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판 여행 1일차


(지난 추석에 다녀온 여행기입니다.)


2018/01/24 - [짠돌이 여행예찬/짠돌이 세계여행] - 괴로움이 즐거움이 되려면



사이판 항공권을 검색할 때, 너무 저가항공권에 집착해서 그런지 주로 밤에 출발하고 새벽에 도착하더군요. 혼자 여행 할 때, 새벽 4시에 공항 도착하면 입국장 벤치에 앉아서 책을 읽으며 동이 트길 기다리는데요. 연로하신 아버지를 모시고, 공항에서 버티긴 힘들 것 같아 쉴 수 있는 라운지를 찾아봤어요.


우리나라로 치면 찜질방 같은 거죠. 숙소는 아니지만 24시간 운영하기에 체크인시간까지 쉴 수 있는 곳.  검색을 통해 마리아나 라운지에 예약했어요. 공항까지 픽업 차량이 오고, 나중에 숙소까지 데려다주더라고요. 

 


 

찜질방 수면실 같은 곳인데, 쇼파에 길게 누워서 눈을 좀 붙입니다. 새벽 4시에도 공항 픽업과 체크인이 가능한 고급 호텔을 예약하면 될 일인데, 웬지 새벽 4시에 체크인하면서 1박 요금 내는 건 너무 아까워서... 짠돌이 기질은 어쩔 수가 없어요. 


밤 비행기 타고 오느라 고단하셨는지 아버지는 쇼파에 모로 누워 바로 코를 골며 주무시네요. 올해 일흔일곱이신 아버지와 몇년 째 여행을 다니는데요. 다행히 크게 까다롭지는 않으세요.  어디서든 잘 주무시고 무엇이든 잘 드시거든요.


 

아침 해가 뜨자, 라운지 셔틀을 타고 숙소로 갑니다. 짐을 맡기고 사이판의 중심가인 가라판으로 가요. 쇠락한 모습의 중심가가 좀 쓸쓸해 보이네요. 



사이판은 태평양 전쟁의 격전지였던 곳이라 Memorial Park라고 전쟁기념관이 있어요. 사이판 전투의 기록 영상과 전시물을 볼 수 있는 곳입니다. 


마리아나 제도를 둘러싸고 일본군과 미군이 치열하게 싸운 이유가 있어요. 일본 본토를 공습하기 위한 활주로가 필요했던 겁니다. 일본이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해 전함을 침몰시킨 것도 같은 이유지요. 일본은 바다로 둘러쌓인 섬나라라 육지로부터 침공이 어렵습니다. 그러니 해전이나 공중전의 기세 제압이 필요한 거죠. 마찬가지로 미국으로서는 일본 본토 진군을 위해서는 중간 병참기지인 괌이나 사이판의 점령이 필요하고요. 2차 대전이 끝나고 이들 두 섬이 아직도 미국령으로 남아있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미국의 태평양 전진 기지.



사이판 시내를 걸어다니다보니, 9월인데도 푹푹 찝니다. 덥고 습한데 어디 쉴 곳이 없어요. 이럴 땐, 여기서 전쟁 기록 영상물을 보며 시원하게 쉬었다 갑니다.시원하고, 어둡고, 낮잠 한 숨 자고 가기 딱이네요. 심지어 '무료 입장' '무료 관람' ^^


2차대전 기록 영상을 보니, 전쟁 막바지에 사이판 점령 일본군들이 자살절벽(사이판의 유명한 관광 명소입니다. 일명 '만세 절벽')에 몰려가 몸을 던지는 장면이 나오는데, 충격적이에요. 영화 덩케르크를 보면서 '전투에서는 졌다고 포기하면 안되는구나. 어떻게든 살아남아 설욕전에 전력을 보태야지.'했거든요. 그런데 일본군은 다 절벽에서 몸을 던져요. 왜 그랬을까요?


3일 후 찾아간 만세 절벽에서 나름의 답을 찾았습니다. 그건 4일차 여행기에서 다시 말씀드릴게요. 



