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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독서 일기

너구리에게 배웁니다

by 김민식pd 2018. 5. 16.

공대를 나와, 영업사원을 하고, 통역대학원 졸업 후, 예능 피디, 드라마 피디, 작가까지, 계속 직업을 바꾸며 삽니다. 이런 삶을 살게 된 건 첫 직장에서 얻은 깨달음 덕분이에요. 1992년에 들어간 첫 직장은 외국계 기업인데요, 당시로선 드물게 주5일 근무에 칼퇴근이 가능한 회사였어요. 오죽 여유가 있으면 회사 생활을 하면서 저녁에 통역대학원 입시반 학원을 다니며 공부를 했겠습니까... 그럼에도 저는 그 좋은 회사를 그만둡니다. 왜? 즐겁지 않았거든요. 

어른들을 보니까, 꾸역꾸역 살더라고요. 제가 치과 영업을 다녔는데요. 치과 의사면 돈 많이 벌고 좋은 직업인줄 알았는데 의외로 치과 의사분들의 직업 만족도가 낮았어요. 하루 종일 앉아서 아픈 사람만 만나는 직업. 종일 아이 울음이나 환자의 앓는 소리를 듣는 직업. 개업 때 진 빚을 갚느라 평생을 일하는 삶, 만만치 않더라고요. 그런 의사들을 상대로 영업을 하는 외판사원의 일도 쉽지는 않고요. 상사의 기분을 맞추는 것도 힘들고, 접대술자리도 힘들고, 다 힘들었어요. 선배들의 삶을 들여다봤어요. '저 사람들은 이 힘든 일을 어떻게 평생을 할 수 있지?' 이유는 결혼과 육아더군요. 결혼하고 아이를 갖는 순간, 회사에 충성을 다할 수 밖에 없더라고요. 그래서 결심했어요. '아직 총각일 때, 회사를 때려치우고 즐거운 삶을 찾아보자.'


<출판하는 마음> (은유 인터뷰집 / 제철소)을 보면 '저자의 마음'이라는 인터뷰에서 너구리라는 필명을 쓰는 김경희 작가가 나옵니다. <회사가 싫어서>라는 독립출판물을 낸 작가인데요. 인터뷰를 읽으며, '아, 참 배울 점이 많은 사람이구나!'하고 느꼈어요. 너구리는 취업 서비스 업종에서 일했는데요, 스물다섯 살에 입사해서 하는 일이 부모님뻘 되는 분들의 하소연을 듣는 것이었대요. '먹고사는 문제가 어렵다, 새로운 걸 배워서 취업해야겠다.' 취업 박람회를 찾아온 주부나 중장년들의 하소연을 듣고 찾아온 깨달음. '직장 생활에 대한 고민은 나이가 든다고 사라지는 게 아니구나.' 


'내가 지금이야 나이가 어리고 상품성 있는 노동자겠지만 결혼, 임신, 출산과 육아를 거치면서 상품 가치가 떨어지겠지.' 막연히 추측하는 것과 그런 어려움을 겪는 사람을 두 눈으로 직접 보고 구체적인 이야기를 듣는 것은 실감의 온도가 완전히 다른 일이었다. 결심이 쉬워졌다. 이 판에 머물 게 아니라 새로운 판에 도전해봐야겠구나. 혼자 일을 해봐야겠다. 한 살이라도 젊을 때 회사라는 울타리 없이 살아봐야겠다.'

(출판하는 마음 63쪽)

직장에서 일하면서 동시에 혼자 할 수 있는 일을 모색합니다. 전래 동화 전자책 셀프 출판을 시도하다 독립출판에 눈을 뜹니다. 독립출판에 대한 워크숍도 들어요. 첫 책으로 무엇을 낼까 고민하다, 회사 생활하며 힘들 때마다 끼적인 글이 눈에 띕니다.


일을 떠넘기고 일을 가르쳤다고 말한다.

- 모순


"나랑 일하면서 많이 배우지?:

그렇게 일하면 안 된다는 걸 배우네요.

- 동상이몽


하나, 다닐 만하다 싶으면 꼭 누가 건드린다.

둘, 기분 좋게 출근하면 꼭 누가 화를 낸다.

셋, 퇴근 후에 약속을 잡으면 꼭 누가

퇴근 직전에 일을 시킨다. 

-회사 생활 불변의 법칙

(위의 책 64쪽)


너구리의 메모를 읽으며 킥킥 웃었어요. 저도 몇 년 전, 드라마국에서 쫓겨났을 때, 회사를 때려치우려고 했거든요. 사표 내겠다고 했다가 마님에게 혼쭐이 난 후, 혼자 몰래 퇴사를 준비합니다. 회사와 관계없이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다가 '전업작가'의 꿈을 꾸게 되었지요. 저는 회사에 대한 투덜거림으로 글쓰기를 연습했어요. 망가져가는 조직문화에 대해 <피디 저널>에 기고하고, <뉴스타파>에 기고하고, <허핑턴포스트>에도 기고했어요. 저는 나름의 사명감을 가지고 열심히 썼는데, 사람들은 관심이 없더군요.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서 읽게 하려면 독자에게 도움이 되는 글을 써야겠구나, 생각했어요. 그래서 만든 게 블로그 영어 스쿨입니다.

밥벌이가 어렵고 고단할 때는 투덜거려도 돼요. 너구리는 혼자 투덜거린 글들을 모아 사람들에게 웃음과 위로를 주는 책도 냅니다. 


"너 20대 후반이잖아.

지금 퇴사하면 애매해서 안 돼."


팀장님처럼

30대 후반에 퇴사하면 좀 나을까요?


부장님처럼 

40대 후반에 퇴사하면 더 나을까요?


어차피 퇴사할 거라면

지금 할게요.

(위의 책 65쪽)


제 인생에서 가장 잘 한 선택은 나이 스물 일곱에 첫 직장을 박차고 나온 일이라 생각합니다. 피디가 되기 위해 영업사원을 그만 둔 건 아니에요. 일단 회사를 그만두고 번역이라도 하면서 살아야겠다 싶었는데요, 막상 회사를 나오니 용기가 생기더라고요. 꿈도 꾸지 못한 직업에 감히 도전하는... 20대에 사표를 써 본 사람은 겁이 없어지는 걸까요?

힘들 때 글을 썼더니, 그 글이 책이 됩니다. 화가 날 때, 할 말이 많지만 참아야 할 때에 떠오른 생각과 감정들에 대해 얼굴 찌푸린 채로 일하면 안 되니까, 자리에 앉자마자 메모장에 자판을 두드린다는 너구리의 말에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렇지, 상사 뒷담화는 역시 글로 풀어야!"

<출판하는 마음>에 나온 작가 너구리에게 배웁니다. 퇴사의 기술부터 작가가 되는 법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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