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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06.25 인생은 어떻게 기억되는가? (14)

어제는 파주 헤이리에 다녀왔어요. 예전부터 김홍모 만화가가 하시는 '뜬금없이 만화방'과 황인용 디제이가 연 음악감상실 '카메라타'를 꼭 한번 가고 싶었거든요.

 

뜬금없이 만화방에서는 옛날에 즐겨보던 '보물섬'을 뒤적거리고, '바벨2세'를 다시 보고, 최호철님의 '을지로 순환선'을 봤어요. 만화 카페에서는 보지 못하는 만화의 전설을 즐겼죠. 만화방에서 뒹굴거리다 점심 먹고 카메라타로 갔어요.

 

어린 친구들은 모르겠지만, 황인용 님은 1970년대, 80년대 최고의 라디오 디제이였죠. 지금은 은퇴하고 헤이리에서 카메라타라는 음악감상실을 열어 찾아오는 손님들을 위해 음악을 선곡해주십니다.

 

 

 

의자에 몸을 묻고 '황인용의 영팝스'를 추억했어요. 10년 넘게 황인용님의 라디오 방송을 들었는데, 정작 기억에 남은 멘트는 방송사고 뿐이었어요. (엥?)

 

언젠가 생방송에서, '자, 그럼 다음 곡 듣고 오겠습니다.'하고 노래로 넘어갔는데, 시디 플레이어가 고장나서 한동안 음악이 흘러나오지 않았어요. 라디오를 켜놓고 공부 하느라, 듣는둥 마는둥 했는데 순간 모든 신경이 라디오에 집중되었습니다. '어라? 방송 사고네? 어떡하지?'

 

한동안 침묵이 흐르고, 황인용님이 다시 마이크를 잡았습니다. 양해를 구하고, 시디를 꺼냈다가 바꿔보기도 하고, 다른 플레이어에 선을 연결하는둥 바쁘게 움직였죠. 라디오를 들으며 그때만큼 긴장해본 적도 없어요. 그때 황인용님의 멘트.

 

'여러분, 죄송합니다. 많이 놀라셨죠? 네, 긴장하셨을 것 같습니다. 라디오에서는 하루 24시간 음악이 이어집니다. 음악이 나오는 동안에는 그 음악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하다 음악이 멈추면 음악의 부재를 문득 깨닫죠. 그러면10초도 안되는 짧은 시간도 아주 긴 고역처럼 느껴집니다. 이렇게 방송사고가 난 다음에야 깨닫지요. 하나의 방송이 무사히 나가는 것도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말입니다.' 

 

10년 넘게 황인용님의 방송을 들었는데, 지금에 와서 기억에 남는 건 그 방송 사고 뿐입니다.

 

생각해보니 어린 시절의 기억도 마찬가지군요. 옆집 아저씨 아줌마가 얼마나 알콩달콩 잘 살았나는 기억나지 않아요. 남편 사업이 망했을 때, 아줌마가 혼자 도망간 것만 기억하죠. 혼자 남은 아저씨가 술먹고 행패 부리고, 아이들이 문 앞에 나와 울던 모습만 기억남습니다. 다른 집에서는 높은 자리에 있던 남편이 회사에서 잘린 후, 전업주부로 살던 아줌마가 동네에 가게를 열고 일하던 모습, 양복에 넥타이만 매고 다니던 아저씨가 리어카로 물건을 받아오며 살던 모습이 기억에 남습니다. 시련은 누구에게나 올 수 있지만, 중요한 건 그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입니다.

 

연출도 마찬가지입니다. 잘 될 때도 있고, 안 될 때도 있습니다. 논스톱처럼 잘 될 때는 500편의 에피소드를 2년반 연속 만드는데 힘이 하나도 안 들어요. 잘 나갈 때는 내 혼자 힘으로 하는 게 아니라, 작가가 잘 쓰고, 배우가 잘 하고, 스태프가 호흡이 잘 맞아서 굴러가는 것이거든요. 연출의 실력과 바닥이 드러나는 순간은 망했을 때입니다.

 

작품이 안되어 망했을 때, 연출은 그 누구도 탓해서 안됩니다. 오롯이 자신의 책임으로 떠안고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쪽팔려서 두번 다시 연출하고 싶지 않을 때, 그때 툭툭 털고 일어나 다음 작품에 다시 도전하는 것, 그게 연출의 진짜 실력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성공과 업적으로 기억되길 바란다면, 죄송하지만 인생의 기억은 그렇지 않다고 말씀드리렵니다. 사람들이 기억하는 건 시련입니다. 시련이 왔을 때, 어떤 모습으로 다시 일어날 것인가. 그걸 기억합니다.

