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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짜로 즐기는 세상

느리게 사는 즐거움

by 김민식pd 2013. 7. 18.

전중환 교수의 ‘오래된 연장통’이란 책을 참 재미나게 읽었다. 진화심리학자인 저자의 말에 따르면 우리의 몸과 마음은 수십만 년 간 이루어져온 진화의 산물이다. 우리가 심리적으로 단 맛을 더 좋아하는 이유는 풍부한 에너지원을 공급해주는 당분을 많이 섭취하기 위해서란다. 비만이라 영양과다 상태인데도 먹을 것만 보면 식욕이 동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사바나 초원에서 수렵채취 생활을 하며 언제 식량을 구할 지 알 수 없는 상태로 수십만 년을 살았다. 그러기에, 먹을 게 생기면 일단 잔뜩 먹어두는 사람이 생존에 유리했고, 그 결과 포식하는 습성이 진화선택 되었단다.

 

수십만 년 동안 살아남기 위해 진화를 거듭해 온 우리의 몸은, 지난 수십 년 간 이루어진 문명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기에 단 것을 좋아하는 습성 때문에 당뇨병으로 고생하고, 필요 이상으로 많이 먹는 식습관 때문에 비만과 성인병에 시달린다. 살아남기 위해 선택된 형질이 세상의 변화를 따라잡지 못해 이젠 오히려 생명을 위협하고 있다는 것, 풍요로운 시대가 가져온 비극이다.

 

세상의 변화를 따라잡지 못하는 건 우리 몸 뿐 만이 아니다. ‘공짜로 즐기는 세상’이라는 블로그를 운영하며 피디 지망생들과 소통하는데, 가끔 이런 사연이 올라온다.

 

‘대학에서 선택한 전공이 제 적성과 달라 방황중입니다. 좋아하는 일을 찾기 위해 뒤늦게 복수 전공을 선택하고, 휴학을 통해 새로운 경험도 쌓고 싶은데, 집안에서 반대가 심합니다. 빨리 취업도 하고 결혼도 해야 하는데, 서른 살이 다 되도록 네 앞가림도 못하고 있으니 어떻게 하느냐는 거지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

 

20대에 빨리 자리 잡으라고 부모들이 성화를 하는 건 평균 수명 60대이던 시절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탓이다. 나이 60에 부모가 죽으면 자녀는 겨우 서른이다. 죽기 전에 아들이 자리도 잡고, 가정을 이루는 모습을 봐야 마음이 놓이니 20대에 빨리 취직하고 결혼하라고 성화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기대수명 90세 시대다.

 

예전에 딸 아이 하나만 키울 때 아내가 그랬다.

 

“우리가 죽고 나서 아이가 외롭지 않으려면 동생 하나는 만들어줘야 하는 거 아닐까?”

“부인, 우리가 90에 죽으면, 지 나이 60이야. 나이 60에 부모가 없어 외롭다고 하면, 그게 지가 인생을 잘못 산거지, 우리 탓이겠어?”

 

예전에는 한번 취업하면 평생직장에 종신고용이 보장되던 시절이었다. 그러니 별로 적성에 맞지 않는 일도 월급 받는 재미로 설렁 설렁 일하며 버틸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하기 싫은 일을 열정 없이 하면서 정년까지 버틸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빨리 취업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적성에 맞는 일을 찾아 열정을 바쳐 일하는 것이다. 재미없는 일을 평생 하고 살기에는 인생이 너무 길어졌다.

 

결혼도 마찬가지다. 예전에는 결혼하면 남편이 직장 생활하느라 바빴고, 나이 60에 퇴직하면 어영부영 10년도 못 살고 생을 마감하기 일쑤였기에 부부가 부딪힐 일이 없었다. 그러나 이제 퇴직은 빨리 하고 기대 수명은 늘어나는 시대다. 재수 없으면(?) 마음에 안 맞는 배우자랑 집에서 30년을 붙어살아야 한다. 불행한 결혼 생활, 길게 하는 것보다 좀 늦더라도 마음에 꼭 드는 사람을 찾는 게 더 낫다.

 

즐겁지 않은 일을 하고,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살기에 90평생은 너무 길다. 20대에 빠른 취직과 결혼을 종용하기보다 느릿느릿 걷듯이 인생을 즐기는 자세를 권해야 하지 않을까?

 

 

 

(월간지 '앰블러' -느리게 걷는 사람이라는 뜻- 창간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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