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거꾸로 가는 서울둘레길

by 김민식pd 2020. 6. 2.

지난 주말, 아버지를 모시고 이수역에 있는 최연태 참치에서 점심을 먹었어요. 참치회 정식이 12000원. 이 가격에 회를 실컷 먹기 쉽지 않은데요. 회에, 초밥에, 매운탕까지 나옵니다. 코스 요리인데 가성비가 쩌는 곳이지요.



(음식이 나오자마자 한참 먹다가 찍은 사진이라 접시가 살짝 비어보이네요. 원래는 더 푸짐합니다. ^^)

 

아버지의 말씀을 듣다보면, 자꾸 초라해집니다. 아버지는 어린 시절부터 저를 참 힘들게 해요. 다른 사람이 상처 주는 말을 하면, 그냥 안 보면 그만인데, 가족은 상처를 받으면서도 계속 만나야 하니, 그게 참 어렵네요. 

점심 먹고 나오니 아버지는 운동 가시고 저는 집을 향해 혼자 걷습니다. 누군가 나를 힘들게 하면, 나는 스스로에게 선물을 줍니다. '오늘 힘들었지? 옛다, 선물이야.' 즐거운 시간을 스스로에게 줍니다. 집에까지 전철을 타고 가는 대신, 오늘은 걷기 여행을 선택합니다. 

마침 이수역 근처 사당역에는 서울둘레길 우면산 코스 입구가 있어요. 사당역 3번출구를 지나 남태령 방향으로 걷다보면 리본이 달려있고요. 

방배우성아파트 옆으로 서울둘레길 표지가 보입니다. 주말 낮이라 그런지 등산복을 입고 골목을 나오시는 분들이 많네요. 

대모 우면산 코스는 수서역에서 출발해 사당역까지 오는 8시간 코스인데요. 저는 양재역 방면 집으로 가기 위해 반대 방향으로 걷습니다.

산을 향해 걷다 보면 텃밭도 보이고, 고철 처리장도 있어요. 서울치고는 낯선 풍경인데요. 산책 나온 가족이 있는데 아이가 볼멘 소리를 하더군요.

"아니, 왜 이런 시골까지 온 거야!"

너무 웃겼어요. 5분만 걸어가면 2호선 사당역이 나오는데. 

곧 산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오랜만이네요. 빨간 서울둘레길 스탬프 통. 꼭 우체통처럼 생겼어요. 예전에 둘레길 완주를 위해 다닐 때는 이 빨간 통이 나올 때마다 그렇게 반가웠어요. 

점심을 먹으며 아버지가 하신 말씀.

"넌 노후대비는 열심히 하냐? 너 그렇게 살다 집에서 쫓겨나면 거지 된다."

아들이 노후에 거지가 된다는 상상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요? 애써 웃으며 말합니다.

"걱정 마세요, 아버지. 제가 제 앞가림은 알아서 할게요."

"네가 아무리 잘 해도, 남자는 늙으면 힘이 없어요. 집에서는 구박데기요, 집 나가면 고생이야."

아버지는 자신의 불안을 자식에게 투사하는 행위가 사랑인줄 알아요. 어렸을 때는 공부 열심히 하라고, 커서는 결혼하라고, 결혼하면 아들 낳으라고, 나이 들면 집 사라고, 늙으면 노후대비하라고 잔소리...... 정말 끝이 없어요.  

마치 제 삶을 응원하는 게 아니라, 저주를 퍼붓는 것 같아요. 당신은 걱정에서 하시는 말씀이겠지만, 아들이 쉰이 넘었는데, 이래라 저래라 여전히 참견하는 건 참...

'글쓰면 굶어 죽는다.' '노조하면 굶어 죽는다.' '애비 말 안들으면 굶어 죽는다.' 제 인생에 질기게 딴죽을 걸지만, 아버지 말 안 들은 덕분에 이만큼 산다고 생각해요.  

때로는, 거꾸로 가는 게 행복입니다. 반드시 부모의 뜻대로 산다고 행복한 건 아니더라고요.

계획에 없던 산행을 했더니, 도중에 목이 마르네요. 국립국악원으로 가는 샛길 팻말을 보고 우면산 자락 예술의 전당으로 갑니다. 자판기에서 생수 한 병 뽑아 시원하게 목을 축입니다. 마침 세계음악분수에서 분수쇼를 하는군요. 토요일 14시부터 50분간. 음악도 듣고, 물구경도 하다 다시 걷습니다.


예전에 걸었던 길인데, 왜 이렇게 낯설까요? 거꾸로 걸어서 그런 것 같아요. 예전에 서울둘레길 완주를 시도했을 때는 1코스에서 시작해서 우면산을 거쳐 관악산으로 갔거든요. 문득 서울둘레길을 역주행으로 걷고 싶어졌어요. 올 한 해, 코로나로 인해 세계 경제가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할 것이라는 예상이 있지요. 인생에 어찌 직진과 성장만 있을까요. 때로는 정체도 있고, 후퇴도 있는 거지요. 올해는 거꾸로 가는 한 해라 생각하고 그 속에서 의미를 찾아보려고요.

산길을 걷다 호젓한 정자를 만나면 잠시 누워 새소리를 들으며 쉬었다 가기도 합니다.

3시간 정도 걸었더니 양재 시민의 숲이 나옵니다. 이곳에는 서울 둘레길 안내센터가 있고요. 

무료 배부하는 스탬프 책자를 얻어 도장을 찍습니다. 

"참 잘했어요." 짝짝짝!

부모라 해도 내 삶을 긍정해주지는 않아요.

누가 내 삶을 긍정해줄까요? 바로 나 자신이지요.

오늘도 스스로를 위로하고, 스스로를 격려하며 살아갑니다. 

코로나 시대의 여행으로, 서울 둘레길 걷기 만한 여행도 없어요.

역주행 둘레길 걷기,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