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난 소설을 한 권 읽고 있다. 정아은의 '잠실동 사람들'. 그 중, 과외 교사 김승필이 지환이 엄마 박수정에게, 아이가 영어에 흥미를 갖는 법에 대해 얘기하는 대목이 있다. 영어 스쿨에서 공유하고 싶은 내용이라 옮겨본다.

 

"아이들은, 아니 아이들뿐만 아니라 성인도 마찬가지겠죠, 사람은 일단 재미있다고 느끼면 그다음부터는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하기 마련입니다. 저는 지환이와 수업할 때 지환이가 '공부한다'고 느끼기보다는 저와 '논다'고 느끼게 하는 데 중점을 둡니다. 한국말로 뜻을 설명하라? 그런 거 안 시킵니다. 단어 외워라? 그런 것도 안 시키죠. 오로지 듣고 따라 하기만, 그것도 게임을 하면서 저절로 하게 합니다. 마지막 단계에서는 섀도잉, 그러니까 들으면서 동시에 따라 하기를 시키죠. 그렇게 하다 보면 해석이랑 스피킹은 저절로 다 해결됩니다."

 

잘 쓴 소설은 이렇게 사람을 감탄하게 한다. 과외 교사가 아이 엄마에게 점수 따려고 하는 말인데 영어 학습법의 이치로 보아도 딱딱 들어맞는다. '소설가가 어떻게 이렇게 영어 학습법에 대해 잘 알지?' 신기해서 작가의 프로필을 봤더니 영어영문과 나와서 외국계 회사에서 통번역 일을 했다. 어쩐지... ^^ (참고로 경향신문 2015 올해의 책에 선정된 걸 보고 읽기 시작한 책이다. 정말 재미있다, 강추! 요즘은 영어 잘 하는 사람이 소설도 잘 쓰는 세상... 참. ^^)

나 역시 외국어 학습법 중에서 섀도잉을 자주 활용한다. 발음 때문에 애를 먹었던 중국어 공부 당시 섀도잉을 자주 했다. MP3 파일을 틀어놓고 주야장천 따라하기만 해도 발음이 무척 좋아진다. 섀도잉이 반복되면 암송으로 이어진다. 문장 암기가 힘들다면 섀도잉이라도 해보자.

섀도잉하기 가장 좋은 시간은 운전할 때다. 예전에 분당에서 일산으로 출퇴근할 때, (가혹한 통근...ㅠㅠ) 매일 3,4시간을 길에 버리는 게 너무 아까웠다. 그러다 차가 막히기라도 하면! 그래서 운전할 때, 영어 팟캐스트나 오디오북을 들었다. 그것도 지겨우면 새로운 언어를 공부한다. 책을 보고 암송한 기초 회화 mp3를 틀어놓고 큰 소리로 따라하는 거다. 차 안에서 섀도잉을 하면, 주위 사람 눈치 안 보고 마음껏 회화를 연습할 수 있다.

요즘은 더이상 운전을 하지 않는다. 전철에서 책 읽는 것을 더 좋아한다. (여전히 왕복 3시간이 넘는 가혹한 통근... ㅠㅠ) 하루 3시간씩 전철을 타면, 출퇴근 시간만 읽어도 이틀이면 책 한 권을 읽는다.  전철역에 내려 회사까지 거리가 상당하다. 6호선 디지털 미디어 시티 역에 디지털 미디어 시티가 없다. 내려서 버스로 3정거장 가야 DMC가 나온다. (붕어빵에는 붕어가 없고, DMC역에는 DMC가 없고, 국민행복시대에는..... 쿨럭!) 나는 역에 내리면 운동 삼아 걸어서 회사로 오는데, 그럴 때도 섀도잉을 연습한다. 블루투스를 귀에 꽂고 중국인 바이어와 통화하는 척 큰 소리로 떠들면서 온다. '책상 위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책이 한 권 있습니다.' '무슨 책입니까?' '영어책입니다.' 중국어를 아는 사람이라면 듣고, 웬 미친 사람이? 할 거다. ^^

나보다 상태가 더 심각하셨던 분이 계시다. 나의 통역대학원 입시반 스승이신 한민근 선생님이다. 선생은 1970년대 말 영어를 독학으로 공부하셨는데, 당시엔 워크맨이나 MP3플레이어가 나오기 전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생긴 카세트 플레이어를 어깨에 메고 다니며 섀도잉을 연습하셨다.

