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항상 웃으며 산다. 내가 웃으며 사는 것이 인생이 마냥 아름답기만 해서일까? 정반대다. 내가 웃어야 한다고 결심한 건 세상이 지옥이라는 것을 배운 어린 시절의 일이다.

 

어려서 난 웃을 일이 없는 환경에서 살았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늘 싸웠다. 아버지가 손찌검을 하면 어머니는 악다구니를 쓰며 욕을 했고, 그래서 아버지의 매질이 더 심해지면, 어머니는 사람 살리라고 동네 떠나가도록 비명을 질렀다. 결국 옆집에서 파출소에 신고를 했고 여덟살의 나는 파출소에 가서 경찰 앞에서도 고래고래 소리지르며 싸우는 부모님의 옷깃을 잡아끌며 제발 집으로 가자고 사정해야 했다. 열살이 넘어가자 아버지의 폭력은 나를 향했다. 맞다가 변명이라도 하면, "너도 엄마처럼 입만 살았구나."하면서 더 맞았다. 하지만 내가 더 견디기 힘든 건 집안의 폭력이 아니라 바깥의 손가락질이었다. 나를 보는 이웃들의 눈길, 동네 아주머니들의 수근거림이 내겐 더 견디기 힘든 폭력이었다. 나를 위로하는 동네 어른들의 말 한마디에도 난 상처를 받았으니까.

 

어른들보다 더 무서운 건 또래의 아이들이었다. 항상 우거지상을 하고 학교를 다녔는데, 그런 나를 보고 반 친구들은 아프리카 난민같이 생겼다고 놀렸다. 당시 내 표정은 지금 봐도 세상 사는 낙이 하나도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런 나의 나약함은 오히려 나를 아이들의 먹잇감으로 만들었다. 생각해보면 아버지 어머니는 불쌍한 사람들이었다. 잘못된 인연으로 만나 서로를 할퀴고 살 수 밖에 없는... 진짜 악마는 또래의 아이들이었다. 공부 잘 하고, 잘 사는 집 출신의 얼굴 허연 아이들이 왕따를 주도했었다. 그때 깨달았다. 얼굴에 그늘을 안고 산다는 것은 오히려 지옥같은 세상에서 악마들의 먹잇감을 자청하는 길이구나. 그래서 웃기로 결심했다. 마치 세상이 너무 아름다운 양 웃으며 살기로.

 

아무런 힘없이 웃기만 하면 세상은 오히려 나를 얕볼 것인데, 힘을 기르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내게 힘을 기르는 방법을 가르쳐준 건 책이었다. 어린 시절 나는 책의 품에서 구원을 찾았다. 인생은 사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는 것인데, 이때 책은 든든한 동반자이자 말동무이자, 스승이었다. 책은 내게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를 알려주고, 웃으며 버틸 수 있는 힘을 안겨줬다. 나는 괴로울수록 책을 읽고, 책 속에서 나만의 낙원을 찾아낸다. 최근에 내게 싸움의 기술을 가르쳐주는 책은 '잔혹한 세상에서 살아남기'를 일러주는 김봉석 평론가의 '하드보일드는 나의 힘'이다.

 

'하드보일드는 살아남은 자, 아니 살아가야만 하는 자의 서사다. 아무것도 줄 수 없다 해도, 미로를 헤매는 즐거움은 존재할 수 있다. 이 끝없는 미로의 출구가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는, 한 가닥 희망만은 간절하게 남아 있기에. 그게 하드보일드의 비극적인 세계관이다. 알 수는 없지만, 믿을 수도 없지만 지금 이 순간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해야만 한다. 나는 하드보일드가 일종의 스타일이며, 애티튜드라고 생각한다. 작가가, 캐릭터가 세상을 대하는 태도와 살아가는 방식으로서, 세상의 폭력에 맞서 살아남는 한 가지 방법.

세상은 잔인하지만, 무한한 경이를 품고 있는 곳이다. 그것을 외면할 필요도 없다. 즐겁게 살고, 다만 이 비정한 현실을 직시하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차갑고 딱딱하다고 해서 인정이 없는 것도 아니고, 즐겁다고 해서 고통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하드보일드는 냉정하게, 이 세상의 법칙을 알려준다. 결코 외면하지 말고, 환상에 빠지지 말고 살아가라고 충고해준다. 그리고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준다.'

 

'이 세상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다가 뒤통수를 맞고 대체 왜 이런 거냐며 울부짖기보다 애초에 세상은 더러운 곳이라고 생각하며 묵묵히 자신을 추스르며 걸어가는 게 좋다. 배신을 당하고, 이유 없는 악의에 정신 못 차릴 정도로 나동그라졌다가도, 견디고 일어설 수 있는 내공이 필요하다. 일단은 머리로 알고, 그 다음은 세상과 부딪치면서 맷집을 기르는 것이다. 아무리 힘든 시련도 두 번째 겪고, 세 번째 만나면 조금은 수월해진다.'

