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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1.11.15 퇴사의 이유 (17)

사람은 언제 잘못을 저지를까요? 세상은 바뀌었는데, 세상 살아가는 규범을 업그레이드하지 않을 때입니다. 젊은 세대가 요구하는 감수성을 갖추지 못한다면, 직장에서는 꼰대가 되고, 사회에서는 '개저씨'가 됩니다. 지난 1년 동안, 독서에 있어 저의 숙제는 세상의 변화를 따라잡는 것이었습니다. 그걸 위해 저는 30대 저자들이 쓴 책을 찾아읽었습니다. 그중에는 <추월의 시대>가 있습니다.

일제 식민지와 한국전쟁이라는 비극을 겪은 후, 한국 사회는 ‘추격의 시대’를 살아왔습니다. 추격자에게는 앞서가는 선발주자가 있지요. 70대가 된 산업화 세대에게는 미국이 추격의 대상이었습니다. ‘우리도 미국처럼 잘 먹고 잘사는 나라를 만들자.’ 그 일념으로 경제성장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50세를 넘긴 민주화 세대에게는 유럽이 지향점이었습니다. ‘우리도 유럽처럼 복지국가를 만들자.’

젊은 청년 세대가 보기에 한국 사회는 할아버지뻘인 산업화 세대와 아버지격인 민주화 세대가 맞서 싸우는 형국입니다. 추격의 시대를 살아온 기성세대는 정치적 입장에 따라 서로를 적으로 규정합니다. 보수는 진보를 향해 ‘종북좌파 빨갱이’라 손가락질하고, 진보는 보수를 일컬어 ‘토착 왜구 독재 잔당’이라 합니다. 젊은 세대가 보기에는 둘 다 시대착오적인 언사예요. 냉전이 종식된 지 언제고, 독재가 끝난 지 언제인데.

기성세대가 롤모델로 삼는 미국과 유럽은 코로나가 터지자 크게 타격을 입었습니다. 타인의 생명보다 자신의 자유를 더 중시하는 이들이 우리가 아는 그 선진국이 맞나? 이미 몇 년 전, 브렉시트와 트럼프의 당선이 사람들의 고개를 갸우뚱하게 했습니다. 미국이 세계의 중심인 줄 알았더니, 정작 당사자들은 그게 싫다고 하네? 유럽연합이 미래의 대안인 줄 알았더니, 영국은 그 공동체에서 탈출하고 있네? 코로나-19 이후 한국은 방역 선진국의 면모를 갖추고, 자신감을 얻었지요. 추격의 시대는 끝나고, 이제는 추월의 시대입니다. 추월의 시대에는 롤 모델이 없어요. 베껴 쓸 모범답안이 없으니, 이제 우리 자신이 새로운 답안을 내놓아야 합니다.

책의 저자들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아요. “기성세대 여러분 모두 고생 많으셨습니다. 산업화 시대의 역군들 덕분에 굶주리던 나라가 잘 먹고 잘사는 나라가 되었고, 민주화 시대의 투사들 덕분에 정치 선진국이 되었습니다. 경제 발전도 이루고 정치 민주화도 일궜으니, 여러분은 역사적 소명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셨습니다. 이제 물러나 여생을 즐기시면 됩니다.”


<추월의 시대> 책 곳곳에는 저자 사진이 나옵니다. 30대 저자들이 팔짱을 끼고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하죠. 그들의 눈빛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저희들 20대, 30대는 단군 이래 최고의 스펙을 갖추고, 역사상 최악의 취업 경쟁을 통해 단련된 젊은이들입니다. 새로운 시대는 이제 저희에게 맡겨주시고, 선배님들은 쉬세요.’

저는 전형적인 ‘추격의 시대’형 인간입니다. 20대에는 영어를 공부하기 위해 미국 시트콤 <프렌즈>를 즐겨 봤고, 30대에는 그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형 청춘 시트콤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40대가 되어, 우리도 선진국처럼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방송사 노조 활동을 했고요. 회사 내에서도, 사회에서도, 나름의 최선을 다하며 살았습니다. '시대적 소명을 마무리했으니, 이제는 물러나도 되겠구나.' 하고 느꼈어요.

