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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짜로 즐기는 세상/짠돌이 육아 일기

PD처럼 공부하게 하라

by 김민식pd 2014. 1. 20.

MBC 입사하기 전, 나는 영상 연출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전공은 커녕 흔한 방송반 활동 한 번 한 적 없었다. 주위에 아는 피디도 한 명 없고, 아카데미나 미디어 교실 이런 곳도 없던 시절이었다. 연출에 대해 아는 거 하나 없이 입사해서 조연출 3년 반 동안 배워서 만든 게 '뉴논스톱'이었고, 그 작품으로 백상예술대상 신인 연출상을 탔다. 그러니 내게 MBC는 최고의 배움터이다. 공대 나와 영업 사원 하던 이도 입사 3년 만에 번듯한 피디로 키워내는 조직, 역시 좋은 회사는 뭔가 다르다. (자기 자랑과 회사 자랑, 호감과 비호감 사이 그 촘촘한 경계 속에서, 저는 오로지 아이를 사랑하는 부모님들, 그 독자들만 바라보고 가겠습니다. ㅋㅋㅋ)

 

97년 MBC 예능국에 현업 배치되어 일을 배우기 시작한지 두어달쯤 지났을까? 조연출 선배가 부르더니 '이제부터 예고편은 네가 만들어 봐.' 라고 했다. 물론 편집기 다루는 요령이나 자막 의뢰서 쓰는 법은 어깨너머로 봤지만 막상 예고를 만들자니 겁이 더럭 났다. 속으로 생각했다. '엉망으로 만들면 어떡하지? 나중에 선배가 고치거나 새로 만들어주겠지?' 그렇게 정말 어설픈 예고편을 만들어 선배에게 들고 갔다. 딱 한 번 보더니, '어, 그래.' 하더니 그냥 종합편집실로 넘겨버렸다. 완전 기겁했다. '저대로 방송 나간다고?' 

 

선배를 붙잡고 물었다.

"선배님, 제가 만든 예고가 많이 부족한데, 좀 도와주시면 안 되나요?"

"응? 뭘 도와줘?"

"편집에 리듬감도 부족하고, 자막도 어설퍼서 좀 고쳐서 방송 내보내야 할 것 같은데요."

자신이 맡은 일하느라 정신없던 선배가 그제야 허리를 쭉 펴고 나를 돌아봤다.

"김민식 씨가 편집 한 걸 내가 어떻게 고치니?"

"예?"

"김민식 씨도 한 사람의 피디인데, 피디가 만든 걸 어떻게 다른 사람이 손을 대느냐구."

"그래도 전 아직 신입 사원이잖아요. 그리고 조연출이고..."

"MBC에서 김민식 씨 뽑을 때, 평생 신입사원만 하라고 뽑았나? 3년 지나면 김민식 씨도 연출로 입봉해서 현장에 나갈텐데 그때도 다른 사람더러 도와달라고 할 거야? 피디는 감독이야. 감독이 뭔데, 혼자 다 알아서 결정하는 사람이 감독이야. MBC 전통이 뭔지 알아? 아무리 조연출이라도 피디가 만든건 윗 사람이 함부로 고치지 않는다야. 다음부터 본인이 만든 거 절대 다른 사람한테 고쳐달라 하지마. 어떤 선배라도 그건 절대 해서는 안되는 짓이니까."

 

 

얼마 전 조연출 시절 알고 지내던 어떤 작가를 만났다. 

"잘 지내시죠?" 하고 묻기에, "저야 뭐, 늘 그렇듯이 여유롭게 잘 살지요." 했더니 그 작가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감독님, 기억 안 나요? 감독님 조연출 시절에 편집실에서 내내 밤샜잖아요."

아, 맞다. 그랬구나. 어느새 다 까먹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난 조연출 시절 밤을 새며 죽어라 일했는데 그게 누가 시켜서 한 일이 아니었다. 어설프게 만든 예고가 방송에 나간 후, 깨달았다. 잘 만들던 못 만들던 내가 만든 건 그대로 방송을 탄다. 그걸 깨달은 후로는 죽도록 고생해서 만드는 수 밖에 없었다.