선생님도 책을 읽을 수 없는 버스 통학 시간이 아까워 그 시간에 섀도잉을 하셨다. 그래서 카세트 플레이어를 어깨에 메고 다니며 걸을 때나 버스를 기다릴 때 회화 테이프를 틀어놓고 중얼중얼 하셨단다. 동네 사람들은 선생님이 공부하다 미친 사람인줄 알았단다. 선생님에 대한 오해가 풀린 건 TV 덕분이다. 1984년 미국 대선에서 레이건과 몬데일이 TV 토론회를 벌였는데, 당시 한국에서 최초로 미 대선 후보 토론회를 생중계했다. 그리고 한민근 선생님이 동시통역하는 모습이 전파를 탔는데, TV에 나온 선생을 보고 동네 사람들은 오해를 풀었다. '저 사람이 미친 사람이 아니라, 동시 통역사라는 사람이었구나.' (동시통역사라는 직업이 최초로 알려진 계기였다.)

선생은 정작 동시통역사 활동을 오래 하시지는 못했다. 귀 가까이에 카세트 스피커를 갖다대고 영어 청취를 훈련하는 바람에 청력이 나빠졌다. 동시통역사에게 청력은 생명과 같은 것이라, 선생은 결국 통역사를 그만두고 학원 입시반 강사가 되셨다. 그 덕에 나도 선생님을 만나 통대 준비를 할 수 있었다. (내가 선생님을 만나게 된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또. ^^)

나는 지금도 한민근 선생님을 내 인생의 큰 스승으로 생각한다. 사실 선생님은 잘나가는 스타 강사는 아니었다. 선생의 공부가 그러했듯, 학원 강의에도 요령이 없었다. 선생은 그저 우직하게, 성실하게 열심히 공부할 것만을 주문했다. 요즘 토익 출제 경향을 쪽집게 도사처럼 알려준다는 강사들이 뜨는데, 선생은 단기간에 시험 성적을 올려주는 요령은 없다고 잘라 말했다. '시험만 잘 봐서, 통역사가 되면 뭐하나요. 실력이 없으면, 먹고 살 수가 없는데.' 이게 선생님의 지론이었다. 그러니 단기 속성으로 시험 잘보는 요령을 배우려는 학생은 금세 떨어져 나갔다. 더 많은 학생을 받으려면 요령도 좀 가르쳐주시면 좋으련만, 선생님은 공부도 강의도 요령을 피우지 않으셨다.

   
선생님에 대해서는 아래 기사를 읽어보시라. 고아원에서 생활한 선생님이 26살까지는 영어의 기초도 몰랐다가 오로지 독학으로 통대에 들어간 이야기가 나온다. 내가 영어 조기교육이 필요없다고 얘기하는 것도 선생님의 영향이다.


30대 중반에 동시통역 공부 시작해
인기 통역강사 된 한민근 씨
 


 

 

20년째 통역대학원 입시 강의를 하고 있는 한민근 씨. 사람들은 그가 외국 한번 안 갔다왔다고 말하면 “그런데 어떻게 영어를 잘하냐?”고 반문한다. 고아원에서 자라며 모진 가난을 이기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던 그는 공부는 돈 들여야 잘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평일 낮 오후 서울 종로 시사영어사 303호 강의실. 강의실 주인인 한민근(58) 씨는 교재에 뭔가 열심히 적는 학생에게 “주석도 영어로 달아야 실력이 는다”고 한 수 지도한다. 동시통역 강의만 20년째인 베테랑 강사 한민근 씨. 영어학원에 처음으로 동시통역대학원 입시반을 만들어 수백, 수천 명의 학생을 지도하는 그 역시 한때는 잘나가던 동시통역사였다.  

올림픽 준비로 온 나라가 떠들썩하던 84년 한국외국어대 통역대학원을 졸업해 공화당 레이건과 민주당 몬데일 대통령 후보의 토론회 방송부터 각종 국제회의며 기업 세미나, 대학의 학술 토론회까지 그의 무대는 넓었다. 요즘은 그가 가르친 제자들이 텔레비전에 종종 얼굴을 비친다. 얼마 전엔 문법부터 회화까지 한 번에 마스터하는 방법을 다룬 '한민근 잉글리시(한국번역출판사)'라는 책도 냈다.  

