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공짜 PD 스쿨

연출은 차선과의 끝없는 타협이다

by 김민식pd 2012. 5. 4.

어제는 트위터로 한 고등학생이 질문을 했다. 내가 연출한 'MBC 프리덤'같은 립덥 영상을 찍고 싶어서 학교에서 출연자 모집 공고를 냈는데, 출연하겠다는 친구들이 없어 고민이라고...

 

내가 늘 하는 말이 있다. 세상 모든 일이 다 내 뜻대로 되면 그게 사람이냐, 신이지. 

 

연출은 착각쟁이다. 자신의 말 한마디로 모든 게 다 될 거라고 생각한다. 절대 그렇지 않다. 특히나 취미삼아 영상을 만들거나 학교에서 영상 제작 동아리로 일할 경우, 더더욱 그렇지 않다. '네가 뭔데?' 이런 얘기 듣기 딱 좋다. 내 머리 속에 아무리 죽이는 그림이 있어도, 주위 사람들을 움직일 수 없다면 연출을 할 수 없다. 

 

연출의 기본은 설득이다. 내 머리 속에 있는 이야기를 글로 옮겨줄 작가를 설득하고, 내 머리 속에 있는 그림을 촬영해 줄 카메라 감독을 설득하고, 내 머리 속에 있는 이미지를 표정으로 옮겨줄 배우를 설득한다. 

 

정말 피곤한 일이다. 네 마음이 내 마음 같지 않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을 다 일일이 설득하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이렇게 하나 하나 내 방식대로 고집해서 만들어가는 건 작가주의 연출이다. 한 컷 촬영을 위해 잭 니콜슨에게 수십번의 엔지를 냈다는 스탠리 큐브릭 감독이 전형적인 작가주의, 완벽주의 감독이다. 하지만 초보 감독이나 아마추어 연출자가 이렇게 일하면 팀 워크 깨진다. '네가 뭔데?' 이런 소리 듣기 딱 좋다.

 

초보 연출은 작가형 감독보다는 공동창작자의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 뮤비 출연자를 모집했는데, 반응이 썰렁하면? 접근 방식을 바꿔서 다시 모집한다. 왜 모이지 않을까?를 고민한 후, 부족한 부분을 채워야한다. 사람들을 설득할 최선의 방법을 찾아야한다. 내가 제일 즐겨 쓰는 설득의 방법은? 비는 거다. 한번만 해달라고 사정 사정 빈다.

 

감독이 폼나는 직업이라고? 아니, 감독은 내가 찍고 싶은 그림을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다. 빌어야 한다면 빈다. 빌었는데도 모이지 않으면? 그러면 모인 사람만 가지고 찍으면 된다. 한 명이든 두 명이든. 그래서 나를 지지해준 고마운 사람들에게는 최고로 멋진 영상을 선물하고, 나를 버린 이들은 나중에 땅을 치고 후회하게 만들면 된다. ^^ 

 

입사하고 '인기가요 베스트 50'이라는 가요 순위 프로그램에서 처음 일했다. 매주 30초짜리 예고를 하나씩 만드는게 내 첫 임무였다. 가요 프로 예고는 항상 가수들의 출연 장면을 편집해서 만든다. 나는 늘 똑같은 예고만 만드는 게 싫어, 직접 촬영을 시도했다. 문제는 캐스팅이 힘들다는 거. 이름 없는 신입사원이 30초 짜리 예고 찍는데, 누가 오겠나. 촬영 스탭이나 장비를 구할 예산도 없고. 그래서 집에 있는 목각 관절 인형으로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을 만들었다. 가정용 비디오 카메라로 3시간 동안 프레임 촬영하면서 인형의 손발을 조금씩 구부려가며 움직임을 만들었다.

 

 

나의 첫번째 주인공이다. 생각해보면 참 말 잘 듣는 고마운 연기자였다. 동작이 굼떠서 촬영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게 흠이지. 아, 생각해보니 표정 연기가 없는 아이였구나. ^^

 

연출은 끊임없이 차선과 타협하는 사람이다. 내 머리 속에 있는 그림에 집착하기보다 현실에서 가능한 것들을 모아 어떻게 새로운 무언가를 만드느냐가 연출의 관건이다. 나 혼자 만든다기보다 공동창작이라 생각하고 협동의 과정을 즐기시라. 내 뜻대로 안된다고 짜증내는 순간, 연출은 하수가 된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