 

통역대학원을 다니다 피디가 되니 주위에서 걱정하는 사람이 많았다. '영상 문법도 모르는데 잘 적응할까?' 면접에서 내게 낙제점을 준 선배도 있다. '하는 일을 자주 바꾸는 사람이니, 입사하고 힘들면 금세 포기할 거야.' 물론 나 역시 그런 생각이 있었다. '피디라는 직업, 한 번 해보고 재미없으면 다시 통역사로 돌아가지 뭐.'

 

그런데 연출 포기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안 들더라. 아니, 오히려 세상에 이렇게 재미난 일이 다 있나 싶었다. 못 만들면 죽도록 괴롭지만 일단 적응하고 나면 이보다 더 행복한 직업이 어디 있나? 내가 만들고 싶은 건 무엇이든 다 만들 수 있다는데.  

 

96년에 어머니 모시고 여동생이랑 캐나다로 가족 여행을 간 적이 있다. 그때 에드먼튼이라는 도시에서 애니메이션 영화제를 하기에 보러 갔다가 '월레스와 그로밋'이라는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을 처음 접했다. 

 

 

아드만에서 만든 클레이 애니메이션 '월레스와 그로밋'

당시만 해도 국내에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이 알려지지 않은 시절이었기에 난 이걸 보고 완전 반해버렸다. 그리고 1년 후, 신입 사원 시절, 30초짜리 스폿 영상을 만들라고 하기에 혼자 겁없이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에 도전했다. 

 

 

이 목각 관절 인형을 자취방에 세팅해놓고 회사에서 비디오 카메라를 빌려다 5초에 한번 씩 자동으로 찍히는 인터발로미터 기능을 이용해서 찍었다. 삼각대에 카메라를 고정한 후, 관절 인형을 조금씩, 아주 조금씩 움직이는 끈기만 있으면 누구나 집에서 손쉽게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을 만들 수 있다. 물론 30초 짜리 하나 만들려면 이틀 밤은 꼬박 샐 각오를 해야한다. ^^

 

(요즘은 세상이 좋아져서 스마트폰으로 스톱 모션 애니 만드는 어플도 나와있다.

자세한 이야기는 아래 링크를 참고하시길~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minasong0131&logNo=120170692732)

 

요즘 세상에 중요한 건 열정이다. 배우고 싶은 마음만 있다면 지식의 바다, 인터넷에서 무엇이든 찾아 알아낼 수 있고, 스마트폰 하나면 예전에 고성능 무비 카메라가 가진 기능 무엇이든 다 재현할 수 있다. 이 좋은 세상에, 그 좋은 스마트폰으로, 아이들이 허구헌날 게임만 하고 있다고 한탄한다면... 그건 아마 아이가 아직 열정을 배우지 못한 탓일 게다.

 

열정은 어디에서 오는가? 즐거움에서 온다. 그리고 즐거움의 원천은 자율성이다. 내게 일하는 즐거움을 알려 준 것은 자율성이었다. 내가 만든 것을 믿고 무조건 방송에 내보내주는 회사가 있어 미친듯이 일할 수 있었다. 나같은 공돌이 영업사원을 3년 안에 어엿한 피디로 키워낸 건 피디의 자율성을 존중하는 MBC의 조직문화였다.

 

어떤 교수님을 만났더니 요즘은 부모가 대학에 와서 교수를 직접 만나 면담을 하고 아이의 수강신청도 일일이 도와주는 경우가 있단다. 그 아이가 과연 공부의 즐거움을 온전히 알 수 있을까? 내가 한 일의 결과에 대해 온전히 책임진다는 것이 두렵긴 하지만, 극복만 하면 한없는 즐거움의 원천이다. 아이를 사랑한다고 언제까지 아이 인생을 부모가 대신 살아줄 건 아니지 않는가.

 

조연출이 만들어온 예고에 일일이 손대기 시작하면 다음에도 또 도와주겠지하고 의지하는 마음이 생긴다. 그걸 단칼에 자르고 혼자 일어서게 하는 것, 그게 MBC가 피디를 키우는 방식이다. 자신의 시간을 스스로 관리하고, 혼자서 공부하는 습관을 기르게 하는 것, 그게 아이를 어른으로 키우는 진짜 교육 방식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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