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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0.10.12 나무를 다시 보게 되는 책 (13)

여러분은 추석 연휴 동안 무엇을 하셨나요? 저는 밀린 숙제를 했어요. 오래전부터 읽다 말다, 하던 책을 이번 연휴에 작정하고 완독했어요. 얼마 전 신문에 난 신간 소개 기사를 읽는데, 저자 이름이 '호프 자런'이에요. 낯익은 이름인데, 누구더라? 생각해보니 <랩걸>의 저자에요. 예전에 아내가 산 책인데요. 주간지 <시사인 2017 행복한 책꽂이>에 '출판인이 꼽은 올해의 책' 번역서부문 1위에 올랐던 책이에요. 주위 평이 다 좋아서 저도 읽기 시작했으나, 분량이 방대해서 읽다가 자꾸 순서가 밀렸어요. 읽고 싶은 책이 자꾸 눈에 띈 거죠. 저자의 신간을 영접하기 전에 출세작부터 봐야겠다는 마음에 다시 읽었어요.

<랩걸> (호프 자런 / 김희정 / 알마) 

이 책은 3개장으로 나뉘어있어요.

1장 뿌리와 이파리

2장 나무와 옹이

3장 꽃과 열매

식물의 생태에 대해 설명하는 과학서적, 그리고 여성 과학자의 자서전, 이 두 가지 이야기가 교차 편집되며 펼쳐져요. 어려서 아빠의 실험실에 매료된 한 소녀가 평생을 과학에 헌신하는 '랩 걸 lab girl'이 된 이야기인데요. 뿌리와 이파리는 과학에 흥미를 갖기 시작한 유년기, 나무와 옹이는 조교수로 연구 활동을 시작한 학자의 이야기, 꽃과 열매는 학문의 성과를 내고 가족을 이뤄가는 이야기로 이어지죠.

저자는 교수로 자리를 잡기 위해 이 대학 저 대학을 전전하는데요. 여성 전문가가 드물던 시절에 과학 분야에서 입지를 쌓아가는 게 쉽지는 않았어요. 사람은 그래도 동물이니까 환경이 맞지 않으면 옮겨 갈 수 있지요. 식물은 그렇지 않아요.  

'첫 뿌리가 감수하는 위험만큼 더 두려운 것은 없다. 운이 좋은 뿌리는 결국 물을 찾겠지만 첫 뿌리의 첫 임무는 닻을 내리는 것이다. 닻을 내려 떡잎을 고정시키는 순간부터 그때까지 누리던 수동적인 이동 생활에 영원히 종지부를 찍게 된다. 일단 첫 뿌리를 뻗고 나면 그 식물은 덜 추운 곳으로, 덜 건조한 곳으로, 덜 위험한 곳으로 옮길 희망을 포기해야 한다. 서리와 가뭄과 굶주린 입이 찾아와도 그로부터 도망갈 가능성 없이 모든 것을 직면해야 한다.'

(81쪽)

그렇죠. 나무는 한번 뿌리 내리면 끝입니다. 사람도 예전에는 그랬어요. 첫 직장이 평생 직장이던 90년대에는. 저는 지금도 눈을 감으면 1994년에 제가 일하던 첫 직장 사무실 풍경이 눈에 선하게 그려집니다. 그곳에서 평생을 보낸다고 생각한 순간, 너무나 절망스러웠거든요. 그래서 훌훌 떠났지요. 우리는 식물이 아니라는 점에 감사해야 해요. 움직일 수 있을 때는 과감히 뿌리를 옮겨야 합니다.

'식물이 처음 만들어내는 진정한 의미의 새 이파리는 새로운 개념이다. 씨는 닻을 내리자마자 우선순위를 바꿔, 모든 에너지를 위로 뻗어올라가는 데에 집중한다. 보유하고 있던 영양분은 거의 다 바닥이 났고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연료를 확보하려면 빛이 절실하다. 숲에서 가장 작은 식물이니 자기 위에 있는 모든 식물보다 더 열심히 일해야 하는데 그러는 동안 내내 그늘이라는 비참한 환경까지 견뎌야 한다.'