전쟁기념공원에서 5분 정도 걸으면 마이크로 비치가 나옵니다. 사이판의 대표 해변인데, 이름 그대로 좀 작아요. 저같은 저가 여행자에게는 그림의 떡입니다. 해변에서 편하게 쉴 곳이 없어요. 비치 파라솔과 선베드가 몇 개 있는데, 다 고급 호텔 리조트 숙박객 전용이거든요. 동남아 해변에서 찾아볼 수 있는 배낭족들이 즐겨찾는 저렴한 해변 카페 같은 곳이 하나도 없어요. 마이크로 비치 해변은 고급 리조트에 포획되어 있습니다.

 

아, 결국 여기도 미국이구나... 


미국을 여행할 때 느낀 점이에요. 돈으로 구역을 나누는 것. 


미국에서는 좋은 경치를 보려면 돈을 내야합니다. 뉴욕 근처의 스태튼 아일랜드에 놀러갔을 때, 풍광이 좋은 곳은 다 사유지였어요. 풍광이 멋진 해변을 찾아가니 접근금지라고 살벌한 마크가 있어요. 미국에서는 사유지에 함부로 들어갔다가 무단 침입으로 총을 맞을 수도 있다는 걸 아니까 겁이 덜컥 나지요. 


미국에서는 돈으로 인종을 격리합니다. '흑인 출입 금지'라고 하면 차별 금지법에 걸리니까 아예 비싼 요금을 매겨요. 가난한 흑인이나 히스패닉은 들어올 엄두도 못 내게. 


그런데 사이판에서도 그런 모습이 보이네요. 풍광은 동남아인데, 문화는 미국식, 흠... 아쉽네요...   



(그림의 떡... ㅠㅠ)


돈을 내지 않고는 볼만한 곳이 없어 결국 아버지를 모시고 숙소로 향합니다. 밤새 비행기를 타고 왔으니 첫날부터 무리하면 안 됩니다. 첫날에 의욕만 가지고 덤볐다가 남은 기간 지치면 안 되거든요. 


아버지는 연세가 연세인지라 청력이 떨어졌는데, 보청기 끼는 걸 그렇게 싫어해요. 이번 여행에도 보청기를 아예 안 가져 오셨네요. 문제는 그러다보니, 제가 불효막심한 아들이 된다는 거죠. 


공항이나 여행지에서 아버지를 부를 때마다 소리를 질러야해요. 아니면 못 들으시니까. 저는 짐을 가지고 입국 수속 줄에 서 있어요. 아버지는 무조건 벤치에 앉아 기다립니다. 우리 차례가 되어도 안 오시면 줄을 이탈할 수는 없어 멀리서 부릅니다. 못 들어요. 보청기가 없으니. 결국 소리를 지릅니다. "아버지! 이쪽으로 오시라니까요!" 공항에서 늙은 아버지 구박하는 못된 아들이 접니다. ㅠㅠ


늙어서 저도 장성한 딸들이랑 여행을 다니고 싶은데요. 그때를 위해 블로그에 이 이야기를 꼭 남겨두려고 해요. 나이 들면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귀담아 듣지 않아요. 평생을 살면서 굳어진 자신의 믿음대로 그냥 삽니다. 식당에서 팁을 두고 나오면, '돈을 왜 그렇게 낭비하냐'고 뭐라 그래요. '여기 문화니까 존중해야 한다'고 설명을 드리는데, 항상 고개를 저으며 듣지를 않고 팁을 집어들고 나오십니다. 결국 아버지를 모시고 제가 다니는 곳은 맥도날드나 즉석 요리점이에요. 팁을 내지 않아도 민망하지 않을 곳...

  

'난 늙으면 저러지 말아야지.  말도 귀담아 들어야지.'

'보청기는 꼭 챙기고 다녀야지. 나는 불편해도 딸들 편하게 해줘야지.'

 

그러니까, 이 글은 20년 후의 저에게 보내는 편지에요. 


사이판 여행기 2일차, 다음 시간에 이어갈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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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민식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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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8.01.25 06: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2. 따뜻한오후 2018.01.25 06: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피디님~^^6시...아직 글을 쓰고계시겠지 했는데
    벌써 글이 올라와 있네요~
    재미있게 잘 봤습니다~
    다음 여행기도 기대할게요~
    그저께 피디님 새 책 사서 지금 읽는 중인데
    저는 참 좋네요^^
    문득 언젠가는 피디님 만나서 책에 싸인도
    받아야지 하는 생각이 듭니다ㅎㅎ
    여기 양산이라 쉽지 않겠지만...
    좋은하루 보내세요~

