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스북을 보다가 박혜진 아나운서의 글을 읽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MBC 동료 중 한 분입니다. 요즘은 출판사 대표로 일하고 있는데요. 새로 나온 책의 북콘서트 소식을 올렸어요. 그런데 제목이 <엄마를 미워해도 괜찮아> (김윤담 / 다람출판사)랍니다. 응? 진짜요?
‘엄마와 딸의 관계는 매우 깊고 끈끈하여 서로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사이이지만, 동시에 가장 벗어나기 어려운 굴레가 되기도 합니다. 특히 나르시시스트 성향의 엄마에게 정서적 학대를 받으며 성장했다면, 건강한 거리두기와 자아 형성은 더욱 어렵습니다. 저자는 남편에게 버림받고 홀로 두 아이를 키워야 했던 엄마 밑에서 자랐습니다. 병든 엄마는 자신의 불행한 삶을 어린 딸에게 털어놓으며, 딸이 자신의 고통을 알아주길 바랐습니다. “자식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산다”며 끝없는 한탄을 쏟아내고, 때로는 험한 말과 욕설로 딸을 몰아세우기도 했습니다. 어린 딸은 그런 엄마가 불쌍했고, 혹시라도 엄마가 자신을 떠날까 두려워하며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고 엄마의 감정 쓰레기통으로 살아갔습니다.’
문득 이 책을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어려서 아버지에게 숱하게 맞으며 살았습니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걸 좋아해서 문과에 진학하고 싶었지만, 결국 아버지의 고집에 밀려 공대에 진학했지요. 20대에 무척 불행했습니다. 석탄채굴학과 석유시추공학을 배우며, ‘이 길은 내 길이 아닌데...’하며 우울했지요. 그때 아버지가 진심으로 미웠어요. 내 인생을 망친 장본인이라 생각했거든요. 다만 입 밖에 낼 수는 없었지요. 한국 사회에서 부모는 존경과 사랑과 효의 대상이지, 미움의 대상은 아니니까요. 책을 펼치자 첫 구절.
‘가정 안에서 일어나는 정서적 학대는 가하는 사람도, 당하는 사람도 ‘학대’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잔인하다. (...)
부모는 자식을 위해서 희생했다는 사실에 대한 인정을 요구하고, 자식은 아무리 괴물로 변한 부모라도 기꺼이 이해한다. 혹은 그래야만 한다. 대한민국에서 부모를 원망하거나 외면하는 일은 결코 공감받기 어려운 것이기에.’
아버지의 꿈은 저를 의사로 키우는 것이었어요. 고등학교 때 반에서 24등이라는 성적표를 받아들 때마다 물어보셨어요. “너 이 성적 가지고 의대 가겠냐?” 숱하게 맞았습니다. 정말 많이 맞았어요. 한번은 전깃줄로 때려서 제 몸에 뱀 문신처럼 줄이 좍좍 남기도 했지요. 서울에서 대학 생활을 하는 어느날, 아버지가 올라오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제가 체해서 한참 아팠어요. 왜 그러는지 이상해하는 친척 형에게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맞으며 산 얘기를 했더니 그 형이 그랬어요. “부모가 자식 잘되라고 그런 거 아니냐. 그걸 원망하면 안 되지.” 그때 깨달았어요. 아, 자식이 부모에게 받은 학대는 어디 가서 얘기하면 안 되는구나. 저와 동생이 유달리 친한 이유가 여기에 있어요. 우리가 어린 시절에 받은 상처에 대해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서로밖에 없어요.
저자의 아버지는 무슨 막장드라마의 캐릭터 같아요. 사업한다고 집의 돈을 끌어다 말아 먹고, 없는 형편에 있는 척하고 싶어 지역 로터리 모임에 나가 철마다 호사스러운 행사에 다니고, 그러다 바람이 나면 나가서 딴살림을 차리고, 돈이 떨어지면 다시 집에 들어와 천연스레 부엌에서 라면을 끓여 먹습니다.
부부 싸움을 하던 엄마는 아이들 앞에서 칼을 들고 자해를 시도하기도 하고요, 싸우다 기절하면 딸이 울면서 엄마 코에 얼굴을 갖다 대고 숨을 쉬는지 확인했대요. 바람 피우고 집을 나갔던 아버지는 동생까지 달고 와서 집에서 난리를 칩니다. 작은아버지가 엄마에게 욕을 퍼붓고, 엄마는 안방으로 몸을 피합니다. 작은아버지는 문을 두드리며 험한 욕을 뱉어내는데 아버지는 태평하게 라면을 끓여 먹고 있어요.
세월이 흘러 딸이 고등학생이 되었습니다. 딸에게 옛이야기를 곱씹으며 신세 한탄하는 것을 일종의 낙으로, 스트레스 해소로 생각하던 엄마가 문득 이런 말을 합니다.
“그때 너희 작은 애비가 나한테 욕하던 날 기억나지? 넌 그때 뭐했니?”
열세 살 난 아이가 뭘 했겠어요. 방에 혼자 틀어박혀 울고 있었겠지요. 순간 딸은 엄마에게 미안해집니다. 왜 난 그때 엄마를 돕지 못했을까? “글쎄, 모르겠네.” 그러자 엄마가 그래요.
“서방 복 없는 년은 자식 복도 없다더니.”