(96쪽)

그늘이라는 비참한 환경을 견디는 건, 새로운 취미를 시작할 때 필요한 자세가 아닐까 싶어요. 외국어든, 운동이든, 그림 그리기든, 처음 시작한 사람은 잘하는 사람과의 격차가 너무 커요. 그래서 쉽게 기가 죽고 포기하게 되죠. 울창한 나무를 보고 기죽을 필요는 없어요. 그냥 나 자신에게 집중합니다. 꾸준한 연습을 통해 어제의 나보다 조금 더 나아질 수 있기를 희망하는 거죠. 이 책을 읽고 나서 산책길에서 만나는 나무나 잡초가 달리 보여요. 빼곡히 하늘을 채운 나무잎이 증명하는 건 나무의 열정이죠. 햇빛 한 줌 놓지지 않으려는 그 치열한 자세.  

'땅에서 자라는 모든 식물은 두 가지를 얻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하나는 위에서 오는 빛, 그리고 다른 하나는 아래로 흐르는 물이다. 두 식물 사이의 경쟁은 한 가지 동작으로 결정된다. 더 높이 뻗는 동시에 더 깊이 파고 드는 것. 이런 전투가 벌어졌을 때 참가자에게 목재가 얼마나 큰 무기가 될지 생각해보라. 빳빳하지만 탄력성이 있고, 강하지만 가벼운 물질이 이파리와 뿌리를 따로 분리시키고 지탱해주는 장점을 지니는 것이 바로 목재다. 그렇게 해서 나무들은 햇빛과 물을 향한 경기에서 4억 년 이상 압도적 승리를 거둬왔다.'

(116쪽)

과학적 사실을 참 아름다운 언어로 묘사합니다. 더 높이 뻗는 동시에 더 깊이 파고 들기 위해 나무는 단단한 몸통을 만들고요. 그 덕분에 우리는 목재라는 가볍고 튼튼한 건축자재를 얻지요. 식물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생존할 수 없었겠지요. 개인적으로 제가 가장 감사하는 건, 나무 덕분에 종이가 만들어지고 책이 만들어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고보면 우리는 나무에게 참 많은 것을 빚지고 사는군요.   

책을 읽고 나면 나무가 달리 보입니다. 나무의 성장도 멋지고, 과학자로서 저자의 성장 과정도 감동적이에요. 과연 2017년 최고의 책으로 선정될 만한 역작이네요. 기나긴 연휴 덕분에 이제라도 이 책을 완독한 게 다행입니다. 오늘은 산책길의 나무에게 배우는 시간이 될 것 같아요.

 

Posted by 김민식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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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oming J 2020.10.12 06:2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 책 읽고 있는 중이였는데.. 피디님께서 추천해주시니 게으름 피우지 말고 어서 읽어야 겠네요^^

  2. 달빛마리 2020.10.12 06:2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예전에 유시민 작가님이 이 책을 추천해 주시면서 랩걸을 읽고 딸에 대한 걱정이 한시름 놓였다고 말씀하셨던 기억이 있어요.
    궁금한 책이었는데 오늘 이렇게 글을 올려주시네요. 고맙습니다. 도서 목록이 나날이 늘어갑니다. 행복한 고민이겠지요? :)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3. 인대문의 2020.10.12 06:5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무 덕분에 신선한 공기와 편안함을 즐기고,
    피디님 덕분에 내일 아침이 오는게 즐겁고,
    댓글 써주신 이웃 분들 블로그 덕분에 다양한 세상을 보는 재미를 느껴 행복하고,
    모두들 흥하십숑~♣

  4. 태양과 기쁨 2020.10.12 07:4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무가 주는 고마움 예전에 아이들 책인 아낌없이 주는 나무 책이 문득 생각도 나네요.~추천 책도
    관심을 갖고 보겠습니다
    예전처럼 책을 잘 안봐서 좀 ...뭐든 습관이 중요한거 같네요
    잘 보고 갑니다.~

  5. 꿈트리숲 2020.10.12 08:4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 2년전에 이 책을 읽고 과학자에 대한 편견을 바꾸게 됐어요. 멋있기만 할 줄 알았던 과학자, 그것도 여성과학자요. 자신을 받아주는 곳을 찾아서 연구실을 옮겨다니고 연구비를 따내기 위해 애쓰는 부분까지 잔잔하면서 흥미진진 그 자체였죠.