“외국인들이 저의 통역을 듣고 나면 어디에서 공부했냐고 물어봐요. 한국에서만 쭉 공부했다고 하면 도대체 비결이 뭐냐고 또 묻죠. 영어 잘하는 비결은 한 가지예요. 열심히 하는 거고 요령 부리지 않는 것, 그러면 영어 실력은 당연히 늘게 되어 있어요.”
 

고아원에서 어머니와 함께 생활했던 어린 시절 

“6·25 전쟁이 한창이던 6살 때 부산에서 아버지가 미군 총에 맞아 돌아가셨어요. 살림만 하셨던 어머니는 두 아들 데리고 살아가기 위해 아는 분 도움으로 고아원에 일자리를 얻었고 그때부터 저희 가족은 고아원에서 생활했어요.”

사춘기를 지나서도 집안 사정이 크게 좋아지지 않았지만 어머니의 교육열 덕분에 부산 동아대 건축학과에 들어갔다가 지금의 대구대학교인 사회사업대학에 편입했다. 그러나 어머니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인해 학비를 댈 길이 묘연해 휴학과 복학을 반복하다가 11년 만인 31세에 졸업했다. 사회복지사로 취직은 했지만 그는 좀더 벌이가 좋은 직장을 원했다. 그래서 무역영어 시험을 치르고 무역 회사에 취직했다. 월급은 전보다 두 배는 많았다. 이후 종교서적 출판사에서 번역사로 4년간 일하며 통역대학원을 알게 되었고 30대 중반 나이에 대학원 준비를 했다. 그러나 무역 영어와 번역 일을 하며 영어 실력을 쌓았다고는 해도 외국에서 살다온 사람도 붙기 힘들다는 통역대학원에 들어가겠다고 했을 때 주위에선 모두 불가능하다고 못박았다.

 “3개월 동안 외국인 회화학원 다니면서 공부했어요. 나머지 시간에는 열심히 단어 공부하고요. 합격했죠. 아내는 저더러 '당신 천재 아니냐'는 말까지 하더군요.” 

그는 3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13시간씩 공부했다. 한번 자리에 앉으면 엉덩이 한번 들썩거리지 않았고, 밥을 먹으면서도 길을 걸으면서도 끊임없이 영어 공부에 매달렸다. 졸업할 때 그는 당당히 전체 3등의 성적을 거두었다.  

“외국에서 살다온 친구들은 영어는 잘해도 한국말을 못해서 중도에 포기하곤 해요. 단순히 영어만 잘해선 통역을 할 수 없어요. 회화 실력만 뛰어나도 안 되죠. 국제회의 영어는 단어나 구조가 일반 회화와는 달라 문법을 모르고선 이해할 수가 없죠.”

80년대 당시 통역 한번 나가면 하루에 25만 원 정도를 벌었다. 그러나 매일 일거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학원에 통역입시 준비반 강의를 개설하고 강사 생활을 병행하면서 그는 전문 강사가 되었다. 그는 열심히 노력하는 학생들을 볼 때 가장 흐뭇하다. 그런데 요즘은 어찌 된 일인지 최선을 다해 공부하려는 이보다는 최선을 다해 요령을 터득하려는 학생들이 더 많다고 한다.

“찍는 연습해서 토익 시험 보고, 한 달 두 달 반짝 공부해 영어 회화만 능숙하게 하려는 것 같아요. 겉보기엔 실력이 는 것 같지만 요즘 대학생들의 영어 실력은 오히려 저희 때만 못하다고 생각해요.” 

'밥 먹었니' '오늘 날씨 어때?' 같은 평범한 대화는 외국인처럼 유창하게 하지만 학생들은 영자지 신문 사설 하나도 읽고 제대로 이해를 못한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대충 뜻만 이해하면 되지 않느냐”는 거다.

“외국인들과 잡담만 하려고 엄청난 사교육비 들여가며 공부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우리나라 영어 교육이 문법 위주여서 회화를 못한다는 말이 돌면서 다들 문법은 제쳐두고 회화에만 신경을 쓴 탓이죠. 하지만 문법을 모르곤 외국 전문 서적이나 학술 세미나 내용을 이해하는 것은 물론 그 자리에 설 수도 없어요.” 

영어 잘하기 위해 떠나는 조기 연수니 유학이니 따위가 못 미덥다는 그는 자식 둔 어머니들 만나면 자녀 교육에 돈 들이는 것보다는 잘하려는 의지를 심어주는 것이 우선이라는 충고를 하곤 한다. 다른 비결을 더 물어온다면 문법을 소홀히 하지 말란 말도 한다. 쉽게 배운 영어는 어려운 자리에서 통하지 않는다고. 요즘도 많은 이들이 동시통역사가 되기 위해 무던히 애를 쓰지만 열에 아홉 요령부리는 학생은 일찌감치 공부를 포기한다. 의지박약은 돈으로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이 그가 예순 가까이 살며 느낀 삶의 지혜이다.  

