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근 20년 만에 처음으로 고등학교 동창회에 나갔다. 고교 시절, 아름다운 추억이 별로 없는 탓에 동창과의 만남을 의도적으로 피해왔는데, 얼굴 한번 보자고 그래서 나갔더니 누가 그러더라.
“야, 이번에 ‘내조의 여왕’이라는 드라마 만든 피디가 우리 학교 동창이라더라? 누군지 아냐?”
조용히 손을 들었다.
“그거 난데?”
“니가 누군데?”
“김민식.”
자기들끼리 수군거렸다.
“야, 우리 학교에 김민식이라는 애도 있었냐?”
동창들이 내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하다. 나는 고교 3년 동안 이름으로 불린 적이 없다. 고교 시절 지독한 왕따였던 나는 늘 별명으로 불리는 신세였다. 따돌림을 주도한 악당이 둘 있었는데, 그놈들이 내 부족한 외모를 비꼬는 별명을 지어 집요하게 부르니 어느새 전교에 퍼지더라. 감수성이 예민한 사춘기 시절을 꽤나 불행하게 보냈다.
어른이 되어 피디가 된 나는 그들의 치 떨리는 우정을 갚아주기로 결심했다. 언젠가 내가 만드는 드라마에 악역이 나오면 그 친구들 이름을 붙여줄 거다. 조강지처 버리고 바람피운 놈이나, 권력에 눈이 멀어 선량한 사람들의 밥줄을 함부로 끊는 천하의 악당, 이런 놈들에게 그 친구들 이름을 붙이는 거다.
“에라이, *** 같은 놈아.” “이런, ### 보다 못한 놈.”
친구들의 이름을 욕으로 만들어 온 국민의 유행어로 만드는 것, 그게 내가 꿈꾸는 복수다.
어느 날 문득 생각해보니, 나 자신이 참 못났더라. 고교 시절 짖궂은 친구들의 놀림을 중년이 되도록 한으로 품고 살다니. 이렇게 못났으니 왕따가 되지. 그 녀석들은 나를 까맣게 잊었을 텐데 왜 나만 괴로워하며 산단 말인가. 그냥 잊고 즐겁게 살기로 결심했다. 잘 사는 게 복수다.
지난 일은 잊고 즐겁게 살겠노라 다짐했는데, 얼마 전 또다시 평정심을 잃게 만드는 기사를 접했다. 김재철 전 MBC 사장이 사천시장 선거에 출마하겠단다. 새누리 당에서는 서울 쪽 보궐선거 출마를 권유했지만, 본인은 중앙정치보다 지방정치가 맞는다는 생각에 거절했다고. 그 소식에 나는 또 길길이 뛰었다.
“이게 말이 돼?”
그러자 옆에서 보던 마님이 한마디 했다.
“그게 화를 낼 일이야? 오히려 잘된 일 아냐?”
“무슨 소리야?”
“생각해 봐. 김재철이 지방선거에서 새누리당 후보로 나오는 건, 절대 나쁜 일이 아니야.”
아! 난 역시 마님보다 한 수 아래다.
김재철 사장님의 용단에 박수를 보낸다. 사장님같이 훌륭하신 분께서 부디 지방선거에 출마하여 새누리당의 정치 수준을 온 국민에게 알려주는 기회로 삼기 바란다. 2012년 대선 보도를 망치고, MBC를 망가뜨리는데 있어 정치적으로 불순한 의도는 없었다고 말해온 사장님이 새누리당 깃발 아래 지방선거에 출마하면 많은 의문이 해소될 것 같다. 그리고 말이 나온 김에 김재철을 서울 쪽 후보로 영입하려고 했던 새누리당 관계자가 누구였는지 꼭 밝혀주시기 바란다. 사장님이 혼자 허풍떨었다고 생각하는 그런 불손한 사람들이 주위에 있더라. 꼭 오해를 풀어주시기 바란다.
김재철 사장은 문화 예술에 대한 사랑이 지극하신 분이다. 특히 국악에 대한 그분의 지극한 사랑은 내가 보증한다. 부디 중앙무대에서 그 분의 정치적 역량이 활짝 꽃피기를 기대한다. 사장님 덕에 정직 6개월에, 대기발령에, 구속영장 2번 맞은 내가 이 정도 멘트는 날려줘야 대인배 소리 듣지 않겠는가.
비 온 후 뜨는 무지개야, 너 참 반갑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