    나무와 곰팡이 관계가 자런과 빌의 관계 같고 자연과 인간의 관계 같아서 많이 공감을 했었어요.

    피디님 글은 전혀 다른 부분을 언급해주시니 책을 새로 읽는 기분입니다. ㅎㅎ
    자신의 운명을 탓하지 않고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나무가 제 이상형이에요. 좀 😎 멋지죠 ㅋㅋ

  6. 아솔 2020.10.12 09:3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제의 나보다 조금 더 나아질 수 있기를 희망하는 것. 기억할게요~

  7. 아프리칸바이올렛 2020.10.12 10:0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결혼 후 꽃보다 나무같은 사람을 기대하죠
    내가 그런 사람이 먼저 되어야할 텐데
    쉽지않은 걸 알아요
    또 나무 역시 오랜 시간 아무 일 없이 살아온게
    아니라 빛과 물을 얻어 생존하기 위한
    치열한 삶을 살고 있구나 싶습니다
    거기에 치열한 삶을 살아낸 몸통을
    우리가 유용하게 쓰면서 감사를 못 느꼈는데
    리뷰덕분에 새로운 시선을 얻었어요
    책의 두께가 엄두가 안날 거 같아서
    읽는건 포기해도 이렇게라도 랩걸을
    만나서 좋은 아침이에요

  8. 모험생띠띠 2020.10.12 10: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피디님 좋은 아침입니다!♡
    나무에 대한 이야기에 피디님의 생각이 더하니 더욱 읽고싶은 책이 되었어요. 저도 꼭 읽어보겠습니다. 오늘도 좋은 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9. 아리아리짱 2020.10.12 10:5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김민식 피디님 아리아리!

    저도 <랩걸> 감동적으로 읽었습니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들
    나이들수록 꽃보다 나무가 더 푸근하고
    좋아집니다.

    나무가 너무좋아 저의 블록그 이름도 '나무와 숲'
    새로운 한 주 또 힘차게 나아가렵니다. 아자아자! 아리아리!

  10. 아빠관장님 2020.10.12 14: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세요 ^^

    전 추석 연휴 동안 집에서 세 아이와 지지고 볶은 기억과 그 아이들과 2시간 동안 말도 안 되는 등산(엄밀히 따지면 하산-곤돌라타고 정상 올라갔었거든요~)을 한 기억이...ㅎㅎ

    피디님께서 방대한 양이라고 하실 정도면 장난 아닐텐데.. 그걸 해내시네요!! 대단하십니다 ^^

  11. 보리랑 2020.10.12 19:0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무의 아래로 위로 치열함. 그림 배울때 남들의 노력은 생각지도 않고 나만 못하는 듯하여 그만뒀네요. 육아일기 1권 출판 목표이니 힘있을 때 다시 시작해야 할텐데 ㅎㅎ 제가 나무를 좋아하는 이유는 나무를 보면 그 아름다움과 조화에 삶의 의욕이 팍팍 솟아요.

  12. 섭섭이짱 2020.10.13 10:3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세요.

    랩걸~~~ 저도 읽다 중단했었는데 ^^;;;
    다시 도전해봐야겠어요

    최근에 <아무튼, 식물> 을 읽기 시작했는데
    집에서 식물 키운다는게 왜 어려운지 알겠더라고요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만들어지는걸 다시 생각해보면서...
    숲의 고마움을 다시 느끼게 되네요.

    오늘도 좋은 글 감사합니다.


  13. 슬아맘 2020.10.13 12: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책과 나무가 연관성이 있었는데 이 글을 읽기전에는
    놓치고 있었네요.
    오늘은 길가에 가로수에게도 감사 인사를 해야 겠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