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머는 진화의 결과

2014. 7. 8. 05:08

고등학교 때 나는 까만 얼굴에 두꺼운 입술, 170에 체중은 50킬로 남짓했다. 하필 당시 유행한 미국 드라마 뿌리의 주인공 흑인 노예와 꼭 닮은 얼굴에 체형이었다. 애들이 나만 보면 어이, 쿤타킨테! 고향에는 언제 돌아 가냐? 빨리 아프리카로 가야지.” 하고 놀려댔다. 그때마다 화를 냈더니 결국 따돌림의 대상이 되더라. 못생긴 외모와 모난 성격 탓에 왕따가 되었는데, 나중에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어차피 내 외모가 웃음의 소재라면, 앞으로는 직접 웃겨주겠어. 못생긴 내 얼굴, 놀려도 내가 놀릴 거야!’ 타고난 외모는 어쩔 수 없지만, 그걸 소재로 삼는다면 유머를 기를 수 있다. 자학 개그로 유머 감각을 갈고 닦은 덕에 코미디 피디라는 직업도 얻고, 어여쁜 아내도 얻었으니 다 가난한 외모 덕분이다.

 

장대익 교수가 쓴 빅 히스토리 : 생명은 왜 성을 진화시켰을까?’를 보면 인류가 유머감각을 발달시킨 건 진화의 산물이란다. 진화는 자연 선택과 성 선택을 통해 진행되는데, 생존에 필요한 형질을 갖추면 자연 선택에 유리하고, 번식에 유리한 형질을 갖추면 성 선택에 유리하단다. 자연 선택과 성 선택의 차이를 알려면 공작새의 꼬리를 보면 된다. 수컷 공작의 화려한 꼬리는 생존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포식자에게 눈에 띄기는 쉽고 도망가기는 어려워 잡아먹히기 딱 좋은 형질이다. 그럼에도 공작은 꼬리를 더 화려하고 크게 만드는 방향으로 진화를 거듭했다. 이는 자연 선택이 아니라 성 선택의 결과다. 비싼 꼬리에 투자하고도 생존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한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고 암컷에게 어필한 덕에 성 선택에 유리했던 것이다. 그놈의 꼬리 때문에 언제 죽을지 모르지만, 암컷의 선택만 받을 수 있다면야! , 수컷 공작은 목숨을 걸고 사랑하는구나.

 

인류가 유머를 즐기게 된 것도 성 선택을 통한 진화의 결과다. 위트는 여유로움, 창의성, 그리고 사회성의 징표다. 물질적인 풍요는 차치하고라도 적어도 정신적 여유가 있어야 위트가 가능하다. 유머는 남들이 예측하지 못한 참신한 언행이므로 창의성을 필요로 한다. 주변 사람들의 생각과 정서를 읽을 수 있어야 유머로 타인과 소통할 수 있다. 그러니 유머가 뛰어나다는 것은 여러모로 성 선택에 유리한 형질을 갖추었다는 증명이므로 진화의 결과로 발전한 것이다.

 

얼마 전 MBC 예능국 후배 하나가 오늘의 유머게시판에, 제목만 봐도 자학 개그임에 분명한 글을 하나 올렸다. 유머로 세상과 소통하겠다는 젊은 코미디 피디의 가상한 시도에 대해 회사는 징계를 내렸다. 창의성이 뛰어난 글을 이해하는 독해력도 부족하고, 어른스럽게 웃어넘길 마음의 여유도 없고, 권성민 피디의 글에 성원과 지지를 보낸 많은 사람들과 소통할 의사도 없는 것이다. 성 선택의 산물인 유머 감각은 아직 모든 인류가 누리는 진화의 혜택은 아닌가 보다. 안타깝지만 어쩌랴.

 

인사위 결과를 보고 안타까운 마음에 권성민 피디에게 전화를 했지만, 딱히 위로할 말을 찾지 못하겠더라. 난감할 땐 역시 자학 개그가 최고다.

야 임마, 너 너무한 거 아냐? 내가 2012MBC 파업 때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알아? 170일간 집회 프로그램 짜고, ‘MBC 프리덤뮤직 비디오 연출하고, ‘서늘한 간담회라고 불온 팟캐스트 방송 만들어 직접 마이크 잡고 사장이랑 임원들 까고, 내가 그렇게 열심히 해서 받은 게 정직 6개월인데, 새카만 후배 녀석이 겨우 글 하나 쓰고 나랑 똑같은 대우를 받다니, 이건 아니잖아.”

 

요즘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일이 너무나 많다. 힘들 때일수록 유머 감각을 단련시켜야 한다. 딸 둘을 얻은 40대 중년 남자로서 번식에 미련은 없다.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다. 웃을 힘조차 없다면 하루하루 버티기도 힘든 잔인한 세상이니까.

 

 

웃기는 것도 죄가 되는 시대, 버틸 수 있게 해주옵소서

 

(PD 저널, 연재 칼럼, 김민식의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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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민식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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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버크하우스 2014.07.08 05:1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보고 갑니다. 상쾌한 하루 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