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아버지를 모시고 이수역에 있는 최연태 참치에서 점심을 먹었어요. 참치회 정식이 12000원. 이 가격에 회를 실컷 먹기 쉽지 않은데요. 회에, 초밥에, 매운탕까지 나옵니다. 코스 요리인데 가성비가 쩌는 곳이지요.



(음식이 나오자마자 한참 먹다가 찍은 사진이라 접시가 살짝 비어보이네요. 원래는 더 푸짐합니다. ^^)

 

아버지의 말씀을 듣다보면, 자꾸 초라해집니다. 아버지는 어린 시절부터 저를 참 힘들게 해요. 다른 사람이 상처 주는 말을 하면, 그냥 안 보면 그만인데, 가족은 상처를 받으면서도 계속 만나야 하니, 그게 참 어렵네요. 

점심 먹고 나오니 아버지는 운동 가시고 저는 집을 향해 혼자 걷습니다. 누군가 나를 힘들게 하면, 나는 스스로에게 선물을 줍니다. '오늘 힘들었지? 옛다, 선물이야.' 즐거운 시간을 스스로에게 줍니다. 집에까지 전철을 타고 가는 대신, 오늘은 걷기 여행을 선택합니다. 

마침 이수역 근처 사당역에는 서울둘레길 우면산 코스 입구가 있어요. 사당역 3번출구를 지나 남태령 방향으로 걷다보면 리본이 달려있고요. 

방배우성아파트 옆으로 서울둘레길 표지가 보입니다. 주말 낮이라 그런지 등산복을 입고 골목을 나오시는 분들이 많네요. 

대모 우면산 코스는 수서역에서 출발해 사당역까지 오는 8시간 코스인데요. 저는 양재역 방면 집으로 가기 위해 반대 방향으로 걷습니다.

산을 향해 걷다 보면 텃밭도 보이고, 고철 처리장도 있어요. 서울치고는 낯선 풍경인데요. 산책 나온 가족이 있는데 아이가 볼멘 소리를 하더군요.

"아니, 왜 이런 시골까지 온 거야!"

너무 웃겼어요. 5분만 걸어가면 2호선 사당역이 나오는데. 

곧 산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오랜만이네요. 빨간 서울둘레길 스탬프 통. 꼭 우체통처럼 생겼어요. 예전에 둘레길 완주를 위해 다닐 때는 이 빨간 통이 나올 때마다 그렇게 반가웠어요. 

점심을 먹으며 아버지가 하신 말씀.

"넌 노후대비는 열심히 하냐? 너 그렇게 살다 집에서 쫓겨나면 거지 된다."

아들이 노후에 거지가 된다는 상상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요? 애써 웃으며 말합니다.

"걱정 마세요, 아버지. 제가 제 앞가림은 알아서 할게요."

"네가 아무리 잘 해도, 남자는 늙으면 힘이 없어요. 집에서는 구박데기요, 집 나가면 고생이야."

아버지는 자신의 불안을 자식에게 투사하는 행위가 사랑인줄 알아요. 어렸을 때는 공부 열심히 하라고, 커서는 결혼하라고, 결혼하면 아들 낳으라고, 나이 들면 집 사라고, 늙으면 노후대비하라고 잔소리...... 정말 끝이 없어요.  

마치 제 삶을 응원하는 게 아니라, 저주를 퍼붓는 것 같아요. 당신은 걱정에서 하시는 말씀이겠지만, 아들이 쉰이 넘었는데, 이래라 저래라 여전히 참견하는 건 참...

'글쓰면 굶어 죽는다.' '노조하면 굶어 죽는다.' '애비 말 안들으면 굶어 죽는다.' 제 인생에 질기게 딴죽을 걸지만, 아버지 말 안 들은 덕분에 이만큼 산다고 생각해요.  

때로는, 거꾸로 가는 게 행복입니다. 반드시 부모의 뜻대로 산다고 행복한 건 아니더라고요.

