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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9.04.11 내 인생 최고의 행운 (17)

살면서 만난 가장 큰 행운이 무엇이냐고 누가 묻는다면, 나는 ‘어려서 도서관을 만난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도서관을 즐겨 찾은 덕에 독서라는 귀한 취미를 얻었다. 방송사 피디로 22년을 일하면서 선배들이 이른 나이에 회사를 떠나거나 세상을 떠나는 경우를 많이 봤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은 술 때문에 건강을 잃고, 색을 밝히는 사람은 그릇된 욕망 때문에 명예를 잃고, 도박을 좋아하는 사람은 도박 때문에 평생의 직업을 잃었다. 오래오래 즐겁게 일하기 위해 주색잡기를 멀리해야겠다고 느꼈고, 마흔이 된 어느 날 술 담배 커피를 끊었다. 커피까지 끊은 이유는, 그냥 술 담배를 안 한다고 하면 그래도 술 한 잔은 괜찮지 않느냐며 슬쩍 권하는 사람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저는 술 담배 커피를 하지 않습니다. 알코올이나 니코틴, 카페인의 도움을 받아야할 이유가 뭐 있습니까. 책만 펼쳐도 눈앞에 황홀경이 펼쳐지는데.”

이렇게 말하면, 다들 미친 사람 취급하며 그냥 혼자 내버려둔다. 활자 중독 덕분에 즐겁게 산다. 퇴근 후 남들 술 마실 때 나는 집에 가서 책을 읽고, 주말에 남들 골프 칠 때 나는 동네 도서관에 가서 글을 쓴다. 매년 한 권씩 책을 낸 덕분에 지금은 PD 월급에 더해 작가 인세까지 번다. 

퇴직 후, 전업 작가가 되어 책을 내고 강연을 다니는 게 꿈이다. 노후 대비를 한다고 자영업을 알아보거나 자격증을 따는 사람도 있는데, 도서관에서 노후대비를 하면 돈 들 일이 없다.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며 돈을 벌 수 있다. 독서라는 취미 덕분에 얻은 특기가 두 가지 있다. 바로 영어와 글쓰기다. 책 읽는 취미 덕에, 통역사니, 드라마 피디니, 작가니, 숱한 직업을 얻었으니 도서관을 만난 게 내 인생 최고의 행운이라고 말할 수밖에. 

어쩌다 내게 이렇게 큰 복이 굴러들어온 걸까?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부부 교사셨다. 당시엔 맞벌이가 드물어, 어머니는 혼자서 집을 보는 내가 안쓰러워 학교 도서실에서 책을 빌려 주셨다. 당시 시골 학교에서는 국어 교사가 사서 겸임을 했다. 어머니가 빌려다 주는 책도 좋지만, 역시 독서의 즐거움은 읽고 싶은 책을 직접 고르는 것이다. 

가끔 주말에 어머니가 일직 근무를 가셨다. 70년대에는 남자 선생님이 숙직을, 여자 선생님이 일직을 하며 방과 후에도 학교를 지켰다. 일요일에 일직 근무하는 어머니를 따라 학교에 갔다. 텅 빈 학교를 돌아다니며 노는 것도 금세 질렸는데,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도서실의 문을 따주셨다. 아무도 없는 학교 도서실은 보물창고였다. 평소 어머니가 빌려오시는 책은 위인전이나 서양고전이었는데, 도서실에는 만화 잡지나 한국 단편 소설도 있더라. 일요일 하루 종일 텅 빈 도서실에서 뒹굴며 책을 읽은 게 유년의 즐거운 추억이다.