    • 김민식pd 2018.01.25 07:1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언젠가 만날 날이 있을 거예요. 퇴직하면 전국을 다니며 도서관 강연하는게 꿈이거든요. 양산도 기억해둘게요, 독자가 있다는 사실을~

  3. 아리아리짱 2018.01.25 06:3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김pd님 아리아리!
    식당에 남겨둔 팁을 살며시 챙겨나오시는 어른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ㅋㅋ
    맞아요! 장성한 아이들과 함께 하는 여행에서 어른되기의 숙제가 있더라구요.
    걔네들 의견을 따라야할 때가 대부분이 었어요.
    특히 자유 여행으로 가는 여행은 숙박, 교틍편을
    인터넷문화에 밝은 얘들이 해결하고, 실전영어도 얘들이 잘하니 약간 후방으로 밀려난 느낌!
    얘들이 어릴땐 모든 과정을 주도적으로 했는데 하는 약간의 아쉬움 비슷한 그런느낌 있더라구요.
    이러다가 더 귀기울이려고 보청기를 껴야하는 날들도 오겠죠.
    아버님이 보청기 끼지 않으시려하는 마음도 약간은 이해 될듯해요.
    풍광 좋은 곳의 사유지화로 돈으로 구역을 나누는 미국 문화가 충격과 함께 씁쓸합니다.
    인간의 인위적 문화가 아닌 자연물은 누구나 자유롭게 누릴 수 있으면 좋을텐데요!

  4. 골드스텝 2018.01.25 08: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매일매일 잘 읽고있습니다 ^^
    저도 자극 받아서 매일매일 블로그에 글쓰고 있어요!

  5. 햇살같은 하루 2018.01.25 09:2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글안에서의 피디님과 아버님의 이야기가 정말 일상과 가까워서 눈으로 보는 것 같아요.
    자신의 이야기를 뭉퉁그려 꾸미지않고 풀어가시는 피디님의 오픈 마인드에 늘 놀라는 1인입니다.
    오늘도 반갑고 재밌는 글, 고맙습니다.^^

  6. 국수 2018.01.25 09:4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김프로쇼 듣고 들어왔읍니다. 피디님 또래? 입니다. 또래 라는말 좋네요. 전 지난달 고딩 아들 둘과 2박 5일 싱가폴 여행갔다가 아들과 대판싸우고 왔는데 아직은 내가 팔팔하니 아들과 의견대립인데 좀더 나이들면 아들말에 고분고분한 양순한 양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피디님 글보고 문뜩 드네요. 매일 읽게될거같습니다.

  7. 테니스 2018.01.25 10: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 엄마 모시고 제주 갔다 어제밤 돌아왔어요. 눈발 날리는 날씨에 카멜리아힐 동백이 아름답더군요. 앞으로 얼마나 더 다닐까 싶어 몇 년 전부터 단둘이 일년에 두어번은 길을 나섭니다. 어릴 때 그녀가 나를 이끌었듯 지금은 제가 그녀를 돌보며 다닙니다. 팔십이 넘으셨으니 이 일도 더는 못할 날이 오겠지요. 나중에 회한으로 남지 않으려 뭐든 지금 끌리는 일에 마음을 쏟아붓습니다. 존경하는 pd님 처럼요.^^

    • 김민식pd 2018.01.26 07:3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웅, 좋네요, 좋아요. 맞아요. 저도 나중에 후회하지 않으려고 지금 모시고 다니고 있어요. 늘 곁에 계시는 건 아니니까요. 님의 멋진 여행기도 기대할게요!

  8. 노이빗 2018.01.25 10: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매일 써봤니를 읽고.... 요즘 가장 사랑하는 생활 아이템인 '수영까페' 에 3일 간격으로 두 가지 글을 정리해서 올려봤습니다. 그 글을 쓰면서 제 생각이 정리되고, 생각을 정리하는 내 모습에 자기 효능감도 좀 높아지고, 또 재미도 있더라고요. 그런데 거기 댓글이 30개나 달리고... 와..이런거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제, 정현의 경기를 보면서 저렇게 하기까지 저 동작을 몇 천만번 반복 했을까..싶은 생각에, '반복' 이라는 키워드와 '아마추어 수영' 의 욕심을 생각하면서 제 생각을 정리했더니..또 한 편의 글이 되더라구요. 회사에서 딱히 성과가 없어 스트레스에 절망적으로 빠져있다가 '글쓰는 행위' 로 조금씩 회복의 기미가 보입니다. 감사합니다. 덕분입니다.

