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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독서 일기

치열한 '녹색 동물'의 삶

by 김민식pd 2017. 4. 13.
저는 자전거로 통근하는데요. 봄이 오면 자전거 출퇴근이 즐거워집니다. 한강변을 오가며 보는 이름 모를 잡목이 알고보니 다 꽃나무에요. 개나리에, 진달래, 꽃이 핀 강변길을 달립니다.

 

 

여의도를 빙 둘러 가득 핀 벚꽃은 매년 볼 때마다 감동이에요. 추운 겨우내 앙상한 가지였는데, 어느날 함박꽃을 피워냅니다. 벚나무는 꽃이 져야 새 잎이 돋습니다. 광합성을 하고 영양분을 보충하는 건 짝짓기보다 후순위입니다. 어찌 저들에게는 생존보다 번식이 먼저일까?

그 의문을 책 한 권으로 풀었어요.

녹색동물 (손승우 / 위즈덤하우스) 


'봄의 전령이라 불리는 꽃들은 하늘이 트여 있는 개활지가 아닌 숲 속에 자라고 있습니다. 이 꽃들 위에는 높이 10미터 이상의 나무들이 가득하지만 이른 봄엔 이 나무들은 새잎이 나지 않아 앙상한 상태죠. 봄의 전령 꽃들은 바로 이때 꽃을 피웁니다. 이때가 지나면 위쪽에 있는 나무들이 새잎을 내기 시작해 숲은 어두워집니다. 바닥에 있는 봄의 전령 꽃들은 빛을 받을 수 없게 되죠. 빛이 닿지 않아 어두워지면 이 꽃들을 수정해주는 곤충들이 활동하기 어렵고 꽃이 그들 눈에 잘 띄지도 않게 됩니다. 그래서 봄의 전령이라 불리는 꽃들은 이때 만발하는 것이죠. 꽃이 피는 때, 그것은 수분매개자에게 달려 있습니다.'

(위의 책 185쪽) 

잎보다 꽃이 먼저 나는 이유, 이제 알 것 같네요. 나무에게는 성욕이 식욕보다 우선인가봐요. 나무의 화려한 연애를 보면 '녹색동물'이라는 말이 와 닿습니다. 움직이지 않으니 마치 죽은 듯이 보이지만 나무는 나름 치열하게 살고 있어요. 

EBS 걸작 다큐 '녹색동물'을 책으로 엮었어요. 저는 PD가 쓰는 책을 많이 읽습니다. 영상과 활자 사이에서 스토리텔링을 고민하는 사람이니까요. PD는 대중을 향한 글쓰기에 익숙한 사람이라 글을 쉽게 씁니다. 어려운 글보다 쉬운 글이 쓰기가 더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이 책도 술술 잘 읽히네요.

 


인도 콜카타에는 축구장보다 더 큰 울창한 숲이 있는데요, 사실 알고보면 숲이 아니라 단 한그루의 나무랍니다. 2,600여 개의 기둥을 가진 그레이트 반얀트리. 축구장보다 1.5배 큰 면적을 자랑하는 나무 한 그루가 있답니다. 가지에서 뻗어나와 땅을 향해 내려가는 가지가 결국 땅속을 파고 들어 '버팀 뿌리'가 된답니다. 마치 걸어서 영역을 넓히는 것 같다고 별명이 걷는 나무래요. 책에 나온 사진을 보면서도 믿기지가 않네요.

다큐를 책으로 구성한 내용이라, 방송 캡쳐 화면이 빼곡한데요, 5대양 6대주 전 세계 로케의 화려한 방송 화면을 화보집처럼 만날 수 있어 좋네요. 새로운 지식이 주는 즐거움은 관점의 전환이지요.

'인간은 화산을 재앙이라고 여기지만 자연의 관점에서 보면 화산은 '순환'의 역할을 합니다. 화산은 표토층을 뒤집으며, 땅속 깊은 곳에 있는 무기물질을 땅 표면으로 퍼 올리는 역할도 합니다. 그래서 식물의 관점에선 화산이 오히려 '축복'일 수도 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맛 있는 커피의 생산지가 대부분 화산지대인 것은 우연이 아니죠.'

(108쪽)

탄자니아 킬리만자로 산자락에 있는 모시가 커피 명산지로 유명했던 데 이런 이유가 있군요. 킬리만자로도 화산이거든요. 저는 커피를 즐기지 않아 그냥 왔는데, 숙소에서 만난 네덜란드 노부부가 커피 사러 간다더군요. '아니 왜 유럽사람들이 굳이 아프리카까지 와서 커피를 사지?' 역시 아는 만큼 보인다고... ^^

나무에게 가장 치명적인 위협은 산불입니다. 그런데 세상에, 산불을 기다리는 나무도 있네요. 쉬오크나 뱅크스 소나무의 솔방울은 200도 이상의 고온에서만 열립니다. 울창한 숲 속에서는 씨앗을 떨구고 싹을 피워봤자 큰 나무의 그늘에서 제대로 자랄 수 없기 때문이죠. 불이 나면 경쟁자들이 타 죽고 그 재는 훌륭한 거름이 됩니다. 비록 어미는 죽어도 그 자손들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환경이 없는 겁니다. 나무는 타도 씨앗이 담긴 솔방울은 살아 남는 것... 아, 소나무의 모정도 정말 대단한 걸요? 누군가에게는 역경이, 누군가에게는 기회가 되나 봅니다. 그 역경을 견디고 버텨낼 수만 있다면요. 

저는 한 여름, 산행을 좋아합니다. 둘레길을 걷다가 문득 벤치가 보이면 나무 그늘 아래 눕습니다. 나뭇잎이 빈틈 없이 빼곡이 하늘을 채웁니다. 한 줌의 햇빛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하늘을 빼곡하게 가린 잎을 보며, 겸허해집니다. 나무를 보며 다시 의욕을 불태웁니다.

'열심히 살아야겠다, 동물 주제에 식물보다 게으름을 피울 수는 없지.' ^^

 

'녹색동물', 자연다큐를 좋아하시는 분, 숲속 나무들이 들려주는 경이로운 이야기를 즐기고 싶은 분들에게 강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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