글 이선정 사진 이진한 기자
http://www.ldskorea.net/Han-mingeun-2003-8-001.htm

 

 

 

*검색해보니 칠순을 바라보시는 선생님은 요즘도 학원에서 강의를 하신다. 방학 동안 빡세게 영어 공부해보실 분은 참고해보시길.

 http://www.testwise.co.kr/academy/search_teacher.php

(가나다 순인지라 선생님은 제일 끝에 나온다.)

본인의 영어가 수준급이라고 생각한다면, 꼭 한번 수강해보시라. 새로운 영어세계가 열릴 것이다. 직장인이던 내가 선생님을 만나게 된 사연은 다음 시간에... 

 

끝으로 섀도잉이 좋은 이유, 일상의 모든 순간이 즐거운(?) 외국어 학습 시간으로 바뀐다. 나는 등산 갈 때, 사람들이 없는 구간을 만나면 핸드폰을 틀어 섀도잉을 한다. 맑은 공기 맡으며 산 속에서 떠드는 중국어 초급 회화, 재미지다. 집에서 설거지를 할 때도 자주 섀도잉을 한다. 그릇 달그락 거리는 소리에 음악을 듣기 뭐한데, 그럴 때 섀도잉이라면 문제없다. 이미 수십번을 반복해서 들은 회화문장이라 언뜻언뜻 들려도 다 따라갈 수 있다. 설겆이하면서 하는 섀도잉은 아이들 보라고 하는 일종의 쇼다.^^ '봐라, 아빠는 이렇게 중국어 공부한단다. 니들도 커서 이렇게 공부하면 돼. 괜히 조기 유학 보내 달라고 하지 마.' 

내가 세상을 떠나면 아이들은 나를 어떻게 기억해줄까? 드라마 감독으로? 예능 피디로? 그런거 다 필요없다. 나는 민지가 나를 이렇게 기억해주길 바란다.

"우리 아빠요? 세계일주 여행자였어요. 독학으로 5개 외국어를 마스터해서 전세계를 누비고 다니셨죠.  지금도 설겆이하면서 중국어 회화를 따라하던 아버지 뒷모습이 눈에 선해요."

 

작년 여름 아이들과 함께 간 몽골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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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민식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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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천민우 2015.12.31 08: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반성하겠습니다. 그리고 꾸준히 노력할게요.
    피디님이 짚어주신 책 다외우기 전엔 다른 책을 사며 위안감을 갖고, 인강 결제하고 학원 등록하며 마치 실력향상 한거 마냥... 그러지 않겠습니다. 우직하게 하루에 조금씩이 됐든지간에 꾸준히 하겠습니다. 저는 영어가 목표가 아니라 도구가 되어야 하는 게 꿈이길 원합니다.

    까무잡잡한 외국인 선원들이 짧은 영어지만 자신의 의사표명을 위한 노력을 보고 느낀 그 충격을 잊지 않겠습니다.
    지난 여름 영어가 안되서 겪었던 라이언에어 직원과의 줄 다리기를 잊지 말자고 그렇게 다짐했건만 현실에 매몰되어 잊을뻔하고... 있었습니다.
    반성하겠습니다. 그리고... 책상에 앉겠습니다.
    오늘도 고맙습니다. 저는 아직 나이가 어려 자극을 받아야하나봅니다. 그리고 밑의 글에 댓글을 쓰다 말았는데요ㅎ 제 라이벌은 전 여자친구입니다. 유창한 영어나 스페인어 실력과 일본어가 가능한 그녀 이상이 되려면... 일분 일초도 아껴야되는데... 아 정신이 확 깨네요.
    12월의 마지막날입니다.
    내년부터 시작이 아니라 저는 지금부터 해야겠습니다. ^^

    • 김민식pd 2016.01.02 05:5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멋진 여자친구였군요. 새해엔 더 멋진 사람을 만날거예요. 아니, 더 멋진 분이 되실 거예요. 건투를 빕니다. 즐겁게 도전하시길.

  2. 2016.02.18 17: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3. 이건무 2016.04.15 19: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감사합니다.^^

  4. 2016.05.11 23: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