계획에 없던 산행을 했더니, 도중에 목이 마르네요. 국립국악원으로 가는 샛길 팻말을 보고 우면산 자락 예술의 전당으로 갑니다. 자판기에서 생수 한 병 뽑아 시원하게 목을 축입니다. 마침 세계음악분수에서 분수쇼를 하는군요. 토요일 14시부터 50분간. 음악도 듣고, 물구경도 하다 다시 걷습니다.


예전에 걸었던 길인데, 왜 이렇게 낯설까요? 거꾸로 걸어서 그런 것 같아요. 예전에 서울둘레길 완주를 시도했을 때는 1코스에서 시작해서 우면산을 거쳐 관악산으로 갔거든요. 문득 서울둘레길을 역주행으로 걷고 싶어졌어요. 올 한 해, 코로나로 인해 세계 경제가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할 것이라는 예상이 있지요. 인생에 어찌 직진과 성장만 있을까요. 때로는 정체도 있고, 후퇴도 있는 거지요. 올해는 거꾸로 가는 한 해라 생각하고 그 속에서 의미를 찾아보려고요.

산길을 걷다 호젓한 정자를 만나면 잠시 누워 새소리를 들으며 쉬었다 가기도 합니다.

3시간 정도 걸었더니 양재 시민의 숲이 나옵니다. 이곳에는 서울 둘레길 안내센터가 있고요. 

무료 배부하는 스탬프 책자를 얻어 도장을 찍습니다. 

"참 잘했어요." 짝짝짝!

부모라 해도 내 삶을 긍정해주지는 않아요.

누가 내 삶을 긍정해줄까요? 바로 나 자신이지요.

오늘도 스스로를 위로하고, 스스로를 격려하며 살아갑니다. 

코로나 시대의 여행으로, 서울 둘레길 걷기 만한 여행도 없어요.

역주행 둘레길 걷기,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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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바람향기 2020.06.02 10:2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의 엄마랑 만나면 쿵쾅쿵쾅 다툽니다.
    그럼에도 가족이라 다시 만나고 헤어지고 또 걱정합니다.
    지난 일요일에 만나서 점심 같이 즐겼는데 맛나게 드셔서 보기 좋았습니다.
    저 역시 화내고 분노하면 강변따라서 계속 걸어요.
    제가 살고 있는 곳도 아름다운 강이 흘러서 꽤 위안을 받습니다.
    각자 삶에서 늘 충분히 잘 살고 계시는 세상의 모든 분들께 늘 응원합니다.^^

  3. 나우액션 2020.06.02 10:2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랑의 표현이 서툴러서이지 않을까요? 물론 좋은 말로 포장한 것이지만요...^^

    저희 아버지도 PD님 아버님처럼 말씀하세요. 약주 한 잔 하시면 무한 반복입니다.ㅋㅋㅋ
    젊을때는 그 잔소리가 너무 싫어서 자리를 박차고 나오곤 했는데 지금은 가만히 앉아서 듣고 있어요.
    제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지만 아버지는 계속 같은 이야기를 몇번이고 반복하시죠.

    전에는 아버지가 무뚝뚝하고 말씀이 없으시다 생각했는데 요즘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있노라면 그래도 말씀이 없으신건 아니더라구요.ㅎ

    제가 젊었을 땐 아버지도 젊으셔서 무뚝뚝하셨는데 지금은 말씀이(잔소리...ㅎ)많아지신것 같아요.
    조금이라도 자식들에게 무언가를 남겨주시고 싶으신걸까요? 살아생전에 본인이 원하는 모습의 자식을 보고 싶으신걸까요? 걱정에 의한 말씀인걸 알지만 받아들이기엔 아직 저도 인생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4. 코코 2020.06.02 10: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늘 피디님 글 읽으니 참 많이 공감돼요.
    너 생각해서 하는 말이다..부모가 자식에게 이런 하소연도 못 하니..등
    부정적인 말들, 비교의 말들, 전혀 궁금하지 않은 타인의 가십들을
    항상 쏟아내시거든요. 그런 말을 몇 시간 듣고 나면 혼이 다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어요.
    머릿속은 왕왕거리고 속은 울렁거린답니다.
    한참을 걷고 또 걸으며 마음을 달래야 좀 진정되곤 했어요.