    저는 엄마 모시고 유럽여행 다녀왔다가 '부모님 여행은 보내드리는 것이지, '모시고 가는 것이 아니다' 라는 지론을 얻게 되었는데, 대단하십니다. 피디님.. ^^ 여행기 계속 기대합니다.

    • 김민식pd 2018.01.26 07:3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웅, 좋네요. 제 책을 읽고 조금씩 일상이 바뀌는 경험을 하신다니, 글을 쓴 보람이 팍팍! 네, 부모님과의 여행이 힘든 건 사실이에요. ^^ 그래서 계속 해보려고요. 편해질 때까지... ^^

  9. 섭섭이짱 2018.01.25 11:5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세요.
    새벽 도착 비행기 타봤지만, 많이 힘들던데 아버님이 대단하십니다. ^^ 예전에 갔을땐 해변 아무곳이나 들어간던거 같은데 많이 변했네요. ^^;; 옛날일이니 여기도 예전보다 상업화가 많이 되었겠네요.
    저희 아버지도 고집이 엄청나신데, 그러다보니 얘기하기가 어렵더라고요. 여행은 커녕 어디 같이 가는데 어려워요. 아버지 모시고, 여행가는 PD님이 대단하신거 같아요. 다음 여행기는 어떤 얘기일지 기대됩니다.

    p.s) 역시 여행은 다들 좋아하시는 주제여서 그런지 PD님 여행기마다 댓글이 폭발적이네요. ^^ 역시 PD님과 여행은 찰떡궁합입니다.

  10. 옥이님 2018.01.25 15:3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피디님 글을 읽다보면 공감도 되어지고 위로도 되고 그러네요^^
    저는 딸이라 엄마랑 함께할일이 많아서 그런지 엄마한테 짜증을 많이 부리는 편이예요ㅠㅠ
    (참고로 팔십이세요)
    엄마한테 짜증부리고 돌아서면 후회하면서...
    나의 나이듬에 부끄럽지는 안게 살아야겠지요^*
    날씨가 많이 춥네요
    건강에 유의하세요^^

  11. 제주한란 2018.01.26 00:2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평범한 상황들도 참 재미있는 얘기를 전해주듯 글을 쓰시는 김피디님, 공짜로 즐기는 피디님의 글들 재밌게 읽고있어요 고맙습니다~^^
    여행사진들이 다 멋져요 좋은 카메라를 쓰시나요? 사진을 따로 배우셨어요?

    • 김민식pd 2018.01.26 07:2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이구, 부끄럽습니다. 다 아이폰으로 찍은 사진들입니다. 찍기를 많이 찍고요. 그중에서 애써 고른 사진입니다. 무엇이든 자주 많이 하고 그중 좋은 것을 남기는 게 비결이지요. ^^ 부족한 사진, 잘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12. NELLYCW 2018.01.26 03:1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분위기 좋네요.

  13. 리디 2018.01.26 11: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른사람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고 자기의 믿음대로 사시고 보청기를 껴야 되는데 잘 안끼는 피디님 아버지 모습이 너무나 저희 아버지와 겹치네요. 늘 우리 아버지는 왜 이렇게 완고하고 자기 중심적일까... 생각했는데, 아버지랑 잘 지내시는 모습에서 여러가지를 느끼고 갑니다. 글이 참 쉽게 재밌게 읽히면서도 느끼는 바가 많은 것 같아요. 추운 날이지만, 오늘도 화이팅하세요!

  14. 정지영 2018.01.28 09:2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글을 읽으면서 지금은 팁문화를 이해하지 못한 부모님의 모습이 우리를 곤란하게 하는데, 저의 딸이 어른이 되어 함께하는 여행에서는 전 어떤걸로 아이를 곤란하게 할까? 생각해보게 됩니다. 피디님의 글이 과거를 돌아보게도 하고 미래를 내다보게도 하는 힘이 있는 것 같아요. 여행기 안에 많은 생각거리가 들어있어 저도 여행자극 받고 갑니다~^^
    내년1월엔 여행책 나오는 건가요~~~?

  15. 2018.07.09 00: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