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S <지식채널 e>의 오랜 팬입니다. 김진혁 피디가 에필로그를 쓴 2007년도 책 <지식 e> 1권도 소장하고 있어요. 틈만 나면 찾아보는 시리즈인데, 그 책이 벌써 10권째 나오게 되었습니다. 출판사에서 그 열번째 책의 추천사를 써달라고 요청하셨을 때, 깜짝 놀랐어요. '이렇게 영광스러운 기회가!' 동료 피디들이 만드는 프로그램의 책에 감히 서문을 써봤습니다.
크로노스와 카이로스, 보는 것과 읽는 것, 앎과 삶.
방송사 PD로 일하지만 저는 TV를 거의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책을 즐겨 읽습니다. PD는 시청자 대신 글을 읽는 사람입니다. 수많은 대본을 읽고 그 중 가장 재미난 이야기를 골라, 글을 읽고 떠오른 이미지를 TV 화면으로 옮기는 것이 드라마 PD가 하는 일입니다.
조선 시대 문필가가 한시를 지었을 때 동시대 사람들 중 몇 명이나 그것을 읽었을까요? 오늘날 <지식채널 e>의 피디가 화면에 글을 쓰면 수백만 명이 읽습니다. 어떤 시인과 작가의 작품도 같은 시간에 이렇게 많이 읽힌 적은 없을 것입니다. <지식채널 e>의 제작진은 우리 시대의 음유시인입니다. <지식 채널 e>의 화면 속 자막을 읽을 때마다 피디와 작가들의 활자에 대한 열정이 느껴집니다. 저렇게 쉽고 명료하게 쓰기 위해 저들은 얼마나 많은 책을 읽었을까?
오늘날 우리 시대는 알아야할 것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정작 알아야 할 것을 모르고 살아갑니다. 알 것이 너무 많아 알고 싶은 욕망이 사라지고 집중할 수 있는 힘을 잃어버렸습니다. 책을 읽을 짬이 없는 현대인들에게, <지식채널 e>의 제작진은 우리 대신 수많은 책을 읽고 그 속에서 우리가 알면 더 좋을 귀한 이야기들을 찾아냅니다.
‘십오엔 오십전’이라는 생소한 단어가 화면을 통해 물음표를 던집니다. 그 물음은 책을 통해 느낌표로 바뀝니다. 이제 열권에 접어드는 <지식 e> 시리즈는 활자와 영상의 상호보완적 협력관계를 가장 아름답게 구현합니다.
1부 ‘크로노스Chronos’에서는 우리가 몰랐던, 그러나 알면 더 좋을 것들을 이야기합니다. 2부 ‘카이로스Kairos’에서는 우리가 몰랐던, 알면 더 좋을 사람들을 말합니다. 앎과 삶, 둘은 어떻게 연결될까요? 시간을 통해 연결됩니다. 앎을 삶으로 체화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니까요.
크로노스도 카이로스도 그리스어로 다 시간을 뜻합니다. 다만 그 의미는 대조적이지요. 크로노스는 일상적으로 흘러가는 시간, 카이로스는 자신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시간입니다. 다시 말해 크로노스의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흐르는 객관적인 시간이고, 카이로스의 시간은 나에게만 허락된 기회를 뜻합니다.
TV를 보는 시청자들의 시간은 공평하게 흐릅니다. TV를 보는 것은 PD가 정한 시간의 흐름 속에 나의 의식을 맡기는 일입니다. 궁금해도 다음 자막이 뜰 때까지 기다려야하고, 뭔가 떠오르는 의문이 있어도 눈은 다음 화면을 쫓습니다. 책을 읽는 것은 그 시간의 흐름을 내 것으로 만드는 일입니다. 궁금할 땐 책장을 뒤로 휙휙 넘기고, 이상할 땐 다시 앞으로 돌아가고, 그러다 뭔가 떠오른 순간 읽기를 잠시 멈추고 의미를 곰곰이 씹어 그 깨달음을 내 것으로 만듭니다. 제가 TV 시청보다 독서를 더 좋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책읽기를 통해 저는 시간을 더 능동적으로 통제합니다. 시간은 삶의 재료이므로 결국 그 과정을 통해 저는 제 인생의 온전한 주인이 됩니다.
<지식 채널 e> 프로그램을 통해, 우리에게 왔던 앎을, <지식 e>를 통해 되새기고, 앎이 나의 삶이 되길 희망합니다. 독서를 통해 기회를 부여잡는 카이로스의 주인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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