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왓챠의 브런치>에 기고한 글입니다.)

영화 <미성년>이 극장 개봉했을 때, 영화가 참 잘 빠졌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배우 매니저들을 만날 때마다 김윤석 감독님의 데뷔작이 기똥차게 나왔다고 했다. ‘아, 진짜, 그 분은 그냥 연기만 하시지......’ 극장에 가지 않은 건, 직업적 자존심 때문이다. 직업이 드라마 피디라, 나름 감독이라는 자부심으로 먹고 산다. 연기 잘하는 배우가 심지어 연출도 잘한다는 걸 내 눈으로 확인하면, ‘아, 외모도 딸리고 연출도 못하는 나는 이제 어떡하지?’하는 자괴감이 들 것 같았다. 어린 시절부터 영화광으로 살았지만 감히 영화배우를 꿈꾼 적은 없다. 집에 거울이 있었기 때문이다. 타고난 재능은 없어도, 열심히 영화를 보고 책을 읽다보니 드라마 피디라는 직업을 얻을 수 있었다. 나처럼 겸손하게 생긴 사람은 역시 카메라 뒤에서 큐를 주는 일이 천직이다. 


영화 <미성년>이 <왓챠플레이>에 신작으로 뜬 걸 보고 볼까 말까 고민했는데, 팬심이 자존심을 눌렀다. 김윤석이 뜨기 전, MBC 아침 연속극에 출연할 때부터 나는 그를 좋아했다. 악역을 참 밉지 않게 잘 연기했다. 아침 연속극에 나오는 남자 조연의 역할은 주로 조강지처를 버리고 바람피우다 몰락하는 캐릭터다. 찌질한 중년 남자의 위기를 너무도 잘 살린 덕에 당시 무명에 가깝던 배우 김윤석은 2006년 MBC 연기대상에서 우수상을 받았다. 코믹감이 뛰어난 걸 보고 언젠가 캐스팅하려고 눈독 들이고 있다가 어느 날 극장에 갔다가 좌절했다. 당시 개봉한 <타짜>는 화려한 캐스팅을 자랑하는 영화였는데, 무명의 김윤석은 잠깐 등장하는 아귀라는 역할로 관객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아, 저 분, 앞으로 드라마에서 보기는 어렵겠구나.’ 2006년 이후 그를 TV에서 볼 수 없었다. 불길한 예감은 왜 항상 들어맞는 걸까?


오랜 팬으로서 그의 연출 데뷔작이 궁금했지만, 마음은 불편했다. 영화가 별로면, 팬으로서 안타까울 것 같았다. 영화가 좋으면, ‘배우가 연출도 저렇게 잘하는데, 나는 뭐지?’하는 자괴감이 들 것 같았다. 평생 해온 일을 잘 할 자신도 없고, 그렇다고 새로운 일에 도전하기도 쉽지 않은 때 중년의 위기는 찾아온다. 


영화 <미성년> 속 대원(김윤석 분)은 20년 가까이 같이 살아온 아내(염정아 분)에게 더 잘 할 자신은 없는데, 괜히 다른 여자(김소진 분)에게 마음이 끌린다. 흔들리는 중년의 아빠 탓에 미성년인 딸들의 고난이 시작된다. 대원의 딸 주리 (김혜준 분)은 바람난 아빠의 뒤를 밟다, 상대방 아줌마의 딸이 학교 급우 윤아 (박세준 분)라는 걸 알게 된다. 학교 옥상에서 두 딸이 대치한다. 


“니네 엄마, 우리 아빠랑 바람 피우는 거 알아?”
“어떻게 모르냐, 배가 불러오는데.”
“뭐? 임신했다고?”


엄마를 지키고 싶은 두 딸들의 갈등은 이렇게 시작한다. 나이 들어 하고 싶은 데로 다 하고 살면 주위 사람에게 민폐다.
20대에 나는 하고 싶은 건 많은데, 할 줄 아는 게 없었다. 어린 내게 성공이란, 욕망과 능력을 일치시키는 일이었다.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나고,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 50대가 되고 깨달았다. 중년이란, 하고 싶다고 다 하면 안 되는 나이다. 중년의 능력은, 하고 싶은 일을 참는 것이다. 할 수 있다고 다 하고 살면, 어른이 아니라 괴물이 된다. 주위 사람들에게 괴로움만 안겨주는.


배우가 연출을 했으니, 뭐가 다른가 보자, 라는 심산으로 보기 시작했는데, 영화를 보다 그냥 이야기에 푹 빠지고 말았다. 감독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좋은 이야기를 발견하는 것인데, 그런 점에서 김윤석 감독의 데뷔작은 일단 성공했다. 노련한 배우가 만든 영화인데, 젊은 감독의 데뷔작처럼 소재도 좋고 만듦새도 좋고 무엇보다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이 좋다. 극장에서 놓친 영화를 뒤늦게라도 발견할 수 있어 다행이다. 고맙다, 왓챠플레이. 


‘김윤석 감독님, 다음 작품을 기대합니다. 그땐 꼭 극장에서 볼게요!’

Posted by 김민식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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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섭섭이짱 2020.04.29 06:5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세요.

