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추석에 아버지를 모시고 여행을 갑니다. 


5년 전, 추석을 앞둔 어느날 아버지에게 여쭤봤어요. 

"아버지, 이번 추석에 어디로 가실래요. 영동에 있는 큰집? 아니면 속초에 있는 고모 산소? 아버지가 가자는 곳이면 어디든 모시고 갈게요."

"나는 괌이나 사이판에 가고 싶은데?"

"예?" 잠시 어안이 벙벙했어요.

"그럼 온 가족이 사이판 갈까요?"

"아니, 난 너랑 둘이서 여행가고 싶다."

음....... 

"그래요, 아버지. 이번 추석에는 둘이서 여행 가요."


그래서 패키지를 끊어서 5박6일 보라카이에 다녀왔어요. 중년과 노년의 두 남자가 젊은 커플들 가는 패키지에 끼어 여행을 갔어요. 눈치 없는 아버지께서 젊은 커플들에게 민폐를 많이 끼쳤지요. (신혼 부부가 아니야? ^^) 다음부터는 커플들 폐끼치지 말고 자유여행을 가야겠구나 싶었어요.


다음 해 봄에 또 여쭸봤어요. 

"올해 추석에는 어디 가실래요? 미리 표를 끊어놓으려고요."

"나는 죽기 전에 뉴욕에서 한번 살아보는 게 소원이다."
"예?" 잠시 놀랐으나, 그것도 좋은 생각이네요. 저도 뉴욕을 좋아하거든요. (원님 덕에 나팔 불겠네! ^^)

에어비앤비로 현지인 가정 숙소를 예약하고 3주간 뉴욕 여행을 다녀왔어요.


재작년에도 여쭤봤지요. 어디 가고 싶으시냐고. 

"나이가 70 넘으니까 이제 비행기 오래 타는 것도 힘들더라. 올해는 가까운데로 가자."

그래서 가까운 오키나와로 갔어요. 비행기 2시간이면 가는 곳. 2주간 잘 놀다 왔지요.


작년 봄에도 여쭤봤어요. 이번엔 어디를 가시고 싶냐고. 

"그래도 괌이나 사이판도 꼭 한번 가보고 싶은데."

그래서 작년에는 사이판 여행을 예약했습니다. 


지난 봄, 주조정실에서 MD근무를 하며 스트레스가 컸어요. 힘들 때마다 부킹닷컴에 들어가 사이판 숙소를 검색하고 일정을 짰어요.


'마나가하 섬은 2일차에 갈까, 3일차에 갈까?' 

'동굴 스노클링도 빠질 수는 없겠지?' 

'숙소는 역시 가라판 지역이 좋겠지?'


회사에서 일이 힘들 때 트립어드바이저의 여행지 추천 리스트를 보고, 에어비앤비 리뷰를 읽었어요. 블로그의 추천 일정을 읽고, 사진을 검색하다보면, 이곳의 힘든 현실을 사라지고, 저곳의 낙원이 눈 앞에 펼쳐져요. 

 

지난 몇 년, 추석마다 여행을 다닐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드라마 연출이라는 현업에서 배제된 덕분이지요. 프로그램 연출할 땐, 명절에 아버지를 찾아뵙기도 힘들었어요. 예능국에서는 명절마다 특집 프로에 차출되고, 드라마는 명절이라고 쉬는 법이 없어요. 당일 오전 반나절만 쉽니다. 차례 지내라고. 결국 방송사 PD에게 가장 바쁜 계절이 설이나 추석이에요. 그런데 유배지로 발령나니까, 추석에 쉬어도 프로그램에 전혀 지장이 없고, 장기 휴가를 간다고 눈치 보일 일이 없어요. 


돈과 시간은 서로 낯을 가리는 사이인가봐요. 절대 손잡고 함께 오지 않아요. 돈이 많으면, 시간이 없고, 시간이 여유로울 땐 돈이 없지요. 일도 마찬가지예요. 일을 많을 때는 힘들어서 고민이고, 일이 없으면 불안해서 고민이지요. 일할 때는 '아, 좀 쉬고 싶다.' 이렇게 한탄하고, 쉴 때는 '아, 빨리 일해야하는데...' 하고 불안해하지요. 그래서 불안을 없애는 방법은, 그 순간 현재에 집중하는 겁니다. 일할 때는 일 생각만 하고, 놀 때는 놀 궁리만 하는 거죠. 