중학교에 올라가니, 동네에 구립 도서관이 새로 생겼다. 옛날 도서관은 폐가식이라 열람기호나 책제목을 찾아서 도서 청구서에 써서 내밀고 책을 받는 식이었는데, 새로 생긴 도서관은 개가식이라 서가마다 빼곡히 꽂힌 책을 마음껏 찾아보고 그 자리에서 읽을 수도 있었다. 사춘기 시절 아버지와 사이가 나빠 집에 있는 게 고역이었다. 그때 도서관은 내게 최고의 아지트였다. 공부하러 도서관에 간다고 하고 나와서는, 열람실 책상에 가방을 놔두고 종합자료실 서가 사이에 숨어 책을 읽었다.

아버지랑 맞지 않아 괴로워하는 내게, 하루는 어머니가 이렇게 말씀하셨다. 

“생물학적 아버지는 타고 나는 것이라 어쩔 수 없지만, 정신적 아버지는 내가 노력해서 찾아낼 수 있단다. 도서관에 있는 그 수많은 책에서 네가 진심으로 존경하고 좋아하는 사람을 찾는다면, 그 사람이 진짜 아버지라 생각하고 살아보렴.”

그렇다고 도서관에 가서 위인전만 읽은 건 아니다. <태백산맥>도 읽고 <사조영웅전>도 읽었는데, 당시 대하소설이나 무협지에는 야한 장면이 많아 좋았다. 요즘은 도서관에 저자 강연을 다닌다. 질의응답 시간에 “아이들에게 좋은 책을 권하려면 어떻게 하느냐”고 묻는 부모님이 있는데, 그럴 때 나는 아이가 어떤 책을 읽든 참견하지 마시라고 권한다. 누가 읽으라고 시키면 독서도 숙제가 된다. 그냥 본인이 좋아서 읽는 책이라면 어떤 책이든 좋다. 나의 경우, 어려서 무협지에서 야한 대목을 찾아 빠르게 책장을 넘기는 버릇을 들인 덕에 속독하는 습관을 얻었다. 그 덕에 지금은 1년에 200권을 넘게 읽는 다독가가 되었고. 

(그 시절, 울산남부시립도서관에서 받은 다독상)


나쁜 일이라고 다 나쁜 것도 아니고, 좋은 것이라고 다 좋은 것도 아니다. 나는 어른들이 권해주는 ** 논술 필독서, 서울대 추천 ** 인문고전 100선, 이런 책을 좋아하지 않는다. 독서가 익숙한 내가 봐도 재미없는 책을 보고 아이들이 스스로 책을 읽는 취미를 기른다고? 그럴 리가!

재미난 게 너무 많은 세상이다. 스마트폰 하나만 해도 그 안에 게임도 있고, 만화도 있고, 영화도 있고, TV도 있다. 나는 스마트폰보다 책이 더 좋다. 스마트폰 들여다본다고 똑똑해지는 것 같지는 않은데, 책을 읽고 있으면 왠지 내가 더 훌륭한 어른이 되는 것 같다. 아마 착각일 게다. 수십 년을 책을 읽었지만 여전히 나는 대단한 사람이 못 되었으니까. 그래도 지하철에서 책에 코를 박고 있으면 왠지 있어 보인다는 착각이 든다. 초라한 내 외모에, 후줄근한 내 옷차림에 폼 날게 하나도 없다. 하지만 내 손에 든 책은 나의 가치를 높여줄 것이다. 

어른이 되고 나니, 책읽기가 재미있어 죽겠다. 누구도 내게 이런 책 읽어라, 저런 책 읽어라 잔소리를 하지 않는다. 그냥 도서관에 가서 그 많은 책 중에서 읽고 싶은 책을 마냥 읽는다. 책을 읽는 게 이렇게 재미있는데, 심지어 그 와중에 공부도 되고, 돈벌이의 기회도 있다. 이렇게 좋은 책을 누가 읽지 말라고 할까 나는 더 걱정이다. 

내 인생 최고의 행운이 도서관이니, 내가 아이에게 물려주고 싶은 것도 도서관에 가는 습관이다. 그래서 방학이면 아이 학원 보내는 대신 손잡고 같이 도서관에 다닌다. 도서관은 돈도 안 들고, 심지어 아이에게 책 읽는 기쁨을 선물해줄 수 있다. 

