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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짜 PD 스쿨

공중파 드라마 피디가 본 '응답하라 1997'

by 김민식pd 2012. 9. 7.

'드라마라는 게 아무리 새롭게 만들어봐야 통속적인 장르가 가진 한계가 있지 않나? 결국 모든 미니는 애정물이고, 모든 사극은 인정물이고, 새로운 연속극이라봤자 더 자극적이고 극성이 강한 막장으로 귀결될 수 밖에 없는 것 아닌가?'

 

드라마 피디인 나는 항상 이런 자괴감을 안고 사는데, 최근에 '응답하라 1997'을 보다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았다. '이렇게 참신한 드라마, 처음일세!' 평소 영화도 조조가 아니면 절대 보지 않는 짠돌이가, 응답하라를 정주행하려고 CJ E&M 월정액까지 끊었다. 보면 볼수록 참 잘 만든 드라마다. 아니 무엇보다 예능만 하던 작가와 연출이 만나 첫 드라마로 이렇게 잘 빠진 작품을 만들었다는 것이 정말 놀랍다.

 

'참신한 복고!' 모순된 표현이지만, 응답하라에는 딱 맞아떨어진다. 흔히 복고 드라마라고 하면 1970년대 나이트클럽이나 1980년대 건설현장을 배경으로 만들어진다. 우리에게 아직 과거라 하기에 어색한1997년을 배경으로 복고 드라마를 만들 수 있다니! 기존 장르를 다시 세분화하는 것 만으로도 새로운 장르가 만들어질 수 있구나! 

 

'1997년, 우리는 누군가의 팬이었다.' 이 드라마는 팬질하는 소녀들의 취향을 다시 세분화한다. 어른들의 눈에는 다같은 팬클럽이겠으나, HOT 팬클럽과 젝스키스 팬클럽은 서로 완전히 이질적인 존재들이다. 같은 HOT 팬클럽 안에서도 누구를 더 좋아하느냐를 가지고 파가 나뉜다.

 

복고란 것은 과거의 기억을 현재에 재구성하는 것인데, 과거의 취향을 세분화하는 것으로 이야기의 한 축을 완성한다. 미세한 취향의 차이를 연출의 디테일로 모아 리얼리티의 성을 완성하는 방식이다. 미세한 취향의 차이를 안다는 것은 덕후질을 세게 해봤다는 것이다. 어설프게 소녀시대를 좋아하는 사람은 티파니와 윤아가 가진 매력의 차이를 죽었다 깨어나도 모른다. 대중문화를 제대로 즐겨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 1997같은 대본은 못 쓴다. 

 

 

 

이 드라마는 궁극의 덕후질이다. 극중 여주인공은 에쵸티 팬픽을 쓰다 문예창작과로 진학하게 되고, 토니안의 일상을 추적하는 '사생'(아이돌의 사생활을 매순간 팔로우하는 것?)을 뛰다 방송 작가가 된다. 나의 취향이 나의 일이 되는 것, 이것은 모든 덕후들의 꿈이 아닌가? 예능을 십여년간 만들어온 작가와 연출은 드라마 곳곳에서 지난 10여년 동안 TV를 휩쓸고 간 예능의 웃음 코드를 소환해낸다.

 

무언가에 오래도록 미쳐본 사람만이 취향의 세분화가 가능하다. 어설프게 좋아해서는 두루뭉술한 일반적 견해만 가질 뿐이다. 미치도록 무언가를 좋아한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이야기, '응답하라 1997'은 그런 드라마다.

 

사람들의 열광을 불러일으키는 예능 프로그램을 만들면서도 그들은 남들처럼 또 드라마에 열광하며 살았나보다. 드라마 덕후가 된 예능 피디와 예능 작가는 드라마에 대한 짝사랑을 몰래 키우고, 그 사랑을 현실로 옮길 기회를 얻기 위해, 공중파라는 안전한 울타리를 박차고 나온 것인지도 모른다. 이 드라마의 성공담은 모든 덕후들의 로망이자 전설이 될 것이다.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 낼 수 없다는 자괴감에 빠져살던 나, 이제 다시 시작할 용기를 얻었다. 내가 만들 무언가 역시, 미치도록 무엇을 사랑한 결과물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다시 덕후질, 시작이다!

덕후들이 지배하는 세상이여, 어서 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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