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님을 모시고 뉴욕에 다녀왔다. 추석 명절을 보내는 색다른 방법이라고 생각하는데, 음... 마냥 쉽지만은 않았다. 아버지와 3주간 미국을 여행하고 돌아와 가장 먼저 한 것은 아내를 안고 등을 토닥여 준 일이다.
"그동안 나랑 살면서 얼마나 힘들었어?" ^^
블로그 제목에서 눈치 챌 수 있듯이, 나는 짠돌이다. 술 담배 커피 골프, 이런거 다 안한다. 돈이 드니까. 아버지 모시고 여행하면서 깨달았다. 나의 짠돌이 근성은 무슨 근검절약하겠다는 고귀한 뜻에서 나온 게 아니라 그냥 아버지한테서 물려받은 거구나.
뉴욕 여행 첫날, 점심을 뭘로 할까 고민하다 75세 노인이신 아버지의 입맛을 배려해서 코리아타운의 한인 식당을 찾았다. 1인당 15불 정도하는 불고기 정식을 시켰는데, 뉴욕 물가를 고려하면 가격 대비 만족도가 꽤 높았다. 양도 많고 야채도 많이 주고, 무엇보다 서빙하는 한국 유학생들이 친절했다. 나오면서 팁을 5불 정도 두고 나왔다. 식사가 30불이니까 팁은 15%해서 5불 정도 한거다. 그런데 아버지가 기겁하시더라.
뭔 팁을 저렇게 많이 주냐. 5달러면 한국에서 밥이 한 끼인데.
아버지, 미국은 원래 그래요. 식당에서 팁을 줘야해요.
맥도날드도 그러냐?
네? 맥도날드는 팁이 없지요.
그래서 남은 3주간 식사는 맥도날드에서만 했다. ㅠㅠ
나중에는 맥도날드가 질려서 온갖 햄버거 체인을 다 섭렵했다. 잭인더박스, 칼스 주니어, 인앤아웃 버거 등등. 가게가 많기로는 맥도날드지만 맛은 인앤아웃이 최고였다. 가기 전에 론리플래닛 뉴욕 편에서 중저가 식당들 몇군데 메모해서 갔는데, 아무 소용없더라. 전세계 음식이 다 모인 곳이라, 맛집 많기로 유명한 뉴욕에서 내내 맥도날드만 먹다니......
사실 나도 비싼 음식에 돈 낭비하는건 싫어한다. 그리고 햄버거도 좋아하는 편이다. 3주간 맥도날드로 버티기, 할 수 있다. 짠돌이 여행, 원래 내가 선구자다. 자유의 여신상을 보는 크루즈, 이런 거 안 탄다. 스태튼 아일랜드로 가는 무료 페리탄다. 홉 앤 오프 도심 투어 버스, 이런거 안탄다. 버스 노선도를 연구해서 메트로 카드로 이용할 수 있는 일반 시내 버스로 돌아다녔다. 남들은 유람선타고 보는 브루클린 다리, 우리는 직접 걸어서 건넜다. 브루클린 프로머네이드 산책로를 걷고 있는데...
어디 가는 거니?
여기로 조금만 더 가면, 시에서 운영하는 페리가 나와요. 거버너스 아일랜드로 가는.
얼마냐?
(이 대목에서 자신있게 말했다.)
2달러요.
(뉴욕에서 배를 타고 맨하탄 고층 빌딩을 감상하는데 2달러면 거저다.)
왜 그렇게 비싸냐?
네?
결국 그 배는 타지 못했다. ㅠㅠ
결국 3주 동안 유료 관람 시설은 이용할 수 없었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니, 911기념관이니, 프릭 컬렉션이니, 하나도 못 봤다........ 그냥 센트럴파크에서 산책하거나 하이라인을 걷거나 타임즈스퀘어에서 하염없이 앉아 사람 구경하거나... 그게 다였다....
(뉴욕에서 아버지가 제일 좋아하시는 곳. 타임즈 스퀘어. 공짜 구경으로는 역시 사람 구경만한게 없다고. ^^)
작년 추석에 아버지를 모시고 보라카이 놀러 갔을 때는 이런 문제가 없었다. 그냥 해변가를 산책하고 빈둥거리면 되니까. 특별히 돈 들일 일이 없으니까. 그런데 뉴욕에 와서, 맛난 거 못 먹고, 보고 싶은 거 못 보고, 타고 싶은 거 못 타니까 미치겠더라... 동남아 물가랑 미국 물가가 다르다는 것을 생각했어야하는데... ㅠㅠ 이런 경우, 다른 사람이랑 여행을 왔으면 둘이 찢어져서 각자 보고 싶은거 보고 저녁에 숙소에서 만나면 되는데, 75세 노인을 모시고 뉴욕에 오니 그게 안 되더라. 24시간 붙어서 통역 해드려야지, 가이드 해드려야지, 내가 다 해야하니까...
뉴욕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에는 딸들 선물 사주려고 NY 기념품 가게에 들렀다. 물건을 고르고 있는데 보니 아버지가 안 보이더라. 가게 앞에서 쉬시나? 나가봐도 아버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영어도 안되는 노인이 맨하탄 중심가에서 길을 잃은거야? 완전 패닉해서 가게를 샅샅이 뒤지고 거리를 뒤졌지만 찾을 수 없었다. 어떡하지? 그러는데 저 길 건너에서 쓱 나타나시더라. 너무 놀란 터라 진이 다 빠졌다. 결국 아이들 선물은 사지 못하고 그냥 숙소로 돌아왔다.
아버지에게 왜 말없이 사라지셨냐고 그러다가 깨달았다. 아, 이건 나구나.
내가 그런다. 집사람이랑 백화점 쇼핑 가서, 물건을 고르다가, 어느 순간 가격표를 보고 나면 만정이 떨어진다. 그러면 나는 말없이 휙 나와서 저 멀리 쇼파에 가서 앉는다. 빨리 집에 가자고 계속 눈치를 준다. 집사람은 느긋이 같이 다니면서 내 옷도 고르고, 자기 옷도 한번 봐주고 그러길 바라는데, 턱도 없는 일이다. 가격표만 봐도 협심증이 오는데... 그래서 말없이 휙 사라진다. 쇼핑에 대한 격한 항의의 표현이다.
아버지를 모시고 3주간 여행하면서 느꼈다. 집사람이 나랑 살면서 얼마나 힘들었을지. 나 때문에 못 하고 사는게 얼마나 많을지. 동시에 좌절을 느꼈다. 나도 늙으면 아버지처럼 될터인데, 그럼 우리 애들은 나랑 지내는게 얼마나 힘들까?
늙은 아버지를 모시고 가는 여행, 힘은 들지만, 그래도 여러분께 권하고 싶다.
나의 근원을 들여다보는 기회이자, 내가 어디로 가는가를 알려주는 좋은 경험이 된다.
나란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보일지 알 수 있는 객관적인 경험을 제공한다.
분명 유쾌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면 깨닫게 된다. 아, 나랑 사는 사람도 그렇겠구나.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할지 고민하게 된다.
나이 50을 목전에 둔 나로서는 유용한 경험이었다. 건강하실 때, 뉴욕에서 한번 살아보고 싶다던 아버지 소원을 이뤄드려서 다행이다. 나는 언제라도 다시 갈 수 있으니, 이번에 뽑아둔 맛집 리스트는 다음에 활용하기로. ^^
뉴욕에서 돈 한 푼 안들이고 여행하기!
3주간 비법을 터득하고 왔습니다. 다음 포스팅을 기대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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