한국 사회를 진단한 또 다른 책에 <세습 중산층 사회>가 있습니다. '90년대생이 경험하는 불평등은 어떻게 다른가'라는 무거운 질문을 던집니다. 책에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다소 위악적으로 말하자면 80년대 학번-60년대생의 노동시장에서의 기득권을 타파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현재 50대인 그들에 대한 대규모 명예퇴직과 정리해고다. 1997년 IMF 외환위기 당시 80년대 학번의 선배들인 고참 관리자들이 대거 정리해고됐던 것처럼 현재 50대 중반 정도로 생산성보다 훨씬 더 많이 급여를 받아가는 80년대 학번을 내보내고, 그 자리를 젊은 20대로 채우는 게 정부, 공공기관, 기업 입장에서 차라리 더 효과적이고 작동 가능한 해결책이다. 그리고 그렇게 채운 20대들부터 직무급을 도입한다면 대규모 채용과 임금 구조 개편을 맞바꿀 수도 있다. 조직 전체의 임금 구조 개편은 어렵지만, ‘신참’을 대상으로 국한시킬 경우 성공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이다.’

사표를 쓸까 고민할 때, 회사의 후배들을 떠올렸어요. 24년간 MBC를 다니면서 무척 행복했습니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 일할 수 있었기 때문이지요. 특히 제가 만난 후배들은 하나같이 똑똑하고 정의로웠어요. 그들이 세대교체의 주역으로 새로운 시대에 걸맞을 모범답안을 내놓을 것이라 생각했어요.

MBC가 정치적으로 힘들던 시절이 있었어요. 그때는 저도 힘들고, 다들 힘들었습니다. 모두가 힘들 때, 혼자 달아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함께 버텨주는 사람이 되고 싶었죠. 이제 회사가 힘겹게 정상화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물론 지금도 힘들지요. 하지만 지금 닥친 고난은 신뢰의 위기가 아니라 시장의 위기입니다. MBC가 당면한 가장 큰 시련은 기술의 변화와 미디어 시장 개편에서 옵니다. 새로운 시대에 걸맞는 답은, 새로운 세대가 내놓을 것입니다. 저의 역할은 끝났다고 느꼈으므로, 마음 편히 사직서를 쓸 수 있었어요.

세상에서 물러나 무엇을 하며 살 것인가? 남은 평생, 저는 책을 읽으며 지낼 것입니다.

젊은 세대가 쓴 책을 읽으며, 세상의 변화를 공부하며 살고 싶습니다.

Posted by 김민식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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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리아리짱 2021.11.15 06:3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김민식 작가님 아리아리!

    역쒸~!
    김민식 피디님, 아니 김민식 작가님 은~!
    피디님이 사직하셨다는 소식에 글친구들과 걱정을 나누었습니다.
    모두들 피디님의 개인 변화에 마음 아파 했었어요.
    그때 제가 그랬어요. 피디님은 개인의 안위보다 아마 더 큰 생각이
    있을 것이라고요.
    어쩌면 MBC를 사랑해서 내리신 결론 일지도 모른다고요!

    오늘글을 읽으며 전율이 느껴졌습니다.
    작가님 앞으로 더 많은 책읽으시고 더 좋은 글로 세상을 밝혀주셔요!
    김민식 작가님 아리아리! 아자아자!

  2. 익명 2021.11.15 06:3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3. 달빛마리 2021.11.15 07:4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떤 이유에서 비롯되었든 큰 결정을 하셨어요. 이제 뒤돌아 보지 마시고 늘 원하셨던 : 책 읽고 글쓰며 사람들과 소통하시는 행복한 작가님이 되시길 바랍니다 :)

  4. 보리랑 2021.11.15 08: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젊은이에게 귀기울이는 피디님 멋지십니다 👏 역시 책이 물흐르듯 살도록 잘 안내해주는군요. 공존이 공동의 책임임을 알도록 좀더 깨어있어야겠습니다.

  5. sara_yun 2021.11.15 08:1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는 피디님의 퇴사 소식을 들었을 때 마음이 조금 아팠었습니다. 하지만 그만둔다는 것이 아니라 내려놓는다는 생각을 가지셨다는 것에 또한번 감탄합니다. 또 지난 20몇년간 피디생활을 하시면서 무척 행복하셨다는 것에 부러움을 느꼈습니다. 저도 보장된 미래보다는 행복한 미래를 꿈꾸려고 합니다!

