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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짜 영어 스쿨

영어공부는 꽝없는 로또

by 김민식pd 2015. 11. 16.
20년전 통역대학원 다닐 때 일이다. 사촌누나가 어느날 전화를 했다. 같이 성당에 다니는 어떤 아주머니가 있는데, 우연히 내 얘기를 듣고는 자신의 딸을 한번 소개해달라고 했단다. 소개팅을 사양하는 법은 없으니 그러겠다고 했다. 그런데 저쪽 집안 조건이 조금 까다로운지 사주팔자를 보게 생년월일을 달라는 거다. 아직 만나지도 않았는데 벌써 궁합까지 보나? 생일을 알려준 후, 얼마후 그 아가씨를 만났다. 느낌은 뭐, 그냥 그냥. ^^ 예의상 연락처를 받고 헤어졌다. 누나한테 전화가 왔다. 그 아가씨 또 안 만나냐고. 상대편 집에서 나를 무척 마음에 들어하니 꼭 전화를 해보라고 했다. 그 아가씨는 내가 별로인듯 했는데?

한달이 지나고 누나한테 다시 연락이 왔다. 전화 해봤냐고. 바빠서 못 했다고 했다. 그랬더니 그 집에서 딸 방에 전화를 새로 넣었단다. 집으로 전화하면 어른이 받을까봐 불편하면 그냥 딸 방에 있는 전화로 직접 하면 된다고 번호까지 알려주더라. 옛날에는 휴대폰이 없던 시절이라 집 전화로 전화했다가 엄격한 아버지한테 걸리면 난감할 때가 많았다. "누구라고?" "우리 딸은 왜 찾는데?" 불편해서 전화 안 한거 아닌데... 만나고 싶은 사람은 죽자하고 쫓아다니는 나인데... ^^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고 사는 것이 내 인생에 대한 예의가 아니듯이, 마음에 없는 상대를 만나는 것도 예의가 아니다. 내 인생에 대해서도, 상대에 대해서도.

얼마 후, 다시 누나에게 전화가 왔다. 그 집에서 조건을 걸었단다. 그집 딸과 결혼해주면 10억을 주겠다고. 엥? 이건 또 뭐지? 1995년 당시로 10억이면 꽤 큰 돈이었다. 알고보니 그 집이 강남에 큰 건물이 하나 있는 부자란다. 당시 시세로 재산이 50억 정도 있는데, 아들 하나 딸 하나란다. 딸한테 못해도 10억은 물려주지 않겠냐고. 딸이 소원이 미국으로 유학 가는 거란다. 그 시절에는 유학이 흔치도 않았고 기회도 많이 없었다. 영어를 못하는 딸 혼자 보내 고생시키기 싫어서 붙잡고 있었는데 내 얘기를 들은 거다.

서울에 처음 올라와서 사촌누나 집에서 얹혀살았다. 그 시절 나를 지켜본 누나인지라 내가 대학 시절 얼마나 열심히 영어 공부를 했는지 잘 안다. 국내에서 독학으로 영어해서 외대 통역대학원에 들어간 동생이 있다고 자랑을 한 거다. 아주머니가 그 이야기를 듣고 혹한거다. 영어 잘하는 신랑이 있으면 딸의 유학 생활도 편해지겠지. 그래서 내건 조건이, 결혼하면 같이 유학 보내는데  2억, 한국 오면 강남에 아파트 한채 사주는데 3억, (95년 시세니까, 이게 가능) 자리잡을 때까지 생활비로 5억, 이렇게 10억을 줄테니 딸과 결혼해달라는 거였다. 부모가 죽어 딸 나이 50에 유산 10억 남겨줘야 그때가서 뭐하겠냐며, 기왕이면 그 돈으로 20대 때 딸의 인생을 바꿔주고 싶다고.

처음엔 이 사람들이 사람을 돈으로 사려고 하나? 어이가 없었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10년간 쌔빠져라 공부한 영어가 10억은 된다는 얘기지?  로또보다 낫네. ^^ 웃으며 말씀은 감사하지만 아직 학생인지라 결혼 생각은 없다고 거절했다. (20대에는 돈 좋은 줄 몰랐던 게지. ^^)

그러고 몇년인가 지난 후, 사촌누나를 만났다. 누나가 나를 보더니 그 혼담의 뒷 이야기를 해주더라.

그 사모님이 강남 부자들 사이에서 유명한 역술인을 찾아갔단다. '이건 남자 사주고, 이건 여자 사주니 궁합 좀 봐주세요.' 했단다. 그랬더니 역술인이 한참 들여다보더니 하는 말.
"어느 집에서 오셨습니까? 남자쪽입니까, 여자쪽입니까?" 
"그건 왜요?"
"그걸 알아야 할 것 같은데."
"그냥 솔직하게 얘기해주세요. 어떤가요?"

역술인 왈, '남자 집에서 오셨으면 이 결혼 절대 시키지 말고, 여자 집에서 오셨으면 무조건 잡아야합니다. 남자 사주가 진짜 좋은 사주입니다. 하고 싶은 건 다 하고 사는 팔자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건 이 여자 사주에요. 이 여자 팔자에는 이런 남자 만날 복이 없어요. 사주만 봐서는 둘이 인연이 없는데......  아마 결혼까지는 못갈 겁니다.'
사모님이 약이 올랐다.
'이 남자를 잡으려면 어떻게 해야하나요?'
'인연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작용을 해야겠지요.'

그래서 아주머니가 베팅을 세게 한 거다. 딸이랑 결혼하면 10억! 이렇게.

자초지종을 듣고 나니 좀 이해가 가더라. 10억이란 돈이 왜 나왔는지. 그 점쟁이 진짜 용하네. 둘이 인연이 아닌 걸 어떻게 딱 맞췄지?

그날 이후, 나는 내 팔자가 10억짜리 팔자라고 믿고 산다. 하고 싶은 건 다 하고 사는 팔자. 살면서 매 순간 나 자신에게 물어본다. 나는 지금 이 순간, 즐기고 있는가? 아니라고 생각되면 언제든지 그만둔다. 통역사든 예능피디든. 그리고 더 재미날 것 같은 일이 보이면 일단 도전해본다.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이든 다 하고 사는 10억짜리 팔자를 믿고.

생각해보면 내 영어가 10억짜리 영어다. 첫 직장 그만 둘 때도, 통역사 그만 둘때도 믿는 구석은 영어였다. 즐겁지 않은 전공을 포기할 수 있는 용기, 새로운 직업을 찾아나서는 용기,  모두 영어 덕분에 얻은 것이다.

영어 공부는 꽝없는 로또다. 공부는 공들인만큼 반드시 이루고, 이루지못해도 잃은 건 없다. 젊어서 무엇 하나에 미쳐볼 수 있다면, 그 과정을 즐길 수 있다면, 그 자체로 보람이니까.

(ps. 어떻게 하면 영어 공부, 더 즐겁게 할 수 있을까, 에 대한 글이 이어집니다.

한달간 아르헨티나 여행중입니다. 낮에는 놀러다니고, 새벽에 일어나 글을 씁니다.
어제는 Free Walks in Buenos Aires라고 해서 영어로 진행하는 시내 공짜 투어를 했어요. 전세계에서 온 여행객 30여명 중에 아시아 사람은 저 혼자더군요.

3시간 동안 시내 곳곳을 다니며 영어로 설명을 해줍니다.아르헨티나의 역사를 듣고보니 시내관광이 훨씬 더 재미있네요.

20대에 공부해둔 영어 덕분에, 나이 50에 오늘도 저는 즐겁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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