엄마의 삶도 불행하지요. 남편은 바람피우고, 집에 돈은 없고, 심지어 암까지 걸려요. 하지만 내 삶이 불행하다고 자식의 삶까지 꼭 불행하게 만들어야 했을까요? 자식은 나의 불행으로부터 지켜 줘야 하는 거 아닐까요? 아버지가 제게 의사란 직업을 강요한 이유가 있어요. 아버지는 평생 교사로 일하며 큰돈을 벌어보지 못했어요. 그게 한이 맺혔기에 제게 돈 많이 버는 직업을 강요한 거죠. 저는 그 시절에 깨달았어요. 큰돈을 버는 게 목표가 아니라, 적은 돈으로 행복하게 살자고. 큰돈을 벌지 못해 내가 불행하다면, 나는 그 분풀이를 자식에게 하는 사람이 되버릴테니까요.
이 책을 쓴 저자의 엄마는 전형적인 나르시시스트입니다. 나르시시스트의 3가지 특징. 자기 자신을 과도하게 사랑하거나 중요하게 여깁니다. 타인의 감정이나 필요를 잘 공감하지 못하고요. 자신의 목적을 위해 타인을 이용합니다.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아이에게 불필요한 과거의 고통을 자꾸 상기시키고요. 그 과정에서 아이까지 가해자의 한 사람으로 만들어버려요. 아이도 가정 폭력의 희생자입니다. 그런데 아이에게는 이중의 고통이 주어져요. 부모가 싸우는데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죄책감까지.
그 고통스러운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저자는 이른 나이에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습니다. 아이를 키우며, “자식을 낳으면 부모 마음을 이해하게 된다”는 말이 틀렸음을 깨닫습니다. 한없이 순수하고 사랑스러운 아이를 보며, 어떻게 엄마는 이렇게 무해한 존재인 나에게 그토록 모질고 큰 상처를 줄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과 함께 더 큰 상처를 받았습니다.
결국 저자는 몸과 마음에 병이 들었고, 우울증으로 정신과 치료를 받습니다. 한국 사회에서는 부모에게 받은 상처를 극복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말하면 “그래도 부모인데……”, “엄마가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랬겠어”, “자식인 네가 이해해야지”,라고 하거든요. 그 말들은 오히려 죄책감만을 더할 뿐, 자녀의 깊은 상처와 아픔을 위로해주지는 않습니다. 이럴 때는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합니다. 어설프게 주위 사람들의 위로와 공감을 구하다 오히려 상처받기 쉽습니다. 저도 그랬어요.
결국, 살기 위해 저자는 브런치에 글을 쓰기 시작합니다. 이해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아서 글을 썼고요. 사회적 관계망에 올린 글에 댓글이 달리기 시작합니다. ‘이거 제 얘기에요.’ ‘저도 엄마에게 받은 상처가 있는데, 어디 가서 말도 못하고 있어요.’ ‘용기를 내어 이렇게 공유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저는 저자 강연을 듣는 걸 좋아해서 북콘서트를 자주 다닙니다. 이번 강연은 분위기가 사뭇 달랐어요. 질의 응답 시간에 독자들이 손을 들고 질문하는 대신 고맙다고 말씀하셨어요. 엄마에게 받은 상처를 어디 가서 말도 못하고 혼자 너무 괴로웠는데 책을 읽고 위로를 받았다고요. 어떤 분은 저자의 어머니를 대신해서 미안하다고 하셨고요. 독자들이 마이크를 넘길 때마다 곳곳에서 울음소리가 나오더니 나중엔 그냥 울음바다였어요. 단상의 작가님과 박혜진 아나운서도 연신 눈물을 닦아야 했어요. 아, 이것이 글과 말이 주는 위로로구나, 하고 느꼈어요.
‘엄마가 밉다고 말하면 안 되는 줄 알았다. 엄마를 미워하면 안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나는 이제 말하고 싶다. 엄마가 미우면 밉다고 얘기하세요. 내 이야기도 좀 들어달라고 얘기하세요. 엄마로부터 도망치세요. 숨이 쉬어지는 곳까지 달려가세요.’
제가요, 어렸을 때 꿈은 자살이었습니다. 현실의 확실한 고통을 피할 수 있는 길은 죽음뿐이라고 느꼈어요. 혼자 방에서 면도날을 손목에 대고 그었다가 우연히 방에 들어온 동생이 그걸 보고 놀라 목놓아 울었어요. 제가 자살을 하면 아버지가 동생은 좀 덜 때리지 않을까, 덜 엄하게 굴지 않을까, 그런 철없는 생각도 했는데요. 동생을 보니, 쟤가 혼자 남는 것도 너무 무섭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살아야겠다고 마음을 고쳐먹었고요. 일단 죽을 힘을 다해 집으로부터 달아나야겠다고 결심했어요. 스무살에 서울로 대학 진학을 하고, 영어 공부를 하고 직장에 들어가 내 힘으로 돈을 벌면서 아버지로부터 달아날 수 있었어요.
부모를 미워해도 될까요? 죽도록 힘들다면, 나를 힘들게 하는 대상이 누가 되었건, 상사건, 부모건, 배우자건, 일단 도망치세요. 숨이 쉬어지는 곳까지. 내 삶을 망칠 수 있는 권리는 그 누구에게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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