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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독서 일기

노동조합을 해도 괜찮아

by 김민식pd 2017. 6. 9.

2007 여름, 영국 런던에 콘텐츠 진흥원에서 주관한 직무연수를 갔어요. 영국의 창의산업을 보고 배우는 기회였어요. 제가 좋아하는 로맨틱 코미디 영화 <러브 액추얼리> 제작사인 워킹 타이틀 사도 찾아갔어요. 당시 연수 프로그램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 관람도 있었어요. < 미제라블>이나 <라이온 > 보고 싶었는데, <빌리 엘리어트> 보여준다기에 살짝 실망했어요. 제가 기억하는 영화 <빌리 엘리어트> 구성상 그리 스펙터클하지 않았거든요. 뮤지컬의 본고장에 갔으니 화려한 무대 연출을 기대했는데...

 

당시 런던에서는 2005 초연을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 화제였어요. 공연을 보고 나오며 한국의 공연기획사 대표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 작품, 런던에서 보길 잘했어요. 이런 작품은 한국에서 올리는 게 쉽지 않거든요."

" 그렇지요?"

"공연의 주인공 발레리노 남자 아이인데요, 한국에는 어린 나이에 발레를 저렇게 잘하는 남자 아이를 찾기가 쉽지 않아."

아, 그렇구나...

 

당시 공연을 보며 놀랐어. 제가 공연에서는 흑인 아이가 빌리 엘리어트 역을 연기했어요. 부모는 백인인데, 아이는 흑인. 그런데 그게 하나도 이상하지 않았어요.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전개되더라고요. , 피부색은 이야기 전달에 크게 중요하지 않구나... 연속극을 보면 악역 여주인공은 마스카라를 과도하게 그립니다. '나, 악역이야!'하듯이... 감정 표현은 연기나 대사로 하는 게 맞는 것 같아요. 


10년 전에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 떠오른 건, 김두식 교수의 책 <불편해도 괜찮아> 덕분입니다. 영화 <빌리 엘리어트>는 가난한 광부의 아들인 11살의 빌리 엘리어트가 세계적인 발레리노로 성장해가는 과정을 그리는데요. 1984년의 탄광 파업이 시대적 배경입니다. 당시 국영기업인 석탄공사는 수익성이 낮은 탄광 폐광하기로 결정합니다. 전국 탄광 노조가 이에 맞서 파업을 벌였지만, 결국 마가렛 대처의 강공에 밀려 항복을 선언하게 됩니다. 과정에서 탄광촌 주민의 삶은 피폐해지지요. 영화 <빌리 엘리어트> 탄광 파업의 슬픈 패배를 노동자 가족의 시선으로 그려냅니다.


'대 총리는 당시 배상금, 벌금으로 노조의 힘을 빼는 전략을 사용했는데, 이는 '노조의 급소를 쳐서, 영국의 고질병을 치유한' 특별한 병기로 칭송받습니다. 노조간부를 구속하면 노조의 동지애가 발휘되고 간부의 투쟁경력은 화려해지며 불법파업은 어설픈 투쟁의지로 다시 뭉치게 되지만, 민사소송을 걸면 배상금이 클수록 동지애가 작동하기 어렵고 간부 개인에게까지 배상책임을 물으면 단합이 어려워져 노조 단결력에 금이 가게 된다고 친절하게 설명하는 신문이 있을 정도입니다.'

 

(<불편해도 괜찮아> 167)

 


 

2000년에 영화가 나왔을 시트콤 피디였던 저는 영국 탄광 파업의 의미를 몰랐어요. 소년이 꿈을 찾아가는 이야기로만 이해했지요. 2012년에 제가 MBC 노조 집행부의 일원이 되어 파업을 했습니다. 당시 김재철 사장은 저를 포함한 노동조합 집행부 16 195상당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겁니다. 1인당 10 이상 물어내라는 거지요. (저는 없이 전세 사는 말이지요. ^^) 책에서 묘사한 상황을 제가 겪고 나니, 이제는 영화 <빌리 엘리어트>의 이야기가 다시 보입니다. 책 속에 나오는 파업 광부들의 사연이 폐부를 찔러요.

 

 

사람은 자신의 경험치 안에서 세상을 이해합니다. 경상도에서 남자로 태어나, 부부 교사 슬하에서 자랐고, 정규직 노동자로 평생을 살며, 경제적 어려움을 겪어본 적이 없기에, 저는 사회적 약자의 입장을 잘 몰라요. 탄광 노동자의 파업과 투쟁에 크게 공감하지 못했지요. 2012년에 제가 노동조합 집행부가 되고 나니, 이젠 그 입장에 더 감정이입할 수 있습니다.

 

삶의 성장이란 무엇일까요? 경험의 확장이 아닐까요? 날 때부터 머리가 좋아, 늘 1등만 하던 사람이 있고, 매번 꼴찌만 하다 어느날 마음을 고쳐 먹고 노력을 통해 성적이 올라간 친구가 있어요. 둘 중에 성장하는 사람은 후자입니다. 역경과 고난은 어쩌면 사람을 성장하게 하는 좋은 계기일지도 몰라요. 그냥 전교 일등이 성공한 이야기는 재미없어요. 전교 꼴찌가 어느날 반에서 1등까지 올라가는 이야기가 더 재미있지.

 

고난과 역경을 직접 겪기는 쉽지 않습니다. 힘들 거든요. 그럴 때 좋은 것이 독서입니다. 책을 통해 간접경험할 수 있어요. 누군가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고 성장하는 이야기를 읽어, 자극을 받고 나 자신의 성장을 도모할 수 있어요.

 

<불편해도 괜찮아> 노동 인권이나 소수자 인권, 성차별 등 다양한 상황에 대해 이야기하는데요. 책을 읽으며 경험과 사고의 폭을 확장할 수 있어요. 인권에 대한 나의 더듬이 촉을 더욱 예민하게 벼릴 수 있어요. 무심코 지나치며 했던 말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될 수 있다는 걸 깨닫고, 배려하는 자세를 키울 수도 있고요. 다 떠나서, 그냥 책 속에서 나오는 영화와 드라마 이야기가 참 재미있네요. 주말에는 책에 나온 영화를 다시 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최근 극장에서 보고 가장 좋았던 영화...

<노무현입니다>

 

영화를 보면서 느꼈어요. 모두가 강자와 승자의 삶을 동경하면서 살 때 누군가 약자와 패자의 삶을 돌볼 수 있다면, 그가 바로 진짜 승자가 되는구나. 국가가 나서서 노동운동가와 고문 피해자를 탄압할 때, 홀로 나서 그들을 변호한 사람들이 노무현 변호사와 문재인 변호사입니다. 문득 마음이 따듯해집니다. '아, 이제 우리나라는 이런 분들이 지도자가 되는 나라구나... 다른 사람의 아픔을 돌볼 수 있는 분들이...'

 

약자를 지키는 일은 외롭고 힘듭니다. 누군가 그 외롭고 힘든 일에 나설 때, 그 뒤를 묵묵히 지켜주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이제 저는 평 조합원입니다. 다른 이들이 노동조합 집행부가 되었지요. 누군가 외롭고 힘든 그 일을 할 때, 그들의 등을 지켜주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집행부는 아니어도, 평생 노동조합의 일원으로 살고 싶습니다. 노동조합을 했던 것은, 어쩌면 내 평생 가장 잘 한 선택일지 모르니까요. ('마님과의 결혼'이라는 강력한 후보가 있어 감히 '단언코!'라는 표현은 못 쓰겠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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