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도가니'를 봤다. 도가니는 너무 잘 만들어서 오히려 보기 불편한 영화다. 보는 이의 양심을 움켜쥐고 서서히 조여간다. 

                                                   (영화 '도가니')

도가니를 보고 느끼는 감정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방송사 PD인 내게는 언론 탐사 보도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계기였다. 한 지역 사회에서 약자를 대상으로한 범죄가 일어나고, 약자들을 마땅히 지켜야 할 사회 엘리트들이 범죄자를 감싸고 나섰을 때, 이를 세상에 알리는 것이 언론의 역할이다. 영화 도가니에 나온 사건도 PD수첩의 취재로 세상에 알려졌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PD 역시 순간의 선택으로 인생이 바뀐다. 96년, MBC에 입사할 당시 방송 PD는 공통직군으로 뽑았다. 6개월 연수를 하며 교양국, 예능국, 드라마국 3개 부서를 돌고, 수습이 끝나는 시점에 본인의 선택에 따라 부서 발령이 난다. 나는 면접에서 영어 통역사라는 강점을 부각시키며  전세계를 취재다니며 해외 사정을 소개하는 교양PD가 되고 싶다고 했지만, 나중에는 입닦고 예능국을 지원했다. 왜? 난 비겁하니까. 

수습 시절, 교양국에 가서 PD 수첩 팀이 일하는 걸 봤다. 몰래카메라 들고 위장 취업하며 취재를 하는데 그러다 들켜서 폭행의 위협도 받고... 세상에 숨어있는 나쁜 놈들 찾아다니는 것도 힘든데, 내 입장에서 더 힘들어 보이는 건 피해사례 수집이었다. 영화 도가니를 보는 것만으로도 힘든데, 실제 피해학생의 인터뷰가 이루어지는 현장에서 그 장면을 찍고 있다고 상상해보라. PD수첩 연출, 누군가는 해야겠지만,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그런 PD 수첩 제작진들이 요즘 많이 힘들다. 예전에 블로그에 올린 글도 있지만, 올들어 PD 수첩 팀은 거의 잔혹사에 가까운 수난을 겪고 있다.
2011/06/08 - [공짜 PD 스쿨] - PD수첩 PD들이, 지금 PD를 못 하는 이유

숨겨진 비리를 찾아 눈 치켜 뜨고, 귀 쫑긋 세우고 일해야 할 사람들인데, 누군가 그들의 눈과 귀를 가리고, 입을 막아버렸다. 국민의 눈과 귀가 되어야 할 PD수첩이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게 된 현실... 영화 도가니의 마지막 장면, 공유의 대사, '이 아이의 이름은 민수입니다. 이 아이는 들을 수도 말할 수도 없는 아이입니다.' 왜 그 순간 나는 죄책감에 눈물이 났을까? 

'이 아이의 이름은 PD수첩입니다. 이 아이는 들을 수도 말할 수도 없는 아이입니다.' 최근 PD수첩 광우병 보도에 대한 대법원 판결 이후 회사에서 행한 일련의 조치에 있어, 나는 동료들을 지켜주지 못했다. 10년이 지나 누군가 나를 찾아와 마이크를 들이댈 것 같다. 'PD수첩이 농락당하고 죽어갈 때, 당신은 무엇을 했습니까?' 

PD수첩,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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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민식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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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익명 2011.10.01 21: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 김민식pd 2011.10.02 07:2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괜찮아요. 어둠의 끝이 보이니까요. 적설의 시간은 오래지만 해빙은 순간이다. 제가 좋아하는 어느 선배님의 말씀입니다.^^

  2. 하핫 2011.11.14 13: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타깝네요.. 저도 사회문제에 더 관심을 가져야 되겠다는 다짐을 했던 영화였습니다..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