경상도에서 평생 교사로 일한 아버지는 보수적인데다 권위적입니다. 아내는 독립적이고 진취적이에요. 조선시대 시아버지와 현대의 일하는 며느리, 둘이 잘 안 맞는데, 그러다보니 가운데서 저만 죽어나요. 아버지 성격이 유난해서 아내가 많이 힘들어했어요. 그래서 명절마다 제가 혼자 아버지를 모시고 여행을 다닙니다. 저는 아버지와 여행을 가고, 아내는 아이들이랑 친정에 가서 쉬다 오는 것, 이게 명절을 평화롭게 보내는 나름의 해법입니다.


매년 추석마다, 아버지를 모시고 둘이서 여행을 다니는 저를 보고, '와 효자다!'하시는 분도 있는데요. 괴로움이 커서 그래요. 회사에서도, 집에서도. 회사에서는 일을 시키지 않고, 집에서는 고부 갈등이 심하니까, 이런 해법을 찾아낸 겁니다. 즉, 저는 괴로움이 닥치면 그 괴로움을 어떻게 즐거움으로 바꿀까 고민하는데요. 그럴 때마다 여행만한 게 없더라고요.


지난 추석에는 아버지를 모시고 둘이서 사이판 여행을 갔습니다. 80을 바라보는 노인과, 50을 목전에 둔 아들이 떠난 사이판 여행기, 내일부터 연재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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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민식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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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미노 2018.01.24 16: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니 이리 현명한 해결책을~~찾으시다니요~
    효도는 셀프라는 말이 실감이 납니다

  3. 무지개 2018.01.24 17:3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맞아요~~ 시간과 돈은 낯을 가리네요 ㅎㅎ
    일은 쉬고 있지만 돈 아까워 여행 못 가는 접니다 ㅜㅠ

  4. Gratia 2018.01.24 17:4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매일 쓰는 건 어려운데 읽는 건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들렀습니다. 꾸준히 해낼 수 있는 힘을 피디님 글에서 배워갑니다. 해결 방법이 현실성있어 지려면 돈과 시간을 잘 배분할 수 있어야 하는데...생각보다 어렵네요. 저는 현재 노는 것에 집중하겠습니다.

  5. Jane 2018.01.24 19: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지혜로우십니다!
    무료한 일상에 아침마다 김민석 PD님 블로그 찾아와 글 읽는 기쁨이 생겼어요!
    덕분에 저도 힘을 얻고 속으로 파이팅 함 외치고 갑니다 :D
    고맙습니다!!

  6. 2018.01.24 20: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7. 2018.01.24 20:4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8. Livefree 2018.01.24 23:2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피디님은 고민이 없는분 같앗는데 이렇게 아이디어로 해결을 하시거군요. 매번 피디님 글읽고 힘을 냅니다. 정말 감사드려요. 제 삶에 도움을 주셔서요^^

  9. 즐거운 인생 2018.01.25 00: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들 살아가는 모습이 비슷하네요ㅎㅎ
    티비속 사람들의 삶은 우리와 다르다고 생각하며 살았는데...피디님 글에서 힘듦이 녹아나네요.
    고부갈등...참 극복하기 어려운 관계죠ㅠㅠ

    요즘 파업을 안하시니깐 얼굴을 통 못 뵈니 그건 좀 아쉽네요. 이젠 연출만 하실건가요?가끔 티비에도 얼굴보여주세요^^
    멋진~~피디님!팬입니다. ~~부산에서

    • 김민식pd 2018.01.25 07: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웅, 드라마 피디로 복귀했으니, 저보다 더 멋진 배우님들 화면에 담아야지요. 블로그로 가끔 사진 올릴게요, 우린 블로그에서 만나요~^^

  10. 김지원 2018.01.25 03: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글이 술술 읽히네요 오늘 처음 들어왔는데 재밌는 이야기보따리를 발견한 기분이네요,,☺
    아 전 그저께 김민식pd님께서 쓰신 책 매일아침 써 봤니?를 다 읽었는데요 예스24에서 우연히 이 책 e북 쿠폰이 날아와 관심있던 글쓰기기도하여 샀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정말 운이 좋았네요ㅎㅎ 일이 아니라 놀아야 한다는 말이 아직도 강하게 다가옵니다 뭔가 설레기도 하고요^^ 또 비공개로만 해놓으면 글이 늘지 않는다는 부분에서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었어요 읽고 생각해보니 아 그렇겠네 하고 깨닫고.... 사피엔스 책도 장바구니에 넣고....하핫 저도 글쓰면서 조금씩 성장해가고 싶단 생각이 들어 블로그도 차차 해보려고요. 열정 불러일으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11. 조영빈 2018.01.25 15:4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윗글 지원씨랑 같은 이유로 찾아왔습니다. ㅎㅎ
    블로그 한번 해야지 하다 두어달 지나고 우연히 찾은 책.
    우선 시작하시라는 말에
    티스토리로 시작해보려 했더니 초대로 가능하다니... ㅠㅠ
    곧 계정 만들어서 저도 좋은 글로 인사하겠습니다.