얼마 전 아이가 그러더라. 

“아빠, 나는 세상에서 디즈니랜드 다음으로 재미있는 곳이 도서관이야.”

다행이다, 내가 만난 인생 최고의 행운을 아이에게 전해줄 수 있어서.


***<동네 책방 동네 도서관>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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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민식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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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꿈트리숲 2019.04.11 06: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크~~~아!!!
    오늘 글 너무 재밌어요. 감탄, 감탄입니다.
    특히나 상장에 적힌 올림푸스 아파트!!!
    중학생 시절 등하교때 매일 보는
    아파트였는데, 넘 정겹네요.ㅎㅎ

    피디님 어머니의 현명하신 말씀, 저런 멋진
    말씀을 하실 수 있는 분은 얼마나 내공이 깊으실까
    가늠이 안돼요. 저도 딸에게 저런 명언을 남길 수
    있을까 생각해봅니다.^^

    도서관이 디즈니랜드 다음으로 재밌는 곳이라니
    따님의 다독 내공이 깊어지는 소리가 들려요.ㅎㅎ
    제 인생 최고의 행운 탑5, 그 중 하나가
    공짜로 즐기는 세상입니다. 공짜로 즐기는 행운을
    저도 아이에게 물려주고 싶어요.~~^^

  2. 루시아 2019.04.11 09: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내 인생 최고의 행운은 무엇일까 생각해봤습니다. ^^
    지금이라도 책을 읽고 도서관 가는 즐거움에 빠져있으니 다행이고 행운임에 틀림없네요. 좋은 책들을 읽고 감동받고 깨달으면서 나 자신이 조금씩 성장하는 기쁨은 최고입니다~

  3. 김주이 2019.04.11 09:3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내 손에 든 책은 나의 가치를 높여줄 것이다.
    오늘 또 좋은 말씀 새겨갑니다.
    온 가족이 독서가 행복한 습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도 제 손에 책을 놓지 않고 저의 가치를 높여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4. 아솔 2019.04.11 09:4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너무 감동적인 글입니다~

  5. 섭섭이짱 2019.04.11 09: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세요.

    헉~~ 속독법을 저렇게 터득하시다니 ...
    속독법을 책을 통해 배우려고 했던 사람으로써
    감탄이 ㅋㅋㅋ

    제 인생 최고의 행운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뭐니뭐니해도 김민식피디님을 만난게 아닐까하네요.

    그래서 많은분들이 저처럼 피디님을
    직접 만날 행운을 얻기바라며..
    피디님 강연 일정 공유해봅니다.

    4.17(수) 14:00 (경남 한국남동발전 대강당)
    4.20(토) 14:00 (창원 경남대표도서관 대강당)
    4.25(목) 10:00 (안양 동안평생교육센터)
    4.27(토) 10:00 (부천 꿈빛도서관)
    5.21(화) 10:00 (서울 구로구청 본관 대강당)
    6.12(수) 19:00 (안산 중앙도서관)

    참고로 강연 신청 방법과 자세한 내용은
    미리 확인하시고 가세요.
    아마 검색해보시면 담당 기관 연락처가 있을거에요


    • 투썬플레이스 2019.04.11 11:53  댓글주소  수정/삭제

      정보 감사합니다~~ 이렇게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주시니 정말 좋네요^^

    • 은하수 2019.04.11 18:55  댓글주소  수정/삭제

      와~ PD님 강의일정 궁금해하시는 분들 정말 많을텐데 감사합니다^^

  6. cellbijou 2019.04.11 10:2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는 술 담배 커피를 하지 않습니다. 알코올이나 니코틴, 카페인의 도움을 받아야할 이유가 뭐 있습니까. 책만 펼쳐도 눈앞에 황홀경이 펼쳐지는데.” 인상적이네요! 저도 어렸을 때 독서기록장을 빼곡히 채워 상장을 받았던 기억이 났어요!ㅋㅋㅋ ㅎㅎㅎ 책이란 방향과 가치를 찾는 계기로도 위로와 감동을 얻는 일로도 꼭 필요한것같아요~ 나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책을 쉬지 않고 읽어야겠어요!

