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운 여름 한 달, 자전거 출근을 쉬었습니다. 올림픽 중계 기간 동안에는 야근할때 힘들까봐 전철로 다녔습니다. 날이 선선해지기를 기다리다 며칠 전 다시 자전거 출근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첫날 늦잠을 잤어요.

눈뜨고 보니 5시 50분, 서둘러 길을 나섰어요. 오전 7시 반 교대인데, 늦겠네요. 한강 자전거 도로를 타고 상암까지, 갈 길이 먼데 지각이라니... 밤을 새워 가뜩이나 피곤한 야근자 볼 면목이 없습니다. 어서 가서 교대해야 한다는 생각에 어둑어둑한 새벽 거리를 미친듯이 페달을 밟아 달립니다. 그 와중에 문득, '분명 오전 5시에 알람을 설정했는데 왜 알람이 안 울렸지?' 이상했어요. 그러다, '어? 이거 혹시 꿈 아냐?' 하다가 깨어버렸어요. 손을 뻗어 휴대폰을 더듬어 시간을 보니, 새벽 3시 20분... 아, 이놈의 개꿈...

 

전날 저녁, 간만에 자출(자전거 출퇴근) 준비를 하면서 라이트에 밧데리를 간다, 회사 가서 갈아입을 옷과 수건을 챙긴다, 한창 부산을 떨었거든요. 그랬더니 이런 개꿈을 다 꾸는군요.

예전에는 야외 촬영 전날에 꼭 잠을 설쳤어요. 눈만 감으면 머릿속에서 촬영 콘티가 펼쳐집니다. '첫 커트를 인물 바스트샷으로 시작할까? 크레인 부감 풀샷이 낫지 않을까?' 눈꺼풀 위로 촬영콘티가 수십번씩 바뀝니다. 그러다 잠들면 꼭 개꿈을 꿉니다. 촬영장에 나갔더니 콘티 대본이 없는 거죠. 모든 배우와 스탭들이 나만 쳐다보는데 첫 커트를 어떻게 잡아야할지 몰라서 허둥대다 깹니다. 들어보니 드라마 작가들은 꼭 방송 첫주에 컴퓨터 하드가 날아가서 중반까지 써놓은 대본이 날아가는 꿈을 꾼답니다.

 

늦잠을 잤다고 생각했을 때, 무척 당황했어요. 저와 교대하는 야근 근무자가 피디 수첩의 한학수 피디입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무척 존경하는 동료입니다. 조금이나마 일찍 가서 교대를 해야하는데... 한학수 피디에게는 마음의 빚이 있습니다. 파업에 참여한 조합원들을 볼 때마다 느끼는 미안함이지요. 얼마전 문유석 판사의 '개인주의자 선언'을 읽다가

'그나저나 우리나라는 정말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나라인가보다. 황우석 사건 보도 같은 대단한 일을 해낸 피디조차 방송 제작 대신 스케이트장 운영 업무에 종사하게 되었다니 말이다. 탁월한 피디가 남아돌거나 또는 시민들의 생활체육을 극도로 중시하는 것이리라.'

라는 대목을 만났을 때,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 한학수 피디나 현업에 복귀하지 못한 MBC 기자들이나, 다 저처럼 촬영 전날이면 설레어 밤잠도 설쳤겠지요. 그런 이들이 파업에 동참했다고 5년 가까이 일터로 복귀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저는 죄책감에 밤에 잠이 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낮에는 운동을 합니다. 한강을 하루에 50킬로씩 걷기도 하고, 북한산을 오르기도 하고, 자전거를 타기도 하고, 그렇게 몸을 혹사시켜야 밤에 뒤척이지 않고 잠들 수 있어요.

어쩌면 매일 책을 읽고, 자전거를 타는 것도 현실을 잊어보려는 시도일지 모르겠습니다. 책을 읽는 동안엔 현실을 잊을 수 있고, 자전거 핸들을 잡는 동안에는 고민할 틈이 없거든요. 지난 과거를 후회할 틈도, 다가올 미래를 걱정할 틈도. 지금 내 눈앞의 도로에, 지금 내 앞의 책장속 글귀에 집중합니다.

 

문유석 판사의 페이스북을 읽다가 황정은 작가의 '계속해보겠습니다'의 추천글을 봤습니다.

2016-195 계속해보겠습니다 (황정은 / 창비)

 

소설 속 주인공들의 인생에도 답은 보이지 않네요. 아니 어쩌면 답을 못 찾고 방황하는 게 우리네 인생일지 몰라요. 인생에 답이 어디 있겠어요. 그냥 버티는 것 뿐이지.

책을 읽으면서, 글 한 줄 한 줄에 위로를 받습니다. 또박또박 '계속해보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주인공의 독백이 마음 속에서 쿵쿵 울립니다.

 

그래요, 저도...

계속해보겠습니다.

버티는 싸움도, 기왕에 내 인생이라면, 

계속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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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민식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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