  12. 2018.01.25 20: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13. 제주한란 2018.01.26 00: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떻게 그런 좋은 방법을 생각해내셨어요?
    요즘 보기드문 효자시네요
    제 아들도 나중에 엄마랑 여행다녀주면 얼마나 행복할까요? 며칠은 같이 가줄수있겠지만 3주간의 뉴욕여행은 효자가 아니라면 불가능할듯해요^^

    • 김민식pd 2018.01.26 07:2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니면 저처럼 회사에서 귀양살이를 하거나요... ^^ 일단 짧은 여행부터 같이 다니고, 그 여행이 즐겁다는 걸 아이에게 일러줘야해요. 아버지를
      모시고 가는 여행, 처음엔 저도 간단한 2박3일 울릉도 여행부터 시작했거든요.

  14. 노란잠수함 2018.01.26 09:1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쩌다 보니 김PD 님의 책두권을 연이어 구입했습니다.
    영어는 영원한 숙제고, 글쓰기는 재미붙여 하는것중 하나인데..
    서점에 갔다고 우연히 책을 보고 '이거다' 싶어 집어왔는데
    같은 저자 인줄 집에 와서 알았습니다 ^^

    자주들러 보고 느끼고 삶의 지혜와 위트를 배우고 가겠습니다.

  15. littletree 2018.01.26 11:1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피디님 글로 힐링하며 시작하는 이 아침을 즐기고 있습니다. 피디님을 책과 블로그를 통해 만날 수 있어 참 감사합니다. 친구들 독서모임 책으로 피디님 책 소개할거에요^^* 사이판 여행기도 재미있게 읽겠습니다~

  16. 리디 2018.01.26 11:2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돈과 시간은 서로 낯을 가리는 사이.... 정말 공감되는 말이네요. 부모님이랑 여행 한 번 가고 싶어도 어색할까봐 좀처럼 실천을 못하고 있는데, 여행기도 기대가 됩니다

  17. 쟌모로 2018.01.29 18: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우와 정말 현명하세요! 피디님은 저의 이상형~ :)

  18. 날개 2018.02.07 19:1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ㅋ ㅋ 너무 재미있습니다 ^^

    괴로움이 닥치면
    그 괴로움을 어떻게 즐거움으로 바꿀까 고민 ... 여행으로 !

    멋지세요 !!!

  19. 김은미 2018.02.12 23: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현명하신 것 같아요. 부모님 살아 계실때 함께 한 추억이 있다는 것이 정말 좋은 것 같아요 ^^*

  20. 김정원 2018.03.12 05: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언젠간 나도 블로그 만들어야지하고 막연하게 생각만하고 있었는데 "매일아침써봤니?"를 읽고 더이상 미루지않고 조금씩 조금씩 만들어가기로 결심했습니다.
    생각으로만 머물지않고 밖으로 끄집어내주신점에 감사드려요.
    PD님이 아버님이랑 단둘이 여행다니시는 모습을 보니 작년 겨울에 돌아가신 엄마 생각에 고개가 절로 떨구어지네요.
    제일 동감되는 부분이 부모님과 여행을 갈려면 아이들은 다음으로 기약해야한다는거예요. 전 끝내 엄마와 단둘이 여행 한번 못가고 후회뿐인데 행동으로 옮기시는 PD님이 부럽고 존경스럽니다.

    • 김민식pd 2018.03.12 06:4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부끄럽습니다. 저도 부모님에게는 부족한 점이 많은데요.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고, 후회는 남기지 않으려고 합니다. 고맙습니다!

  21. 린앤 2018.04.02 23: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매일 아침 써봤니? 를 읽고 있어요.나름 책을 좋아한다고 생각하는데 영 시간을 못내 책을 못읽는다는 변명으로 책읽기를 게을리하는 일인입니다. 회사의 독서 프로그램으로 신청한 책이 매일 아침~ 인데 책을 읽다 블로그에까지 오게 되었네요.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한 큰아이와 5살 둘째를 아침 7:30분에 어린이집에 맡기고 출근하는 바쁜 엄마인데 당장 글쓰기를 실천할 자신이 생기지는 않지만 뭔가 하고 싶다는 꿈틀대는 이 느낌을 이렇게라도 써놔야겠다는 생각에 몇자 적어봅니다. 글을 써보고싶다는 생각을 들게만들어줘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