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21 저니맨 (파비안 직스투스 쾨르너 지음/ 배명자 옮김/위즈덤하우스)
내가 처음으로 배낭여행을 떠난 건 1992년 여름의 일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미친 짓이었다. 졸업을 앞둔 대학 4학년 여름방학, 취업이 되지 않은 상황에서 여행을 떠났다. 다녀와보니 여름 특채는 이미 끝난 후였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야학 교사로 하던 일을 그만 두고 여행을 떠났다. 배낭여행같은 호사를 누릴 수 없는 야학 학생들에게 죄책감이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그럼에도 떠났다. 그게 마지막 기회였으니까. 공대를 졸업해서 직장에 들어가면 이제 남은 평생 배낭 여행을 다닐 기회가 없을 테니까.
유럽 여행에서 나는 거리의 예술가들을 처음 만났다. 런던 피카딜리 서커스 앞에서 만난 마임 공연자, 프라하 카를 교 위에서 본 바이올리니스트, 스위스 시계탑 앞에서 저글링하는 어릿광대 등. 1980년대 대학을 다니며, 내가 주위에서 본 사람들은 주로 해야할 일을 하거나 (운동권 학생) 어쩔 수 없이 일을 하는 (직장인) 사람들뿐이었다. 그냥 좋아서, 즐거워서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런 내게 거리의 딴따라들의 모습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저니맨'이란 책에 거리의 악사 소년이 하나 나온다.
'"안녕하세요. 저는 가브리엘 앙겔로입니다. 나이는 열두 살이고 여섯 살 때부터 트럼펫을 불었어요." (중략)
가브리엘은 음악원 수업료를 벌기 위해 매일 학교가 끝나면 거리에서 연주를 한다고 했다. 바닥에 놓인 악기 케이스에는 관객들이 넣고 간 동전들이 가득했다. 하지만 그는 카메라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사람들이 악기 케이스에 던져주는 돈을 벌기 위해 연주하는 게 아니에요."
나는 카메라에서 천천히 눈을 들어 소년을 바라보았다. 나도 모르게 손이 떨렸다. 손만 떨리는 게 아니라 가슴도 떨리고 있었다.
내가 수련여행을 통해서 느끼고 싶어 했던 것, 가슴 깊은 곳에서 '이거야!'라고 외칠 수 있는 그 무엇을 소년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나는 열두 살짜리 소년 가브리엘이 나보다 더 어른스럽게 느껴졌다. 그리고 부러웠다. 이제 녀석은 나이만 들면 된다. 성장이란 자기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정확히 알아가는 것이기 때문이엇다. 나는 그 자리에 서서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히 아는 자'의 트럼펫 연주에 한동안 심취해 있었다.'
(저니맨 249~250쪽)
20대의 나 역시 춤추는 걸 좋아하고, 사람들을 웃기는 걸 좋아했다. 하지만 감히 그걸로 먹고 살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었다. 그러나 거리의 광대를 본 후 생각이 바뀌었다. '큰 돈을 욕심내지 않는다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즐겁게 살 수 있지 않을까?' 그 각성이 훗날 나를 통역사에서 예능 피디로 전직케 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통역사보다 돈은 적게 벌었지만, 예능 PD로 사는 게 더 즐겁다면 그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나는 MBC 예능국이란 조직 속에서 지속가능한 딴따라짓을 꿈꾸었다.
'생애 한 번, 반드시 떠나야 할 여행이 있다.'
'인생의 숨어 있는 가능성을 끌어올리는 혁명 같은 여정'
나는 항상 사람들에게 여행을 권한다. 여행은 내 속에 숨어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내는 최고의 기회다. '저니맨'의 저자는 벽에 스티브 잡스, 비틀즈와 괴테, 헤르만 헤세 등의 사진을 붙여놓고 여행의 꿈을 그렸다.
'스티브 잡스는 일찍이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인도를 방문했고, 그 영적인 여행에서 돌아온 뒤 세상을 향해 혁명적인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영국의 전설적 밴드인 비틀즈 역시 인도 여행을 통해 새로운 음악적 영감을 얻었으며, 헤르만 헤세도 수에즈 운하를 거쳐 스리랑카, 말레이 반도에 이르는 석 달간의 험난한 여정 속에서 삶의 본질과 만났다. 괴테는 이탈리아에 머물며 <파우스트>를 비롯한 수많은 작품을 구상했고, 안데르센 또한 유럽 순회여행 속에서 세대를 뛰어넘는 명작들의 씨앗을 찾아냈다.'
(같은 책 11쪽)
사람들에게 여행을 떠나라고 말하면, 옆에서 듣던 집사람이 나중에 꼭 집에 와서 구박을 한다. '여행 다닐 형편이 안 되는 사람에게 왜 그런 얘기를 하냐고.' 장기 여행을 떠나는데 특별한 경제적 조건은 없다. 마음만 있으면 된다. 저니맨의 작가는 1,2년간 세계 여행을 다니겠다고 마음 먹었으나 그때 그의 지갑엔 200유로, (30만원) 통장에는 255유로 (38만원)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일단 떠난다. 그리고 현지에 가서 일을 하며 숙식을 해결한다. 일하느라 공사판 막일도 하고, 길바닥 노숙도 감행한다.