    이젠 나름 방법을 찾아서 서로 적당한 거리를 두고 있답니다.
    부모님과 이런저런 속 얘기를 터놓고 마음을 나눌 수 있다면 참 좋을 텐데
    저는 그게 힘들더라고요.
    부모님을 사랑하지만 감사한 마음 크지만,
    한편으론 어느 정도 거리를 둘 수밖에 없는 관계..
    좀 복잡한 마음이 드네요.

    응원합니다. 피디님^_^
    속상한 마음 내보내시구요.
    애정하는 일들로 오늘 하루도 가득 채우시길 바래요.
    화이팅!

  5. 보리랑 2020.06.02 10: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늘진 숲길 넘 좋네요.
    사진기술이 좋으신건가요? ㅎㅎ

    걸을 곳이 많은 우리나라 정말 좋은 나라입니다. 검색어에 헬조선, 이민 확 줄었다네요~~

  6. jemmay 2020.06.02 11:2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pd는 같이 성공하신분도 부모님의 눈에는 부족한거 보니. 타인의 소리보다 내 자신의 목소리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7. Jenny 2020.06.02 11: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피디님 글은 언제나 친근하고 참 좋아요.
    제 친정아버지 65세에 일찍 돌아가셨어요...
    아버지의 지긋지긋한 잔소리가너무 그립습니다.맛있는 것도 사드리고 싶고 손잡고 산책도 하고 싶은데...
    이것저것 후회되는 일이 많네요.
    저는 애들에게 잔소리 안할려고 노력하는데 쉽지 않네요~ㅎ
    좋은글 늘 감사합니다^^

  8. 정초아 2020.06.02 11:5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코로나로 거리두기가 실천키워드인데
    관계에서도 일정 거리두기는 누구든 부부든 자녀이든 필요한듯 합니다

  9. 바람처럼 2020.06.02 12:3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부모님의 걱정은 끝이 없는거 같아요..
    속상함과 서운함을 걷기로 풀어내고...
    또 글로써 공감을 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아버님 말 안들어서 이만큼 잘 살고 있다는 말에 빵! 터졌어요.
    우리 아이들도 이렇듯..말을 안 들으며..자기 인생을 책임지며 살아가겠죠..
    아이들과 지지고 볶으며 지내는 요즘..
    부모말 안들어 너무나도 잘 살고 계신 피디님 글에서 희망을 봅니다..
    말 안 듣는게 당연한거죠...

  10. 휘게라이프 Gwho 2020.06.02 13:0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늘도 글 잘 보고가요 ^^~ㅎㅎ
    정성스런 글~~ 자주 올려주세요 :-)

  11. 나겸맘 리하 2020.06.02 13: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내 모든 습관은 여행에서 만들어졌다>
    그책에서도 아버님과의 에피소드가 재미있었던 이유가.
    피디님께는 전혀 보이지 않는 낯설고 독특한 면을
    아버님께서 많이 지니고 계셔서였던 것 같아요.
    제 3자의 시선으로 볼때
    아버님께서는 굉장히 특별하십니다^^

    시트콤에서도 독특한 캐릭터가
    등장해 줘야 극에 활기도 돌고 재밌잖아요.
    이순재. 오지명. 신구 등등....
    그 아버님들이 굉장히 웃기셨죠.
    시청자 마인드로 보면 웃음주고 정감가는 인물이죠.

    시트콤1등 피디님이시니...
    아버님과 만나셔서 잔소리 들으실때마다
    시트콤 캐릭터와 웃긴 상황. 하나씩 발굴하신다고
    생각해 보시면 어떨까요?^^
    (그 사연들만 모으셔도 입체적 인물 완성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자주 만나셔서 식사대접하시고
    함께 여행 다니시는 피디님은 진짜. 참 좋은 분이십니다!!!
    그 선함이 따님들께 그대로 전해질 거예요.^^
    좋은 아빠 둔 복받은 따님들~~

