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공짜 PD 스쿨/날라리 영화 감상문

중년의 위기가 찾아올 땐 <미성년>

by 김민식pd 2020. 4. 29.

(<왓챠의 브런치>에 기고한 글입니다.)

영화 <미성년>이 극장 개봉했을 때, 영화가 참 잘 빠졌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배우 매니저들을 만날 때마다 김윤석 감독님의 데뷔작이 기똥차게 나왔다고 했다. ‘아, 진짜, 그 분은 그냥 연기만 하시지......’ 극장에 가지 않은 건, 직업적 자존심 때문이다. 직업이 드라마 피디라, 나름 감독이라는 자부심으로 먹고 산다. 연기 잘하는 배우가 심지어 연출도 잘한다는 걸 내 눈으로 확인하면, ‘아, 외모도 딸리고 연출도 못하는 나는 이제 어떡하지?’하는 자괴감이 들 것 같았다. 어린 시절부터 영화광으로 살았지만 감히 영화배우를 꿈꾼 적은 없다. 집에 거울이 있었기 때문이다. 타고난 재능은 없어도, 열심히 영화를 보고 책을 읽다보니 드라마 피디라는 직업을 얻을 수 있었다. 나처럼 겸손하게 생긴 사람은 역시 카메라 뒤에서 큐를 주는 일이 천직이다. 


영화 <미성년>이 <왓챠플레이>에 신작으로 뜬 걸 보고 볼까 말까 고민했는데, 팬심이 자존심을 눌렀다. 김윤석이 뜨기 전, MBC 아침 연속극에 출연할 때부터 나는 그를 좋아했다. 악역을 참 밉지 않게 잘 연기했다. 아침 연속극에 나오는 남자 조연의 역할은 주로 조강지처를 버리고 바람피우다 몰락하는 캐릭터다. 찌질한 중년 남자의 위기를 너무도 잘 살린 덕에 당시 무명에 가깝던 배우 김윤석은 2006년 MBC 연기대상에서 우수상을 받았다. 코믹감이 뛰어난 걸 보고 언젠가 캐스팅하려고 눈독 들이고 있다가 어느 날 극장에 갔다가 좌절했다. 당시 개봉한 <타짜>는 화려한 캐스팅을 자랑하는 영화였는데, 무명의 김윤석은 잠깐 등장하는 아귀라는 역할로 관객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아, 저 분, 앞으로 드라마에서 보기는 어렵겠구나.’ 2006년 이후 그를 TV에서 볼 수 없었다. 불길한 예감은 왜 항상 들어맞는 걸까?


오랜 팬으로서 그의 연출 데뷔작이 궁금했지만, 마음은 불편했다. 영화가 별로면, 팬으로서 안타까울 것 같았다. 영화가 좋으면, ‘배우가 연출도 저렇게 잘하는데, 나는 뭐지?’하는 자괴감이 들 것 같았다. 평생 해온 일을 잘 할 자신도 없고, 그렇다고 새로운 일에 도전하기도 쉽지 않은 때 중년의 위기는 찾아온다. 


영화 <미성년> 속 대원(김윤석 분)은 20년 가까이 같이 살아온 아내(염정아 분)에게 더 잘 할 자신은 없는데, 괜히 다른 여자(김소진 분)에게 마음이 끌린다. 흔들리는 중년의 아빠 탓에 미성년인 딸들의 고난이 시작된다. 대원의 딸 주리 (김혜준 분)은 바람난 아빠의 뒤를 밟다, 상대방 아줌마의 딸이 학교 급우 윤아 (박세준 분)라는 걸 알게 된다. 학교 옥상에서 두 딸이 대치한다. 


“니네 엄마, 우리 아빠랑 바람 피우는 거 알아?”
“어떻게 모르냐, 배가 불러오는데.”
“뭐? 임신했다고?”


엄마를 지키고 싶은 두 딸들의 갈등은 이렇게 시작한다. 나이 들어 하고 싶은 데로 다 하고 살면 주위 사람에게 민폐다.
20대에 나는 하고 싶은 건 많은데, 할 줄 아는 게 없었다. 어린 내게 성공이란, 욕망과 능력을 일치시키는 일이었다.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나고,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 50대가 되고 깨달았다. 중년이란, 하고 싶다고 다 하면 안 되는 나이다. 중년의 능력은, 하고 싶은 일을 참는 것이다. 할 수 있다고 다 하고 살면, 어른이 아니라 괴물이 된다. 주위 사람들에게 괴로움만 안겨주는.


배우가 연출을 했으니, 뭐가 다른가 보자, 라는 심산으로 보기 시작했는데, 영화를 보다 그냥 이야기에 푹 빠지고 말았다. 감독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좋은 이야기를 발견하는 것인데, 그런 점에서 김윤석 감독의 데뷔작은 일단 성공했다. 노련한 배우가 만든 영화인데, 젊은 감독의 데뷔작처럼 소재도 좋고 만듦새도 좋고 무엇보다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이 좋다. 극장에서 놓친 영화를 뒤늦게라도 발견할 수 있어 다행이다. 고맙다, 왓챠플레이. 


‘김윤석 감독님, 다음 작품을 기대합니다. 그땐 꼭 극장에서 볼게요!’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