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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짜로 즐기는 세상

민폐가 안 될 때까지

by 김민식pd 2018. 11. 19.

날이 쌀쌀해졌어요. 자전거 출퇴근은 당분간 쉬면서 다른 운동을 해야겠어요. 새로운 운동을 배우고 싶습니다. 평소에 건강을 자랑하던 어르신 한 분이 대추가 잘 익은 걸 보고 나무에 올랐다가 떨어져서 크게 다치셨어요. 다행히 수술을 받고 경과가 좋아 다시 재활을 통해 걷기 시작하셨어요. 나이 드니까 조금만 부딪혀도 크게 다치더군요. 다치면 주위에 민폐를 끼치게 됩니다. 식사부터 배변까지 다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하니까요. 자전거를 타는 건 좋은데, 나이 들어 다치는 건 겁이 나요. 자전거는 운전이랑 비슷해서, 내가 아무리 조심해도, 갑자기 튀어나오는 행인이나 자동차는 피하기 쉽지 않거든요. 그래서 나이 들어서도 계속 할 수 있는 운동으로 탁구를 다시 시작했습니다.

70대 할머니가 계신데요. 평소엔 걷는 것도 불편한데 탁구채만 잡으면 날아다닙니다. 셰이크핸드로 슬슬 치는데도 당할 재간이 없어요. 취미로 즐기는 탁구는 스피드나 파워보다 스킬이 더 중요합니다. 나이 20에 열심히 배워둔 자전거로 중년의 삶이 즐거우니, 나이 50에 배운 탁구로 80에도 즐겁게 스포츠인으로 살 수 있지 않을까요?

탁구의 재미는 핑! 퐁! 핑! 퐁! 공이 왔다 갔다 하는 랠리에 있어요. 그런데 저는 공을 잘 받지 못하거나, 치면 엉뚱한 데로 날아갑니다. 랠리가 이어지지 않아요. 잘 치는 사람끼리 치면 시합도 하고 재미난데, 저랑 치는 분은 사정을 봐주면서 쳐야 하니 게임하는 재미가 없지요. 그래서 처음엔 가서 상대가 없어 혼자 멀뚱멀뚱 빈 라켓만 휘두르고는 했어요. 

다행인 건 문화센터 탁구 수업의 운용방식입니다. 도착한 순서대로 보드판에 이름을 적어둡니다. 자신의 차례가 되면 가서 코치님에게 레슨을 받지요. 자세 교정이나 라켓 잡는 법부터 가르쳐주십니다. 레슨 받는 동안, 남은 사람들은 서로 짝을 맞춰 칩니다. 레슨 차례가 오면 빠져요. 그럼 상대가 없지요. 기다리던 저는 머리를 긁적이며 남은 분에게 가서 고개 숙여 인사를 드리지요. "혹시 저랑 잠깐 치실까요?" 하고요. 그렇게 저도 연습 상대를 만납니다. 상대 입장에서 초보랑 치는 건 재미는 없겠지요. 그래도 그 시간이 오래 가지는 않습니다. 상대방이나 저도 곧 레슨 받을 차례가 돌아오거든요. 레슨을 받는 동안, 그 분은 새로운 파트너를 만나고, 그럼 저는 또 새로운 상대를 찾아갑니다. 계속 이렇게 돌고 돕니다. 그러니 민폐 끼치는 초보일지라도 계속 배울 수 있는 거죠.

처음 탁구를 칠 땐, 민폐 끼치는 걸 심하게 의식하다가 포기할뻔 했어요. 생각해보면, 인생은 민폐로 시작해, 민폐로 끝납니다. 아기로 태어나면 먹고 자는 것부터 모든 걸 타인에게 의지해야 하니까요. 인생을 시작할 때 주위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치듯 운동이나 취미를 시작할 때도 민폐 시절부터 거칩니다. 바이올린을 배운 적이 있는데요, 처음엔 찢어지는 소리가 나더군요. 이웃에 민폐가 너무 심해 포기했습니다. 관악기가 서툴러도 좀 들을 만 합니다. 바이올린은 서투르면 찢어지는 소리가 나는데요, 플룻은 서툴면 아예 소리가 안 나거든요. 민폐가 덜하지요. ^^ 물론 플룻도 들어줄만한 단계까지 가는 데는 시간이 걸립니다. 이웃에 민폐를 끼치며 열심히 연습했지요. 지금 저의 플룻 연주는 민폐는 아니라고 감히 믿고요. ^^ 민폐를 견뎌야 합니다. 회화 학원에 가서도 대화의 맥을 끊으며, 원어민 강사를 답답하게 하는 민폐 시절을 지나야 고수의 경지에 오를 수 있습니다.

지금은 민폐만 끼치는 탁구 초보지만, 언젠가 나이 70에 고수가 되는 날을 그려봅니다. 초보 회원이 오면 웃으며 먼저 상대해주는 너그러운 노인이 되는 날까지, 부지런히 민폐를 끼치며 실력을 쌓고 싶습니다.


(남산 산책길에 만난 길냥이... 지나다니는 행인들 신경 쓰지 않고 낮잠을 잡니다. 저 분이 고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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