'누군가 내게 "여행까지 가서 일하느니 차라리 자금을 넉넉히 준비해서 떠나는 게 낫지 않겠나?"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내 생각은 반대다. 수련여행을 통해 내가 꼭 깨뜨리고 싶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조건이 갖춰져야만 떠날 수 있다'는 고정관념이다. JC처럼 거의 모든 젊은이들은 여행 자금을 벌기 위해 많은 시간을 보낸다. '돈을 얼마나 모아야 떠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는 저마다 편차가 있지만, 거의 대부분 충분히 마련할수록 안전하다고 대답한다. 하지만 내 경험으로 봤을 때 그런 식이라면 3년, 5년, 아니 10년 뒤에도 못 떠날 공산이 크다.'
(같은 책 197쪽)
나 역시 동감이다.
"여행을 떠나는 사람은 모두 엇비슷하고 못 떠나는 사람은 못 가는 이유가 제각기 다르다."
(제러드 다이아몬드의 안나 카레니나 법칙의 변용^^)
돈이 많으면 더 행복하겠지만, 돈을 더 벌기 위해 행복을 유예할 필요는 없다. 지금 이순간 당장 행복해야 한다. 돈이 없으면 없는 대로 즐길 수 있는 게 인생이듯, 돈이 적으면 적은 대로 즐길 수 있는 것이 여행이다. 적은 경비로 여행을 다니려면 싼 숙소를 찾아갔다가 주변 환경이 좋지 않아 고생도 하고, 가격 실랑이를 하다 현지인들과 부딪히기도 하고, 열악한 현지인의 삶에 충격을 받기도 한다. 그게 진짜 여행이다.
'관광은 밝은 빛을 보는 여정이지만 여행은 빛 뒤에 가려진 어둠까지 봐야하는 여정이다. 그래서 관광객이 단지 눈으로만 즐거워할 때 여행자들에게는 가슴으로 아파할 기회가 주어지며, 그것이 곧 삶의 화두로 이어진다.'
(같은 책 246쪽)
지난 가을, 한 달간의 아르헨티나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서, '뭐 이런 나라가 다 있어?'라는 장문의 여행기를 올렸다. 글을 쓰면서 힘들었다. 나름 긍정의 화신, 극단적 낙천주의자라고 불리는 내가 한 나라에 대해 이렇게 부정적인 글을 쓰는 것이 옳을까? '저니맨'을 읽고 깨달았다. 나는 아르헨티나 관광이 아니라 여행을 했구나. 그 나라의 현대사에 드리워진 어둠을 보고, 거기서 삶의 화두를 얻었구나. 무엇이든 쓰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던 거구나.
다독비결 21
책을 읽다보면 살면서 고민하던 문제에 대한 답을 책 속에서 찾기도 한다. 일상생활에서 몸으로 부딪히며 답을 찾는데는 한계가 있다. 같은 경험을 한 다른 사람이 책에 남긴 글을 통해 내 삶의 답을 모색하는 것, 그것도 다독의 이유이자 비결이 아닐까?
쿠바에서 만난 택시 기사가 저자에게 불쑥 이렇게 말했다.
"당신들은 축복받은 사람들이에요. 다른 나라를 자유롭게 관광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행복인지 알아야 해요."
(같은 책 258쪽)
모든 여행자는 축복받은 자다.
인간은 두 번 태어난다. 한 번은 어머니의 자궁에서, 한 번은 여행길 위에서.
새로운 삶의 기회를 얻을 수 있는 여행자만큼 복받은 사람도 없다.
그 축복은 떠나 본 자만이 누릴 수 있다.
새로운 삶을 꿈꾼다면, 어서 떠나시길.
92년 스위스로 가는 열차 안에서 만난 남미 인디오. 그는 팬플룻 연주자였다.
그의 모자와 악기, 장신구를 빌리고, 그에게 부탁해 찍은 사진.
92년 헝가리 여행중 찍은 사진. 동구권 개방 직후라, 이 아이들은 처음 보는 동양인의 모습에 무척 신기해하더라.
여행의 즐거운 추억이, 다시 나를 여행으로 이끈다.
그리고 그 여행은 늘 나를 새롭게 바꿔준다.
'짠돌이 여행예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좋기만 한 일도, 나쁘기만 한 일도 없다. (6) | 2016.02.09 |
---|---|
여행 배낭 가볍게 꾸리기 (2) | 2016.02.06 |
취미와 전공의 이런 멋진 만남 (0) | 2016.01.17 |
행복에 관하여 (4) | 2016.01.03 |
할아버지 라이더의 파란만장한 인생 (2) | 2015.09.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