  7. 투썬플레이스 2019.04.11 11: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 요즘 책읽기가 미치도록 재밌습니다^^

    혼자 책읽으면서 감탄하는 구절이 있으면 '크으~' 하고 감탄사를 연발합니다.

    어머님께서 하신 말씀이 맘에 남네요. 저도 작가님 어머님처럼 아이들에게 다른 길과 다른 시야를 보여주는 사람이 되겠습니다>_<

  8. 아리아리짱 2019.04.11 14:3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김민식pd님 아리아리!
    저도 인생 최고의 행운 7 안에 <공짜로즐기는세상>있어요! 읽고. 쓰고, 배우면서 걷기 까지!
    공즐세 학당 쭉~ 가는것입니다.^^

  9. 최수정 2019.04.11 17:3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피디님 강연이 전국적으로 엄청 많으세요. 인기강사는 다르긴 다르네요 ㅎㅎ 시간이 되면 강연 참석해서 듣고 싶은데 수도권쪽은 거의 평일이 많네요 ㅠㅠ 아쉬워라.
    저도 올해는 책을 많이 접할수 있는 기회를 만들려고 노력해야 겠어요 ~ ^^

  10. 은하수 2019.04.11 18: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PD님 글은 술술 이해가 쏙 되게 읽히면서도 알짜배기 내용들로 가득합니다.
    PD님이 선생님이나 교수님을 하셔도 참 잘하셨겠지만 PD나 작가를 통해 더 많은 사람들이 PD님을 만날 수 있으니 행운입니다. 저부터요~!

  11. 오달자 2019.04.11 19:1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내 인생의 최고의 행운이라~~~
    피디님처럼 과감히 도서관을 만난것!
    이라고 자신있게 대답할 수는 없지만~
    가장 최근에 있어서 행운이라고 생각되는건 당근 공즐세 블로그를 알게 된거라고 감히 말할 수 있어요!

    이미 엄마 말이 먹히지 않는 사춘기딸들이지만~~지금부터라도 아이에게 워너원 다음으로 재밌는 곳이 도서관이라는걸 알게 해 주고 싶네요~~^^

  12. 혜린 2019.04.11 22:1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 역시 같은 생각입니다 쉽지는 않지만 하루하루 조금씩이라도 읽고 생각하며 살고 싶습니다 그러던 중에 김피디님을 알게된 것은 저의 또다른 행운이지요!^^

  13. 옥포동 몽실언니 2019.04.12 02:4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멋진 글입니다! 저는 즐거움을 위한 독서를 손에서 놓은지 너무 오래 되었는데 피디님 글들과 북리뷰를 읽으며 책을 읽고 싶다는 마음이 마구 마구 솟구치고 책을 좋아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도 많이 떠올라요. 좋은 글 항상 감사합니다!!

  14. 보리랑 2019.04.12 03: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피디님은 자신이 백조인지 잘 모르시네요. 그것도 이미 변성한 지성과 지혜를 겸비한 백조요. 아무리 사랑하는 사모님 말씀이라도 이것만도 신봉하지 마시옵소서. 외모비하는 개그 때나 쓰시는 거예요. 또 잔소리 죄송합니당~

    인재의 조건중 두가지가 책읽고 글쓰기, 외국어라 하는데, 피디님은 차고 넘치는 인생2막 인재이십니다.

  15. 샘이깊은물 2019.04.12 16:2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네, 읽고 싶은 책을 직접 고르는 것이 책 읽는 맛이지요.^^ 스스로 숲을 헤매고 시행착오를 거치며 책이라는 벗과 친해질 수 있는 것 같아요. 아이의 그 과정을 존중해주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