 

MBC, 창사 50주년을 넘기고 언론사로서 최대의 위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이 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참 중요합니다. 망했을 때 잘 망해야 합니다. 그래야 회복할 수 있어요. 10년 뒤, 20년 뒤, 사람들은 지금 MBC 직원들이 어떤 결정을 하고, 어떤 행동을 했는지로 MBC를 기억할 것입니다. 

 

황인용님, 감사합니다. 음악을 들으며 파업 150일, 다시 하루를 이어갈 힘을 얻습니다. 님의 방송 인생 30년 중에 가장 빛나는 순간은 그 방송 사고 때 의연했던 모습이라고 감히 말씀드립니다. 

 

      

넘어지는 건 부끄럽지 않아요. 넘어졌다고 경주를 포기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지요.

 

 

 

 

Posted by 김민식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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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aveourmbc 2012.06.25 08: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들어갔다 148 보고 좀 씁쓸하게 나왔는데... 뭉클. 지켜보는게 힘들다고 투정하면 안되는 거죠? 오늘도 좋은 글로 삭막해지지 않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2. 주르날리스트 2012.06.25 09: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늘 하루도 민식PD님 글 보면서 시작합니다. 주말에 좀 안 좋은 소리를 들어서 고민하고 있었는데 힘을 얻고 갑니다. 저도 PD님 보고 자극받아 블로그 기획하고 있어요. 티스토리에 열까 하는데 초청장 조심스레 부탁드려도 될까요? 오프라인 강연 있으면 알려주세요. 직접 듣고 싶어서요.^^

  3. 2012.06.25 10: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4. 맛돌이 2012.06.25 12: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부끄러운 일은 하지 말아야지요.
    넘어져도 일어나서 달려야합니다.

  5. 강맥주씨 2012.06.25 12:3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앞으로 사회초년생이 되어야할 저에게는 산넘어 산이라고 시련이 엄청 많을텐데... 저는 그 시련이 닥쳤을때 어떻게 재기할수 있을지 문득 궁금해지네요. 지금은 무서울 것 없이 팔팔하지만요!!

  6. mrdragonfly1234 2012.06.25 13:5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 "황인용 아나운서" 라는 단어를 잊고 지내다가 김피디님의 도움으로 다시 끄집어내었습니다. 황인용 아나운서가 은퇴를 해서 조용히 인생을 즐기며 사시는군요.. 저는 음악을 잘 듣지않는 체질이라 황인용 아나운서님이 하시는 방송을 들은 기억이 별로 없습니다만, 구글 이미지에서 찾아보니 얼굴이 매우 낯익습니다. 아주 구수하고 점쟎은 목소리의 아나운서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저는 그분이 아직도 방송을 하고계신 줄 알았습니다.

    넘어진다는 것... 예, 그걸 겪어보지 않는 사람들, 아니면 잊은 사람들은 특징이 있습니다. 좋게 말하면 배짱과 호기가 있다는 것이고, 나쁘게 얘기하자면 겸손하지 않고 덜 익었다고 말할수 있다는 것이겠지요.

    저도 넘어지지 않고 살수만 있다면 그렇게 살고 싶어요....너무 아프니까요...

    아기가 달립니다.. 얼굴에 웃음에 하나가득 웃음을 안고 마구 달립니다.... 보는 사람들이 좀 걱정합니다. (저러다가 넘어지지는 않을까?) 다음순간 꽝 넘어집니다. 다리가 번쩍 들리도록... 그리고는 앉아서 웁니다... 떠나가도록.... 그러나 곧 눈을 비비더니 벌떡 일어나서 다시또 달립니다.. 아무일도 없었던것 처럼....

    • 김민식pd 2012.06.26 07:5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이때는 참 넘어져도 금방 잘 일어났는데, 어른이 될 수록 넘어지는 게 두려워지더군요. 주위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기 시작한 탓이죠. 때론 그래서 아이처럼 살고 싶어요.

  7. ㅎㅎ 2012.06.27 08: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망할 때 잘 밍해야 한다는 말씀이 쏙 들어오네요. 잘 읽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