  6. 유튜브 창작동화채널 2021.11.15 11: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책을 읽고 배우고 익히며 나를 변화시키는 삶이야말로 정말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직장일에 치여 책읽을 시간이 없다는 핑계는 이제 그만하고 다시 열심히 독서의 세계로 나가도록 이끌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독서 고고~~~

  7. 우리상희 2021.11.15 13:2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와 너무 멋지십니다 .. 젊은이에게 귀을 기울이는게 생각보다 쉽지 않은데 말이죠

  8. 바람향기 2021.11.15 14:1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혹시나 했는데...
    감동의 순간을 조금 더 누리려고 지나간 글 좀 읽으면서 진정시킨 후 오늘 글 읽었습니다.
    무척 반가워요~^^
    책 읽으면서 세상 변화를 공부하신다는 말씀에 든든합니다~저도 동참해도 되겠지요.
    역쉬~멋집니다^^

  9. 미숭 2021.11.15 15: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작가님.
    제가 사무실에서 항상 작가님 블로그 들어왔었거든요
    너무너무 기다렸는데
    작가님 새 글보고 눈물날뻔했어요..........

  10. 코코자야 2021.11.16 20: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몇년전 YMCA강의들은 후 강사님 글"공짜로 즐기는 세상" 온라인에 가끔 접속해서 읽으면서 공감했었습니다. 몇개월만에 접속했더니 다시 글쓰기를 시작하신 것 같아 반갑습니다. 좋은 글들 읽을 기회를 주셔서요. 멋지십니다!

  11. 섭섭이짱 2021.11.17 09:4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세요...

    글을 읽으면서 퇴사하시기까지 고민이 많으셨다는게 느껴지네요
    이제 하시고 싶으신거 맘껏 하시며 즐겁게 보내세요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작가님의 멋진 날들 응원합니다.

  12. 김주이 2021.11.19 08:4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글을 읽고 댓글을 쓰려고 보다가 섭섭이짱님의 댓글까지 읽었습니다.
    퇴사까지의 결정이 쉽지않으셨겠지만, 그 결정을 지지합니다. 그동안 많은 것들 해오시면서 스스로 개인기업이 되셨으니 이제 다시 그 모든 역량을 마음껏 쓰시고 즐기시면서 행복하게 보내세요.
    항상 응원하겠습니다.

  13. 오달자 2021.11.29 08: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작가님의 새로운 출발에 힘찬 박수를 보내드립니다~~^^

  14. 게리롭 2021.12.02 10:2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기성세대라도 세상의 흐름을 읽을줄알고 탈줄아는 기성세대가 있는 반면
    젊은층이라도 정체되있는 사람들이 있지요
    저는 피디님이 세상이 변화되는걸 잘 감지하시고 준비하는 분이라고 생각이 들어
    오히려 퇴사하신게 MBC에서는 마이너스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좀 듭니다.

    사실 저도 작년에 반강제적으로 퇴사를 당했어요
    코로나때문에요... 관광업계가 코로나에 직격탄을 맞아서요
    제가 잘못한건 1도 없는데 역병때문에 이런일을 당하니 참 허망했지만
    오히려 제 삶의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고용지원금, 실업급여를 받으면서 그동안 못했던 자기계발을 열심히 했거든요
    지금은 코로나의 영향을 1도 받지 않는곳에 다니고 있습니다

    피디님 퇴직 후 어떤 멋진 활동을 펼치실지 기대가 됩니다

  15. Change doesn't happen suddenly 2021.12.19 16:1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후배 세대로서 선배 세대의 생각을 보고 배웁니다.
    감사합니다.

  16. 꿈트리숲 2021.12.26 14:5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치에 관심없이 2~30대를 지내왔지만 염치없게도 지금의 2~30대에게 바라는게 있어요. 꼭 정치 민주화를 이뤄줬으면 하는 겁니다. 상대방을 헐뜯어 하향평준화를 만드는게 아니라 상대에 버금가게 더 성장하려고 애쓰는 상향평준화 대한민국이 되면 정말 좋겠네요.

  17. 세렌디피티 2022.01.01 12: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대, 30대 작가님들의 글을 보며
    자녀을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어요.
    그동안 얼마나 나 중심으로 살았는지 되돌아보기도 하구요.
    이렇게 작가님글을 만날 수 있게 되어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