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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의 경제 공부

대한민국 파이어족 선언문

by 김민식pd 2024. 4. 29.

저는 쉰둘의 나이에 MBC에서 퇴사했습니다. 회사에서는 제가 퇴직이 조금 빠른 편입니다. 그 결정을 한 이유는 제가 은퇴 후에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읽고 싶은 책도 많고, 가고 싶은 곳도 많고, 하고 싶은 일도 너무 많아요. 주5일 출퇴근을 하면서 해내기는 어려울 것 같아 퇴사를 선택했습니다.

은퇴를 하기 전에 반드시 고려해야 할 일은 은퇴 후에 무엇을 할 것인가, 시간 계획입니다. 진짜 은퇴는 드라마나 광고에 나오듯 한가한 재벌 회장님이나 골프를 치며 소일거리를 하는 노년이 아니라, 나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일상을 살아가는 모습이어야 합니다. 오롯이 나에게 집중해서 내가 하고 싶은 일들로 시간을 채워야 합니다. 그럼 나는 뭘 해야 행복할까요?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가? 나에게 돈이 충분히 있다면 어떤 경험을 하면서 남은 일생을 채우고 싶은가?’ 저는 10년간 매일 아침 블로그에 글을 쓰며, 나름의 행복 리스트를 작성해봤어요. <공짜로 즐기는 세상>은 저의 행복 리스트입니다. 좋아하는 책, 내가 하는 일, 내가 다닌 곳으로 채워가는.

행복 리스트는 버킷리스트와는 다릅니다. 버킷리스트는 내가 하지 않았던 일 중에서 내가 해보고 싶은 일들을 찾아보는 과정이지요. 버킷리스트는 나의 로망이라든가 현실과는 동떨어진 것을 갈구하는 마음에서 시작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결핍의 감정’에서 출발합니다. 반면에 행복 리스트는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 나의 과거 경험 중에서 나에게 정말 중요한 것을 추려내는 과정입니다. 행복 리스트는 나의 행복했던 경험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만족의 감정’에서 출발합니다.

만약 버킷리스트가 산티아고 걷기 여행이라면, 그래서 은퇴를 결심하고 퇴사 후 산티아고를 다녀온다면, 거기까지는 좋아요. 다녀온 후 허무해집니다. 나의 결핍은 충족이 되었는데, 아직도 인생에는 기나긴 시간이 남아 있는데 이것을 무엇으로 채울지 애매하거든요. 저는 결핍이 없어요.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그냥 하거든요. 산티아고라는 버킷리스트 대신 매일 할 수 있는 서울 둘레길 걷기라는 행복 리스트를 씁니다. 이젠 은퇴 후 기나긴 시간이 두렵지 않아요. 매일 서울의 산책코스만 찾아다녀도 가고 싶은 곳은 너무나 많으니까요. 

<대한민국 파이어족 시나리오> (바호(이형욱) 지음/한국경제신문사)라는 책을 보면 파이어 선언문이 나옵니다. 

오늘부터 나는    

1. 내 삶의 주인이 된다. 그 누구에게도 내 삶의 주도권을 넘기지 않는다. 다른 사람을 탓하며 불행한 삶을 살지 않는다. 나는 나 자신의 행복을 온전히 책임진다.

2. 돈에 지배되지 않고 내가 돈을 지배한다. 나를 위해 일하는 투자자산과 부업을 꾸준히 관리해 경제적으로 자립한 삶을 살아간다. 내가 원하는 형태의 일, 나 스스로를 행복하게 하는 일을 하며 산다.

3. 직장의 노예가 되어 단순히 생계를 위해 노동을 하는 삶과 결별한다.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 정장이나 유니폼을 입을 필요가 없다. 오직 나의 개인적 성취와 만족감을 위한 일을 찾아서 한다. 원한다면 언제든 은퇴해 일과 분리된 일상의 자유를 누린다.

4. 나를 행복하게 하는 인간관계를 맺고, 나를 불행하게 하는 시선에서 자유로워진다. 평판 유지를 위해 사회생활에서의 굴욕적인 대우와 인격 모독을 억지로 견디지 않는다. 내가 어떤 차를 타고 어느 집에 사는지에 대한 남의 시선과 평가를 신경 쓰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의 경제적 성공을 진심으로 축하하고 질투하지 않는다.

5. 일을 포함한 그 무엇보다 나와 내 가족의 행복, 건강, 안전을 우선한다. 더는 내 자녀와의 시간을 직장 때문에 억지로 빼앗기지 않는다. 나의 자녀가 성장하는 과정을 온전히 지켜볼 자유를 얻는다. 내가 사랑하는 가족과 행복한 시간을 충분히 보낸다.



요즘 제가 인스타그램에 #내가오늘행복한이유 라는 해시태그를 달고 매일 한 가지씩 감사일기를 씁니다. 은퇴자로 하루를 보내며,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언제였는지 매일 아침 되새겨보는 시간이지요. 어느 분이 댓글로 ‘너무 행복에 집착하지 마십시오. 그러다 병 걸립니다.’라고 하셨어요.

맞아요. 쾌락과 행복만 추구하는 것이 건강한 삶은 아닙니다. 저는 불쾌와 고통을 견디는 삶 역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강의를 다니면, 긴장되고 힘든 순간도 많습니다. 꾸벅꾸벅 졸고 있는 이들 앞에서 열심히 독서 예찬을 펼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에요. 매일 헬스장에서 저항성 운동을 할 때마다 마음의 저항, 근육의 저항을 느낍니다. ‘그냥 편하게 쉬고 싶다!’ 그럼에도 저는 불쾌와 유쾌를 오가는 삶이 인생의 본질이라 생각합니다. 오로지 쾌락만을 추구한다면 그 끝에서 만나는 건 중독이지요. 

저는 담백한 행복을 찾습니다. 제가 말하는 행복은 도서관에서 빌려서 읽은 책이나 동네 산책코스, 헬스장에서 근력 운동하는 루틴, 아침 첫끼로 먹는 채소 과일 샐러드 같은 것들입니다. 나름 담백한 즐거움으로 일상을 채우려고 노력합니다.

은퇴자로서 제게 주어진 사명은 하루하루 행복하게 살아가는 일입니다. 내가 옳다고 믿는 것들에 아낌없이 시간을 투자하고, 내가 원하지 않는 남의 꿈을 이루는 데 내 시간을 낭비하지 않습니다. 온전히 나의 삶과 가치에 집중하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한 조기 은퇴니까요. 

명퇴 신청서를 내던 날, 함박웃음을 지으며 회사를 나왔어요. 무척 홀가분하고 정말 행복했어요. 10년 정도 회사 생활이 참 힘들었어요. 그랬기에 마음이 편했습니다. ‘그래,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내가 무엇을 해야 할까를 고민하는 대신, 이제는 나의 행복에 집중하며 살아보자’고 다짐했거든요. 

저는 한 살이라도 더 젊을 때, 자신의 삶을 온전히 자신의 욕망에 집중하며 사는 연습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조기 은퇴를 꿈꾸는 파이어족의 삶을 응원합니다. 한국형 파이어족의 삶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조금 더 이어갈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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