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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독서 일기

정세랑 작가의 피프티 피플

by 김민식pd 2018. 12. 21.

사람을 만나면 물어봅니다. “요즘 뭐가 재밌어요?” 사람들이 재미있다고 하는 건 다 해 봅니다. 의외로 나한테 맞는 새로운 즐거움을 찾는 수도 있어요. 어떤 사람한테 물었더니 “남자친구요.” 하더군요. 정말 부러운 표정으로 엄지손가락을 추켜 세워줬죠. “아, 연애하시는구나. 그렇죠. 남자친구 만나는 게 제일 좋죠.” 했더니... “아뇨, 피디님, 그게 아니라 드라마 ‘남자친구’가 재미있다고요.” TV를 잘 안 보니 이런 사오정같은 대화도...... 드라마 피디인데, 정작 드라마보다 책이 더 재미있다는... ^^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을 만나면 반가워요. 그럴 땐 꼭 물어봅니다. “요즘 무슨 책이 재미있어요?”

재미난 소설을 추천해달라는 이야기에 드라마 후배가 권해준 책이 있어요. <피프티 피플> (정세랑 / 창비). 정세랑 작가님의 책은 <지구에서 한아뿐>과 <보건교사 안은영>을 재미있게 본 지라 달려가서 책을 읽었어요. 와우, 정말 재미난 책이네요.

저는 삶에서 재미가 가장 중요해요. 밤샘 촬영이나 편집이 흔한 직종인지라, 피디로 일하다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뜨는 이들을 꽤 봤어요. 드라마나 예능은 사람을 갈아 넣어 만드는 콘텐츠거든요. ㅠㅠ 삶이란 때로 너무 허망하게 끝나요. 언제 죽어도 후회 없는 삶을 살자고 다짐했어요. 커다란 목표 따위는 없어요. 목표를 향해 죽어라 달려가다 갑자기 세상을 뜨게 되면 못 이룬 꿈이 한이 되어 남을 지도 모르잖아요. 그냥 하루하루 소소한 즐거움을 누리며 살려 합니다. 아침에 블로그 글 한 편을 올려도 행복하고, 재미난 소설 하나를 만나도 행복한 그런 삶. 

<피프티 피플>, 병원과 인연을 맺는 다양한 사람들이 이야기가 나와요. 삶과 죽음이 결코 멀지 않음을 알려주는 공간이 병원이지요. 50명의 인물이 각각의 단편 소설의 주인공이 되어 이야기를 끌고가는데요. 50개의 단편이 하나의 장편으로 씨줄과 날줄로 얽혀 있어요. 책에는 이런 대목도 나와요. 


(의사인) 현재가 보기에 현재의 동료들도 산업재해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현재의 동기들은 40명, 그중 벌써 3명이 심각한 질명을 앓았다. 뇌출혈, 심근경색, 갑상선암이었다. 다른 이들도 30대 중반에 벌써 성인병 초입에서 서성거렸다. 자지 않고 쉬지 않으면 당연히 병이 든다. 주 100시간을 일하니 심혈관계가 망가지고 암세포가 생기는 게 놀랍지 않다. 우울증으로 인한 자살 시도도, 쉬쉬해서 그렇지 격년으로 있었다. 전공의 특별법이 병원협회의 끈질긴 반대를 이기고 겨우 통과되었지만 그 법이 제한하는 것도 주 88시간이다. 유럽에서 주 48시간을 일할 때, 한국에서 88시간을 일한다. 의료사고가 날 수밖에 없다. 의사들이 먼저 쓰러질 수밖에 없다. 그렇게 해서 의료 써비스를 싸게 제공할 수 있는 거겠지만 정말 사람을 갈아넣는 방법뿐인가, 현재는 자주 고민했다. 

“어디 가서 그런 빨갱이 같은 소리 하지 마라.”

오프 때 집에 갔을 때, 아버지가 말했다.

“그래, 버티면 지나가는 시절인데 투덜거리지 마. 다들 힘든 세상이야.”

어머니가 보탰다. (중략)

“요즘 애들은 나약해서......”

“믹서기에 들어가기 싫어하는 건 나약한 게 아니에요.”

(<피프티 피플> 378쪽)


병원 노조 파업할 때, 출정식에 가서 지지 발언을 한 적이 있어요. 

“타인을 돌보기 전에 여러분 스스로를 먼저 돌봐야 합니다. 여러분이 건강하고, 여러분이 행복해야, 환자를 건강하고 행복하게 돌볼 수 있거든요. 병원 노조가 파업을 하면, 직업 정신이 부족하다고 비난하는 이도 있는데요. 우리 사회에서 가장 아픈 사람들, 가장 힘든 사람들을 돌보라고 여러분께 맡겼다면, 그런 여러분의 노동 여건 개선과 복지 개선도 사회에서 책임지고 해결해야 해요. 사회에서 해주지 않을 땐 여러분이 나서서 싸워야 하고요. 그게 노동자의 권리이자 의무고요. 노동조합은 그러라고 존재하는 겁니다.”

환자나 보호자 가족들이 지나다니며 쳐다보는 병원 로비에서 그런 파업지지 발언을 하는 건 소심한 저로서는 눈치 보이는 일이긴 해요. 첫 직장에서 병원 영업을 했던 저는, 3교대로 일하는 당직 간호사의 노동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아요. 우리는 애써 늙고 병든 삶을 외면하고 살지요. 그런 삶을 외면하고 살 수는 있지만, 적어도 그런 이들을 돌보는 사람들까지 외면하지는 않았으면 좋겠어요. 아픈 건 선택이 아니지만, 그런 직업을 택한 건 선택이거든요. 그런 선택을 한 사람들의 노동 여건 개선은 사회의 책임이에요. 

재미난 소설을 소개하는 글이 갑자기 무거워졌군요. 이전에 읽은 정세랑 작가의 책은 판타지 소설이었어요. 짝사랑하는 지구인을 찾아 우리별에 온 외계인 이야기 <지구에서 한아뿐>, 혹은 퇴마사로 악령을 퇴치하는 보건 선생님 이야기, <보건교사 안은영>. 전작에 비해 <피프티 피플>은 작가가 정색하고 쓴 소설같은데요. 마지막 책장을 덮으면서 든 느낌. ‘선한 사람들의 의지가 모여 위기를 극복하는 이야기네. 좋은 사람이 끝내 좋은 결말을 맞기를 바라는 이야기. 어쩌면 이 소설이야말로 궁극의 판타지가 아닐까?’ 

정세랑 소설은 읽고 나면 늘 행복해요. 작가가 외치는 긍정의 주문에 조금 감염된 그런 느낌이지요. 50명의 이야기 중 저는 골프장 캐디로 일하는 ‘양혜련’ 편이 가장 좋았어요. 사람마다 어떤 이야기가 좋은지는 다르겠지요. 자신만의 최애편을 찾아보세요. 

정세랑 작가의 신작이 나왔군요. <옥상에서 만나요>. 서점으로 달려가 샀어요. 믿음직한 작가를 하나 안다는 것은, 작지만 확실한 행복 하나를 찜해둔 기분이지요. <옥상에서 만나요> 이야기로 다시 올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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