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공짜로 세상을 즐기는 짠돌이’가 된 이유는 어린 시절 아버지의 영향이 큰 것 같습니다. 작가가 되고 싶었던 저를, 끝끝내 이과로 돌려세우며 아버지가 하셨던 말씀이 있어요. “니가 내가 벌어주는 돈 받고 살려면 내가 하는 말을 들어야지.” 대학에 들어가자 입주 과외부터 시작해서 열심히 돈을 모았습니다. 정신적 독립을 위해서는 경제적 자립이 우선이니까요. 돈 아끼느라 헤지고 구멍 난 짝퉁 나이키를 신고 다녔는데요, 대학 3학년 때 쓴 ‘민시기의 글밭’에 그 이야기가 나오네요.
7월 12일
- 비 억수로 오다
투두두다다다
공습 경보 없이
총탄치는 빗발
꼼짝없이 당하다.
집중 사격의 화선을 벗어나지 못하고
동심원의 격렬한 파문 속에
서서히 침수되어 가는
265문 급 잠수함
‘가리지날 나이키’ 호
내 만 원 짜리 운동화
갑판 좌우현 각 다섯의 수병
내 예쁜 열발가락
속절없이 잠겨간다.
승리의 여신(Nike ; 니케)은
허명을 돌보지 않는다, 제군들
또 빗발에 굴절되는
잠망경 밖 저 세상에
무슨 희망이 있으랴.
수면까지 부상해 본들
보도블록에 상륙해 본들
꼬르르 쿨쿨쿨
외부 수압과
세월의 침식을 이기지 못하고
난파해가는 51kg급 항공 모함 ‘민시기’
강우량 150mm의 도심 속으로
침몰해 간다.
구조 요청, 택도 없다.
결핍은 글감이 됩니다. 낡고 헤진 운동화가 글의 소재가 되듯, 결핍과 핍박은 글의 좋은 재료가 됩니다. 아무것도 없다면, 청빈낙도의 삶을 즐기는 선비처럼 살아도 좋겠다... 그런 생각을 했나 봐요. 나이가 들수록 욕심이 늘어나는데요, 스무 살에 쓴 글을 보며, 다시 욕심을 줄여봅니다. 비가 새지 않는 운동화를 신고 다니는 것만 해도 큰 행복이네요. 그나저나 그 시절에는 몸무게가 51킬로였군요. 결혼하고 살면서 철은 안 들고, 몸만 불었네요. ^^
민시기의 글밭을 보면서 흐뭇하게 혼자 웃고 있어요. 언젠가는 70대의 내가, 오늘 나이 50에 쓴 블로그를 보며 또 싱긋이 웃게 될 날이 오겠지요? 그때는 아마 지금 이 순간이 무척 부러울 거예요. 그러니 오늘도 열심히, 즐겁게 살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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