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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일어날 기세

by 김민식pd 2013. 11. 26.

나는 평소에 술 담배 커피를 하지 않는다. 드라마 연출하느라 잠도 못자고 시청률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것도 억울한데 심지어 음주 흡연으로 명을 재촉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명절에 처갓집에 놀러 갔다가 화투판이 벌어졌는데 한 번도 고스톱을 쳐본 적이 없다고 하자, 다들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더라. 아내가 옆에서 이 사람은 술, 담배, 고스톱 이런 거 다 안 해요.” 하고 말씀드렸더니 어르신이 그러더라. “그럼 자넨 여자를 좋아하겠군.” 처갓집 어른의 이런 농담,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어르신 말씀은 누구나 살면서 즐기는 취미가 하나쯤 있어야 한다는 뜻이리라. 우리에게 가장 보편적인 취미는 TV 시청인데, 드라마 피디로 살다보니 취미가 일이 되어버렸다. TV 앞에 앉으면 나도 모르게 일을 하고 있다. ‘저기서 왜 바스트 샷이 아니라 풀 샷을 썼을까?’ ‘엔딩을 저렇게 끝내면, 다음 이야기는 어떻게 전개하려고 그러지?’ 내 일도 버거운데 남 일까지 걱정하고 있자니 TV 보는 게 중노동이다. 그래서 한때는 TV를 틀었다하면 스타크래프트만 봤다. 온라인 게임 중계방송을 보면서 저기서 왜 저글링 바스트 샷이 안 들어가는 거지?’ ‘메딕이랑 마린이랑 러브라인은 어떻게 전개될까?’ 이런 고민을 하지는 않으니까. 드라마처럼 스토리를 따라갈 필요도 없고, 뉴스처럼 보다가 열 받을 일도 없어, 잠깐 머리 식히기엔 게임이 최고였다.

 

 

 

요즘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는 화제 중 하나는 게임 중독법이다. 지난 4월 발의된 게임중독법은 인터넷 게임과 마약, 알코올, 도박을 4대 중독 유발물질 및 행위로 분류하고, 국가중독관리위원회를 신설해 이들을 관리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법은 지난 8월 새누리당이 발표한 '정기국회 6대 실천과제 및 126개 중점법안'에 포함됐고, 황우여 대표도 정기국회 대표연설에서 이 법의 필요성을 언급했다.

 

사람들이 게임에 빠지는 이유는 현실이 힘들기 때문이다. 우리의 교육 현실은 지옥이다. 모든 아이들이 선행학습을 하는 판에 한가롭게 학교 진도만 따라가다 뒤처지기 일쑤다. 모두가 죽자고 공부하는 판에 성적의 레벨 업’, 쉽지 않다. 직장에 들어가기도 힘들고, 들어가도 비정규직이고, 여차하면 쫓겨나고, 나오면 가게 창업하다 망하기 일쑤다. 경제 양극화로 계층 간의 격차는 벌어지고 눈에 띄는 탈출구도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현실이 팍팍할 때, 유일하게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곳이 게임 속 가상현실이다. 멋진 아바타로 자신을 꾸밀 수도 있고, 친구들과 힘을 모아 어떤 난관이든 헤쳐 갈 수 있는 곳, 노력만 하면 언제나 레벨 업이 가능한 곳. 아이들이 게임에 빠지게 된 원인을 해결하기보다 부정적 결과에만 초점을 맞추는 건, 마치 PC 방 전원을 내려 게임을 날린 사람들의 반응을 보고, 온라인 게임을 하다보면 폭력성이 증가된다고 결론짓는 격이 아닌가.

 

게임은 캐릭터, 스토리, 그래픽, IT 기술 등 다양한 요소가 어우러지는 종합 문화 콘텐츠다. 창조 경제를 하겠다고 하고서는 게임 산업 규제법안이나 만들고 있으니 도대체 뭐하자는 건지 모르겠다. 세상 돌아가는 꼴을 보니, 드라마를 만드는 피디들이 시청자들의 중독성을 걱정해야 할 시국이 곧 올 것 같다. 한국 드라마도 중독성이 강한 콘텐츠라 드라마 폐인이 양산된다 하니, 이러다 자정이 되면 자동으로 TV 전원이 꺼지는 시대가 오지 않을까 걱정이다.

 

며칠 전 버스를 탔는데 옆자리 고교생들이 이런 얘기를 하더라.

, 게임 중독법 얘기 들었냐? 세금 물리면 게임비도 살벌 오르는거 아냐?”

, 그 법안 통과되면 고등학생들이 거리에 나가 제24.19라도 일으켜야 되는 거 아니냐?”

국정원을 포함한 국가기관들의 대선개입,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이 엄청난 사건이 일어났는데 세상은 너무 조용하다. 그런데 오히려 게임중독법 발의로 집권당이 여론의 역풍을 맞고 있다하니, 정말 애매하다. 이거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피디 저널 칼럼, 김민식 피디의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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