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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에도 예능감이 필요하다니!

by 김민식pd 2013. 8. 21.

 

고교 시절에 성적이 반에서 중간이었는데, 당시 서울에 있는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서는 학급 석차 5등 안에 들어야했다. 3 여름 방학 때 마음을 독하게 먹고 독서실을 끊었다. 독서실에서 숙식을 하며 서울 유학을 꿈꿨는데, 그때 해이해지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이용한 것이 잡지에서 찢어낸 어느 초콜릿 광고였다.

 

졸리거나 집중이 흐트러질 때는 독서실 책상 서랍을 열었다. 그 안에는 1980년대 후반 하이틴 모델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채시라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반드시 학력고사에서 고득점을 올려 그대를 찾아 서울로 올라가겠소.’ 채시라의 사진이 영험한 건지, 경상도 소년의 촌스런 결기가 먹힌 건지, 3학년 1학기 중간고사 때 반에서 22등을 했는데, 학력고사로는 반에서 2등을 했다. 그 덕에 서울로 올라왔지만 정작 채시라를 만나기까지는 다시 10년의 세월이 걸렸다.

 

1987년 공대생이 된 나는 영업사원과 통역사 등의 직업을 전전한 끝에 1996MBC 공채를 통해 PD가 되었다. 수습사원 시절, 드라마 제작 현장 견학을 갔다가 용인 민속촌에서 미망이라는 사극에 출연하고 있던 채시라를 만났고, 감격에 겨운 나는 10년 전 나의 짝사랑을 고백하기에 이르렀다.

 

다음날, 나는 그 일로 드라마 피디에게 불려가서 혼이 났다. 피디는 드라마 제작현장에서 모든 것을 통솔하고 지휘하는 감독인데, 신입 피디가 배우 앞에서 그런 추태를 보인 바람에 드라마 감독의 체면을 깎아놓았다는 것이었다.

 

당시 PD로 입사한 후, ‘코미디, 드라마, 다큐 중 나의 장르는 무엇일까?’ 라는 물음에 대해 답을 고민하고 있었다. 천성이 가벼워 시사 교양 피디보다는 드라마나 예능으로 마음이 기울던 차였다. 좋아하는 것이 있으면 미친 듯이 좋아하고, 또 좋아하는 마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이 내가 자랑하는 덕후의 삶인데, 드라마 PD의 권위와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느꼈다.

 

외대 통역대학원을 졸업했으니 미국 특파원도 가고, 뉴스 통역도 할 수 있는 기자가 적성에 맞지 않겠냐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수습 시절, 보도국 동기들이 사스마와리를 도는 걸 보니 뉴스도 나의 장르는 아니었다. 기자가 되고 제일 먼저 배우는 게 지위와 나이 고하를 막론하고 취재 현장에서 만나는 사람에게 절대 존댓말을 쓰지 않는 것이더라. 비굴한 성격의 나와는 역시 맞지 않는다.

 

나는 결국 코미디 전문 연출가라는 나의 장르를 찾았는데, 요즘 뉴스를 보면 왠지 그쪽도 적성이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날씨가 연일 뉴스 톱을 차지하더니 급기야 아스팔트 위에서 베이컨을 굽는 먹방보도가 나온다. 와우, 예능에서도 시도 못해본 참신한 발상! 기상천외한 자막으로 사람을 웃겨주기도 하고, ‘PC방에서 게임 중에 전원 내리기같은 뉴스도 나온다. 뉴스에도 이런 예능감이 필요하다니!

 

 

(아스팔트 위에서 베이컨을 구워 폭염을 알리는 뉴스 장면)

 

얼마전 모 방송사 보도국장이 취재차 찾아온 <미디어오늘> 담당 기자를 현주건조물 침입 및 업무방해 혐의로 고소했다는 뉴스를 접했다. 출입기자가 보도국장실을 찾아간 자리에서 국장이 어디를 들어오느냐” “경비를 부르겠다며 말했고, 곧 여직원이 들어와 기자의 양팔을 잡고 끌어냈단다. 이 뉴스를 보니 정말 애매하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아니면 무서워해야 할지. 정말 장르의 혼재가 요즘 트렌드인가 보다.

 

성역 없는 취재를 후배들에게 주문해야 할 보도국장이 정작 자신을 만나러 온 기자를 침입 및 업무방해로 고소하는 현실, 이건 코미디인가, 비극인가, 아니면 호러인가?

 

(PD 저널, 김민식 피디의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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