'하드보일드는 나의 힘' 중에서

 

 

김재철 사장에 대한 해임만 발의, 석달을 끌어오다 어제 결국 부결되었다. 기다리는 동안 천막 농성에, 단식 농성에, 삭발 투쟁에 별의 별 것을 다했지만, 결국 우리가 기다리는 MBC 정상화는 아직도 오지 않았다. 오늘 아침엔 새벽 4시에 문득 눈이 떠졌는데, 잠이 다시 오지 않았다. 그래서 일어나 글을 쓰기 시작했다. 글쓰기는 내게 치유의 힘을 안겨주는 물약이다. '하드보일드는 나의 힘'에서 추천한 책, 리 차일드의 추적자 중에서 한 글귀가 머리속을 맴돈다. 

    

아무리 늦게 와도 끝까지 기다려야 한다.

필요한 것은 무한한 인내심.

초조하거나 걱정하지 않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기운을 빼지도 말고.

그러다가 갑자기 행동으로 돌입하는 것이다.

기다리는 것은 기술이다.’

추적자 중에서

 

김재철 해임안이 부결된 어제도 나는 웃으며 살았다. 세상이 아름다워서? 아니, 세상이 지옥이니까. 하지만 웃을 힘조차 없어진다면 나는 세상을 악마들에게 넘겨주는 것일테니까. 잔혹한 세상에서 살아남는 법, 기다리는 것이다.

나는 오늘도 웃으며 기다릴 것이다.

 

Posted by 김민식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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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뭉게구름이야기 2012.11.09 10: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 신나게 웃어본적이 없네요 아파서 인상쓰기 바빴으니... ......아무도없는곳 가서 30분만 이라도 혼자 웃고 싶네요

    • 김민식pd 2012.11.19 06:2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웃어라 세상이 모두 함께 웃을 것이다.
      울어라 너 혼자 울게 될 것이다.
      라는 글이 생각나는군요.
      혼자 웃지 마세요. 함께 웃으세요.

  2. Jane 2012.11.09 10:1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고맙습니다. 잘 읽고 갑니다. 파업모토가 '독하고 질기고 당당하게'였쟎아요. 그거야 말로 하드보일드의 진수를 보여주는 말이라고 생각됩니다. 재처리쓰레기 해임이 부결되었어도 하드보일드의 대가들 답게 웃으시면서 반드시 꼭 끝장을 보실거라고 생각해요. '독하고 질기고 당당하게!'

  3. 휘루 2012.11.09 11: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김민식님의 블로그를 우연히 알게 되어 이제는 매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알게 되면 사랑하게 된다고 하더니... 어느덧 블로그 왕팬이 되었네요.
    저마다 사연없는 사람이 없지만, 드러내고 싶지 않은 치부도 담담하게 표현하신 것을 보니
    과거와 온전히 화해하시고, 치유가 되신것 같습니다.
    저는 아직 화해하지 못한 것들이 많은데.....
    김민식님의 용기에 갈채를 보냅니다.

    • 김민식pd 2012.11.19 06:1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늘 고민할 뿐입니다. 어떻게 해야 내 안의 상처와 마주할 수 있을까? 어쩜 저는 아직도 사춘기인가 봐요. 사장한테 반항하는 것 보면... ^^

  4. 나비오 2012.11.10 17:2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늘 글 정말 가슴에 와 닿습니다.
    김 피디님 마음에 들어갔다 나온 것도 같구요..

    초조함과 불안함이 나의 영혼을 잠식해 들어오지만
    우리가 결국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것은 '사랑'에 있지 않을까요?

    사랑하니까 웃을 수 있는 것 같아요

    저도 요즘 입가를 찢으면서 웃으려 하고 있답니다.

    힘내세요 ^^~

    '언젠가는 승리하리라' 이런 입바랜 소리조차 꺼내기 힘든 하루네요 ㅜㅜ

    하지만 다시한번 힘내시길.....

  5. 채집자 2012.11.11 13:2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울컥하는 글입니다. 늘 웃고 계셔서 몰랐어요. 하지만 그렇게 웃고 계셨기 때문에 멀리서나마 저 역시 더 자주 웃고 기운냈답니다.

    피디님의 웃음은 이 미친 세상을 맞서는 힘인 동시에 저와 같은 인생후배들에게 희망이기도 합니다. 큽니다. 아시죠?

    낙엽이 떨어집니다. 자연히 떨어지고 사라지겠지요.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바람이 그리고 시간이 필요할테고요... 비록 이번에는 떨어지지 못했지만 떨어질 것은 떨어질 거예요! 피디님과 다른 모든 분들의 강한 바람으로! 더 웃으시고 덜 힘드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