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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짜로 즐기는 세상/공짜 연애 스쿨

너의 연애는 망할 것이다

by 김민식pd 2018. 5. 9.

(아주대학교 학보사에서 원고 청탁이 왔어요. 대학 새내기에게 들려줄 이야기를 써달라고. 그래서 보낸 원고입니다.)


너의 연애는 망할 것이다


- 쉰 살 김민식이 스무 살 김민식에게


안녕, 스무 살의 나? 너는 지금 대학 새내기로서 무척 설레는 봄을 맞이하고 있겠지? 아, 그 시절이 눈에 선하네. 대학에 들어가면 소개팅, 미팅, 과팅, 열심히 하면서, 여자 친구를 만들어 보겠다고 희망에 들떠 있던 시절. 30년 후의 너로서 살짝 말해주자면, 너의 연애는 망할 것이다. 1학년 2학기가 되도록 한 번도 연애를 한 적이 없다는 걸 깨달은 너는 어느 날 문득 그동안 했던 미팅의 횟수를 세어볼 거야. 일곱 번 연속으로 차였다는 걸 알고 궁금해지지. 나의 첫 연애는 몇 번째 소개팅에서 찾아오는 걸까? 연속 소개팅 실패 기록은 20회에서 멈추지. 스물한 번째 미팅에서 성공 하냐고? 아니. 너는 20회 연속 차인 후, 연애 포기하고 군에 입대한단다.

이제부터가 중요해. 네 연애 생활의 반전은 방위병 복무 시절에 일어나거든. 만날 여자도 없겠다. 딱히 할 일도 없겠다. 너는 영어 회화 공부를 시작한단다. 학원을 다닐 여유는 없으니 영어책 한 권을 외우지. 1년 6개월 동안 출퇴근 시간에 중얼중얼 회화 문장을 암송했더니, 어라, 어느새 영어가 되는 거야. 극장에 갔더니 헐리웃 여배우가 내게 말을 걸어오네? 길에서 미국인을 만나면 내가 자꾸 시비를 거네? ‘어디에서 왔니?’ ‘어디에 가는 거니?’ ‘내가 길 가르쳐줄까?’

이게 제대로 영어를 하는 건가, 궁금한 마음에 너는 복학하자마자 전국 대학생 영어 토론대회에 나가지. 전국의 고수들이 모인 그 대회에서 너는 2등상을 탄단다. 적성에 맞지 않는 공대를 다니며 괴로워하던 너는 영어에서 희망을 발견하지. 그 덕에 나중에 미국계 회사에 취업하기도 하고, 외대 통역대학원에도 가지. MBC PD로 입사하는 것도 어쩌면 영어 덕분인지 몰라. 하지만 영어가 네게 준 진짜 선물은 따로 있지. 바로 자신감.

신입생 시절, 너는 못생긴 외모를 심하게 의식하는 바람에 여자를 만나면 자학 개그를 펼치곤 했는데, 그게 별로 좋은 전략은 아니더군. 연애는 멘탈 게임이거든? 내가 나를 아껴주지 않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이 나를 좋아할 수 있겠어. 영어를 공부한 후, 달라진 점은, 내가 나 자신을 자랑스러워하게 되었단 거야. 연애를 위해 해야 할 일은, 스스로 목표를 정하고 성취하는 기쁨을 맛봐야 한다는 거지. 이때 목표는 상대평가가 아닌 절대적 기준이면 좋겠어. ‘과에서 1등을 하겠어.’ 이건 상대 평가지.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도 나보다 더 열심히 한 사람이 한 명만 있어도 이룰 수 없는 목표. ‘영어책 한 권 외우겠어.’ ‘매일 아침 글 한 편을 쓰겠어.’ 이건 절대적 목표야. 그 누구와 경쟁할 필요도 없어. 오로지 자신과의 싸움이지. 굳이 영어 공부나 글쓰기가 아니어도 돼. 어떤 목표를 이루기로 자신과 약속을 하고, 그걸 해내는 기쁨을 맛보길 바란다. 그게 너의 자신감과 자긍심을 키워주고 연애의 근육을 길러줄 거야.

방위병 생활하면서 외로움에 몸부림치던 너는 도서관에서 안식처를 찾는단다. 여자들이 나를 만나주지 않아도 좋아. 책 속에서 재미난 이야기를 만나면 되니까. 어느 날 울산 시립 도서관에서 연락이 오지. 독서주간을 맞아 다독상을 주는데 네가 최우수상을 받게 되었다고. 궁금한 마음에 물어본단다. “제가 1년간 몇 권의 책을 읽었나요?” “대출권수가 200권이 넘어요.”

