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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짜로 즐기는 세상

TV에 침 바르는 아이

by 김민식pd 2013. 11. 11.

어린 시절, 우리 집 TV는 안방에 있었는데 아버지가 계실 때는 늘 시청 금지였다. 부모님이 외출하실 때는 안방을 잠그고 나가셨는데, 나는 초등학교 때 이미 잠긴 안방 문을 일자드라이버로 따는 법을 익혔다. (궁하면 통하는 법이다.) 문틈 사이로 일자 드라이버를 밀어 넣어 자물쇠의 걸개를 살살 옆으로 밀면 잠금장치가 풀렸다. 동생과 함께 몰래 TV를 보다 초인종 소리나 대문 열리는 소리가 나면 TV를 끄고 후다닥 방으로 돌아갔다. 몇 번 그러다 아버지가 무슨 눈치를 채셨는지 집에 돌아와 TV 뒤에 손을 얹어보셨다. 당시 브라운관 TV는 계속 켜두면 온도가 올라가 따뜻해졌다. 그렇게 TV 본 게 들통 나 또 호되게 맞았다.

 

다음부터는 TV를 볼 때 5분에 한 번씩 브라운관 뒤에 침을 발랐다. 액체가 기화할 때 주위 온도를 빼앗아간다는 과학 수업 내용을 응용한 것이다. 외출에서 돌아오신 아버지가 TV에 손을 얹어보았다가 뜨겁지도 차지도 않아 알쏭달쏭한 표정을 짓던 순간, 어린 마음에 얼마나 쫄았는지 모른다.

 

내가 중학생이던 1983년에 미니시리즈 V’가 방영되었다. 월요일에 학교에 갔더니 다이애나가 쥐 잡아 먹는 얘기로 온통 난리였다. 아버지에게 TV 보자고 졸랐다고 된통 야단만 맞았다. 어떻게 하면 나도 ‘V’를 볼 수 있을까? 고심 끝에 나는 집 옥상으로 올라갔다. 옥상 난간 너머로 옆집 거실에 틀어놓은 TV 화면이 보였다. 대놓고 고개를 빼고 남의 집안을 훔쳐보기 민망해서 손거울로 잠망경을 만들어 난간 아래 쭈그려 앉아 옆집 TV를 훔쳐봤다. 화면은 손톱만큼 작게 보였지만 그게 어디냐! 평소 라디오를 즐겨듣다 TV 방송 오디오가 잡히는 채널을 발견했다. 그래서 옥상에 쪼그리고 앉아 지직거리는 라디오를 귀에 대고 난간 위로 뻗은 손거울로 옆집 거실의 브이를 훔쳐보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린 시절의 강한 금지는 그만큼 강한 유혹이다. 내가 어른이 되어 TV를 즐겨보다 방송사 PD가 된 건, TV를 못 보게 한 아버지 덕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TV가 밥벌이가 되었으니 요즘 나는 어린 시절처럼 목숨 걸고 TV를 볼까? 실은 그러지 않는다. 그 재미있다는 ‘12이나 러닝맨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촬영하느라 밤새도록 모니터 들여다보는 것도 지겨운데 집에서까지 TV를 봐야한단 말인가! 쉬려고 TV를 켜 드라마나 영화를 보다보면, 나도 모르게 자꾸 일을 하는 내 모습을 발견한다. “저기서 연출은 왜 풀 샷 대신 바스트 샷을 쓴 걸까?” “엔딩 포인트를 둘의 키스신으로 잡은 작가의 계산은 무엇일까?” 쉬려고 TV 앞에 앉았다가 외려 일하고 있는 꼴이다.

 

그래서 내가 즐겨 본 방송은 스타크래프트 중계였다. 스타크래프트 중계는 무조건 게임 화면 풀 샷으로만 진행된다. 저글링 바스트 샷이나 죽어가는 메딕의 표정 타이트 샷이 필요 없는 연출이다. 그걸 보며 내가 다른 이의 연출이나 스토리 구성에 신경 쓸 이유가 없다. 정말 마음 편하게 볼 수 있는 방송이다.

 

지금 우리 집 거실에는 TV 대신 책장이 자리 잡고 있다. 아이들에게는 TV 시청을 금하고 대신 독서를 하라고 권한다. 우리 아이들도 어린 시절 나처럼 TV를 못 보고 사는데, 아마 PD란 직업을 대물림하게 될 모양이다. ^^

 

(다음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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