 산소? 아버지가 가자는 곳이면 어디든 모시고 갈게요."

"나는 괌이나 사이판에 가고 싶은데?"

"예?" 잠시 어안이 벙벙했어요.

"그럼 온 가족이 사이판 갈까요?"

"아니, 난 너랑 둘이서 여행가고 싶다."

음....... 

"그래요, 아버지. 이번 추석에는 둘이서 여행 가요."


그래서 패키지를 끊어서 5박6일 보라카이에 다녀왔어요. 중년과 노년의 두 남자가 젊은 커플들 가는 패키지에 끼어 여행을 갔어요. 눈치 없는 아버지께서 젊은 커플들에게 민폐를 많이 끼쳤지요. (신혼 부부가 아니야? ^^) 다음부터는 커플들 폐끼치지 말고 자유여행을 가야겠구나 싶었어요.


다음 해 봄에 또 여쭸봤어요. 

"올해 추석에는 어디 가실래요? 미리 표를 끊어놓으려고요."

"나는 죽기 전에 뉴욕에서 한번 살아보는 게 소원이다."
"예?" 잠시 놀랐으나, 그것도 좋은 생각이네요. 저도 뉴욕을 좋아하거든요. (원님 덕에 나팔 불겠네! ^^)

에어비앤비로 현지인 가정 숙소를 예약하고 3주간 뉴욕 여행을 다녀왔어요.


재작년에도 여쭤봤지요. 어디 가고 싶으시냐고. 

"나이가 70 넘으니까 이제 비행기 오래 타는 것도 힘들더라. 올해는 가까운데로 가자."

그래서 가까운 오키나와로 갔어요. 비행기 2시간이면 가는 곳. 2주간 잘 놀다 왔지요.


작년 봄에도 여쭤봤어요. 이번엔 어디를 가시고 싶냐고. 

"그래도 괌이나 사이판도 꼭 한번 가보고 싶은데."

그래서 작년에는 사이판 여행을 예약했습니다. 


지난 봄, 주조정실에서 MD근무를 하며 스트레스가 컸어요. 힘들 때마다 부킹닷컴에 들어가 사이판 숙소를 검색하고 일정을 짰어요.


'마나가하 섬은 2일차에 갈까, 3일차에 갈까?' 

'동굴 스노클링도 빠질 수는 없겠지?' 

'숙소는 역시 가라판 지역이 좋겠지?'


회사에서 일이 힘들 때 트립어드바이저의 여행지 추천 리스트를 보고, 에어비앤비 리뷰를 읽었어요. 블로그의 추천 일정을 읽고, 사진을 검색하다보면, 이곳의 힘든 현실을 사라지고, 저곳의 낙원이 눈 앞에 펼쳐져요. 

 

지난 몇 년, 추석마다 여행을 다닐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드라마 연출이라는 현업에서 배제된 덕분이지요. 프로그램 연출할 땐, 명절에 아버지를 찾아뵙기도 힘들었어요. 예능국에서는 명절마다 특집 프로에 차출되고, 드라마는 명절이라고 쉬는 법이 없어요. 당일 오전 반나절만 쉽니다. 차례 지내라고. 결국 방송사 PD에게 가장 바쁜 계절이 설이나 추석이에요. 그런데 유배지로 발령나니까, 추석에 쉬어도 프로그램에 전혀 지장이 없고, 장기 휴가를 간다고 눈치 보일 일이 없어요. 


돈과 시간은 서로 낯을 가리는 사이인가봐요. 절대 손잡고 함께 오지 않아요. 돈이 많으면, 시간이 없고, 시간이 여유로울 땐 돈이 없지요. 일도 마찬가지예요. 일을 많을 때는 힘들어서 고민이고, 일이 없으면 불안해서 고민이지요. 일할 때는 '아, 좀 쉬고 싶다.' 이렇게 한탄하고, 쉴 때는 '아, 빨리 일해야하는데...' 하고 불안해하지요. 그래서 불안을 없애는 방법은, 그 순간 현재에 집중하는 겁니다. 일할 때는 일 생각만 하고, 놀 때는 놀 궁리만 하는 거죠. 


경상도에서 평생 교사로 일한 아버지는 보수적인데다 권위적입니다. 아내는 독립적이고 진취적이에요. 조선시대 시아버지와 현대의 일하는 며느리, 둘이 잘 안 맞는데, 그러다보니 가운데서 저만 죽어나요. 아버지 성격이 유난해서 아내가 많이 힘들어했어요. 그래서 명절마다 제가 혼자 아버지를 모시고 여행을 다닙니다. 저는 아버지와 여행을 가고, 아내는 아이들이랑 친정에 가서 쉬다 오는 것, 이게 명절을 평화롭게 보내는 나름의 해법입니다.


매년 추석마다, 아버지를 모시고 둘이서 여행을 다니는 저를 보고, '와 효자다!'하시는 분도 있는데요. 괴로움이 커서 그래요. 회사에서도, 집에서도. 회사에서는 일을 시키지 않고, 집에서는 고부 갈등이 심하니까, 이런 해법을 찾아낸 겁니다. 즉, 저는 괴로움이 닥치면 그 괴로움을 어떻게 즐거움으로 바꿀까 고민하는데요. 그럴 때마다 여행만한 게 없더라고요.


지난 추석에는 아버지를 모시고 둘이서 사이판 여행을 갔습니다. 80을 바라보는 노인과, 50을 목전에 둔 아들이 떠난 사이판 여행기, 내일부터 연재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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