1년에 200권을 읽는다는 이야기는 평생 가는 자랑이 된단다. 사실 너는 그 시절 <사조영웅전>, <신조협려>, <의천도룡기> 같은 김용의 무협지나 <태백산맥>, <객주>, <장길산> 같은 대하소설에 꽂혀서 그런 건데 말이지. 물론 그 와중에 너는 연애에 도움이 되는 책들도 읽게 되지. 바로 <사랑의 기술> (에리히 프롬)과 <카네기 인간관계론>(데일 카네기)이야. 특히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를 읽고 너는 삶의 방식을 정하게 된단다. 무엇 하나 더 소유하려고 노력하는 대신, 나를 더욱 가치 있는 존재로 만들기로. <카네기 인간관계론>의 부제는 ‘친구를 만들고 사람들을 움직이는 법’인데, 말 그대로 사람의 마음을 얻는데 도움이 될 교훈으로 가득한 책이지.

1년에 200권의 책을 읽고 복학한 너는 이제 화려한 연애를 시작해. 연극 동아리에 다니는 후배를 만나고, 7살 연하의 미대생도 만나고, 대학원 후배랑 사귀고, 이러다 바람둥이로 늙는 게 아닐까 싶은 순간에 마음을 고쳐먹고 결혼하게 되지. 지금은 17년째 마님을 모시고 얌전히 잘 살고 있단다. 아내를 닮은 어여쁜 딸도 둘이나 얻고 말이지. 

연극 동아리 다니던 후배를 만날 땐 대학로에 가서 연극도 많이 봤단다. 연극에는 원래 관심도 없었는데 여자애에게 잘 보이려고 공부까지 하지. 그 후배에겐 뻥하고 아프게 차였단다. 하지만 그 시절 연극을 즐겨본 기억은 훗날 드라마 PD가 되었을 때 많은 도움이 된단다. 대학 생활하며 숱하게 차였던 너의 연애 잔혹사는 청춘 시트콤 <논스톱> 시리즈를 연출하는 자양분이 되고 말이야.


(이건 서른 살의 '나'란다. 쉰 살의 나는 네게 충격이 될까봐. 딱 10년 후의 모습만 보여줄게. 믿거나 말거나 10년 후, 너는 MBC PD가 된단다. 거짓말 같지? ^^ 살아봐... 알게 될 거야. 스무 살의 너는 상상도 못한 인생이 펼쳐지니까.)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너의 연애는 망할 것이다. 그러나 너의 상처는 훗날 내 인생을 살아가는 밑천이 된단다. 무엇보다 나를 선택해준 아내에 대한 고마운 마음에 봉사하는 자세로 살게 되지. 영어공부니, 독서니, 글쓰기니, 네가 대학시절 했으면 하는 일들이 많지만, 반드시 하라고 권하지는 않을게. 대학 시절이란, 자신의 취향을 찾아가는 시기라고 생각해. 어려서는 부모님이나 선생님이 시키는 공부를 하고, 대학 졸업 후에는 상사나 고객이 시킨 일을 하며 살겠지. 대학을 다니는 동안에라도 너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삶을 살아보기를 권한다. 누가 권하는 것보다 무조건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아.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이든 해도 좋지만, 딱 한 가지 권하지 않는 일이 있다. 절대로 약자를 조롱하거나 혐오하지마라. 약자에 대한 조롱을 재미라고 생각하지도 말고, 타인에게 상처가 될 말이나 글을 통해 즐거움을 찾지도 마라. 인생, 어떻게 될지 모르거든. 훗날 너는 아름다운 아내를 만나 예쁜 딸을 얻게 된단다. 혹여나 그들에게 상처가 될 글이나 말은 절대 남기지마라. 행여나 그런 걸 놀이라고 생각하지마라.

노파심에 잔소리가 지나쳤다면 용서해주렴. 너무 부러워서 하는 말이야. 스무 살이라니, 스무 살이라니! 아, 얼마나 좋은 시절인가. 망할 수도 있고 흥할 수도 있지만, 연애는 그 자체로 참 좋아. 인간에게 주어진 최고의 즐거움이 연애가 아닐까 싶어. 언제해도 좋겠지만, 역시 최고의 연애를 할 수 있는 시기는 20대가 아닐까 싶어.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지만 그래서 더욱 찬란하게 빛나는 스무 살의 사랑. 너의 즐거운 연애를 응원할게,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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