  12. 작은습관의힘 2020.06.02 15: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반성합니다. 저도 아이들에게 어른들의 경험치에서 나온 말이라고 늘 어른들 말 들으면 손해볼 게 없고, 더 지혜롭고 빨리 도달할 수 있다고하거든요. ㅠㅠㅠ 그러면서 속으로 반성합니다. 아이들에게는 결국 스스로 오롯한 깨달음은 직접 부딪쳐 보고 직접 깨져보고, 경함해보고 성취, 좌절속에서 얻어지는 것이 진정 가치있음을...저도 오늘부터 더 좋은 부모가 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13. 조영주 2020.06.02 19:1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스탬프책자밖에 안보입니......모으고싶다ㄷㄷ

  14. 새벽부터 횡설수설 2020.06.02 20:3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에게도 많은 혼란이 있었어요.
    부모님의 잔소리가 싫은데.. 이게 혹시 맞는 이야기가 아닐까?하면서 나의 의견과 부모의 의견의 진위를 가려내는 것 말이에요.

    부모도 자식에게 배울 점은 배워야 하는 것 같아요!

  15. 김주이 2020.06.02 23:3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우와 좋은 길 소개 감사합니다.
    저의 최애 장소들과 동네의 이곳저곳들이엮여있어서 즐겁게 보았습니다.

    저도 제 삶을 긍정하며 나아가겠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16. 오달자 2020.06.03 00:4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올 해는 거꾸로 가는 한 해~~ 라고 편하게 생각할래요~~저두요..

    부모님 눈엔 그져 어린 애로밖에 안보이는 자식들 걱정에 이 세상 끝날때까지 그 걱정은 끝이 안날 듯 보입니다.

    지난 주 '쿠팡'사태가 터진 후, 저희 아버지께서 이른 아침부터 전화가 오셨어요.
    야야~~ 쿠팡 시키지마래이~~

    ㅎㅎ 저는 그져 '예'~ 라고 대답은 했지만, 사실 배달로 생필품을 사는 저로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자식을 객관적 잣대로 한발자국 떨어져 보는 지혜를 가지는 어른이 되어야겠습니다.^^

  17. 새싹 2020.06.03 10:2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PD님~ 툴툴대시면서도 아버지랑 만나서 식사도 하시는 모습이 제 눈에는 참 좋아보이기만 합니다. 웃음도 나고요^^ 저도 어머니께 상처를 받을 때가 많은데 이젠 나름 기술이 늘어서 들을 소리는 듣고 아닌 소리는 그냥 흘려듣는 “제 맘대로 듣기 신공”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ㅎㅎ 유한한 인생, 이승에서 함께 할 때 열심히 부대끼자는 마음으로 만납니다 ㅎㅎ 찍어두신 둘레길 사진에서 풀내음이 나는 것 같아요. 저도 주말엔 둘레길 찾아 나서야겠습니다. :)

  18. R2025 2020.06.03 14:4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참 잘하셨습니다.

  19. 달콤한장혜 2020.06.10 11:0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자신의 불안을 자식에게 투사하는 행위가 사랑인줄 안다. 너무 와닿는 말이라 댓글남깁니다.
    예수님도 자기고향에선 인정 못 받았다자나요.. 아버님이 보시기엔 아직 부족한 아들일지 모르지만 제가 보기엔 너무 용감(김장겸은 물러나라~)하시고 한없이 멋있으십니다. 작가님 존경합니다.

  20. 저녁노을함께 2020.06.10 20: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바탕화면에 pd님 바로가기가 있어서 2년간은 매일 접속했었는데...이제보니 구독하기도 안 되어 있었네요. 쩝
    그런데 정말 대단하셔요. 어찌 이렇게 더운데 걸을 생각을 하 실 수 있으신지....에너지짱 pd님 늘 응원합니다.

  21. 슬아맘 2020.06.11 17: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버님은 pd 님의 인기를 모르시나봐요.
    더도 말고 덜도말고 피디님처럼 살고 싶은 사람들이 엄청 많을텐데요
    덕분에 좋은 서울 둘레길 구경 잘했습니다.

    사랑의 표현이 다를테니 ,저도 혹시 사랑이란 이름으로
    애를 힘들게 하고 있지는 않은가? 뒤돌아 봅니다.
    오늘도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