    와~~~~ 김윤석 배우님이다.
    타짜 뿐만 아니라 도둑들, 거북이 달린다,
    남쪽으로 튀어, 전우치, 검은사제, 1987
    그리고, 재밌게 봤던 완득이, 추격자, 황해까지...
    다양한 배역을 어쩜 그리 잘 소화해내는지.....
    대한민국 최고의 믿보배죠 ^^

    MBC 드라마에 출연한건 오늘 처음 알게 되네요.
    갑자기 궁금해져서 찾아보고 싶어지는데요 ^^

    앗.. <미성년>에 대해 여기저기 소개된 내용은
    많이 봤는데 그때 영화관에 못가서 놓쳤던 기억이..
    오늘 바로 왓챠플레이로 고고고해야겠네요.
    저도 놓칠뻔한 영화 뒤늦게 발견하게 글써주셔서 감사해요.
    민식 학장님 👍👍👍

    저도 다음 김윤석 감독 작품은
    극장에서 꼭 보도록 해야겠어요


  2. renodobby 2020.04.29 09:3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 이 영화 봤는데 꽤 재미있게 봤습니다.
    무엇보다 김윤석 배우가 연출했다는 사실이 놀라우면서도 감독 김윤석의 다음 작품이 기대되는 영화였습니다.

  3. 꿈트리숲 2020.04.29 09:3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김윤석 배우가 영화 감독 데뷔한 것도
    놀라운데 아침 드라마에 출연했다는 사실이
    더 놀랍습니다.
    아침 연속극 조연을 알아보고 캐스팅하는
    감독들의 눈, 정말 예리하십니다 ㅎㅎ

    오랜 연기 생활을 하신 분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고픈 욕망이 생기나봅니다.
    이야기도 갖춰졌고, 연기는 말할 것도 없겠고
    현장을 리드하는 역할도 터득하셨을테니
    그 모든 것이 작품에 고스란히 담겼을 것 같아요.

    중년의 능력은 하고 싶은 것 있어도 참는 것이라...
    주위에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하고 싶은 것
    열정적으로 해도 괜찮겠죠?^^

  4. 아리아리짱 2020.04.29 10:3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김민식PD님 아리아리!

    무게감 있는 김윤석 배우가 영화감독으로 데뷔 하셨군요!
    <미성년> 꼭 챙겨서 봐야겠어요!
    역쒸~!
    <공즐세>학장님은 지식과 지혜는 물론
    문화를 전해주시는 전달자 이십니다.
    5월 싱그러운 푸르름으로 함께 하시길! ^^

  5. 아빠관장님 2020.04.29 11:1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니, 피디님의 외모가 어때서요~?? 그리그 피디님 요즘은 외모로 연기하는 거 아니잖아요. 유혜x 오달x 양동x 등등등...

  6. 더치커피좋아! 2020.04.29 14:1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중년이란,
    하고 싶다고 다 하면 안 되는 나이다.
    중년의 능력은,
    하고 싶은 일을 참는 것이다.
    할 수 있다고 다 하고 살면,
    어른이 아니라 괴물이 된다.
    주위 사람들에게 괴로움만 안겨주는.'

    좋은 영화 소개와 함께
    좋은 생각을 하게 하는
    피디님의 글 잘 읽었습니다.

    예전에 '안나 카레니나'를 읽으며
    느꼈던 앎과 현실과 욕망과 절제.
    그리고 책임감과 자유로움의 경계에서
    나는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고민을 해보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남의 불행위에 내 행복을 쌓아버리는
    중년이 되고 싶지는 않네요.
    내행복이 곧 다른사람의 행복이
    될수 있는 일을하는 그런 능력을
    기르고 싶어요.

    피디님은 글을 쓰며 행복하시고
    저희는 그 글을 읽고 행복합니다.

    오늘도
    피디님~파이팅!^^

  7. 김주이 2020.04.29 20:4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PD님의 글을 보니 영화가 궁금해지네요.
    하고 싶은 것을 다하면 괴물이 된다는 말 명심해야겠습니다.
    오늘도 좋은 글 감사합니다.

  8. 꿈꾸는 강낭콩 2020.04.30 02: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김윤석 배우가 감독으로 나섰군요! 피디님 글을 보니 영화를 꼭 한번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9. 팬김씨 2020.06.02 06:4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피디님, 피디님의 책과 강연을 보고 팬이되었어요. 하지만 피디님의 외모에 대한 유머인지 알 수 없는 부정적인 글들은 이제 보기가 힘드네요. 그 방식이 일반적인 비아냥을 넘어서는 것 같아요. 외모가 다 가 아니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외모를 반복적으로 글의 소재로 쓰시는 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사실 저는 아버지를 닮았는데 한평생 못생겼다고 생각했어요. 이제는 아이도 낳고 아이와 온전한 애정을 주고받으며 외모는 거의 잊고 삽니다. 이제는 어찌보면 나쁘지 않다고도 생각해요. 예전에는 아버지가 제 외모를 좋게 이야기하지 않은것이 계속 남아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피디님 글을 볼 때마다 못난 마음이 자꾸 생각나요. 그냥 블로그를 안 오면 되는데.. 그건 또싫어서 긴 댓글 남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