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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길티 플레저

by 김민식pd 2020. 2. 4.

오늘은 저의 '길티 플레저'를 소개합니다. 평소 혼자 페북을 보며 낄낄거릴 때가 있어요. 페북의 슈퍼스타 '도끼녀' 에밀리님의 글을 읽을 때지요. 호러 로맨스인지, 느와르형 스릴러인지 정체를 알 수 없는 '도끼질 글쓰기'. 코미디 피디로서, 에밀리님의 글을 보며 반성합니다. '나는 이렇게 웃기는 글을 왜 쓰지 못하는가?' 그러다 다시 정신을 차리지요. '어디 감히 비교질이야! 에밀리님이 새 글을 올려주셨으면 공손하게 무릎꿇고 앉아 조신하게 읽을 일이지.'

에밀리님의 책이 나왔습니다. 은둔 고수가 드디어 무림에 모습을 드러내는군요. 예약주문을 걸고 택배 기사님 오시기만 기다렸습니다. 책을 읽으며 고민입니다. 곳곳에 음담패설과 욕설이 난무합니다. 어떤 글을 소개해야할지 좀 난감하네요. 책에서 재미난 대목에는 어김없이 야한 농담이 있거나, 찰진 욕이 나오거든요. 자칫 저의 왜곡된 성적 욕망이나 숨겨진 언어습관이 드러날까봐 전전긍긍, 노심초사 하다 추천사를 보며 용기를 냅니다.

- 글 곳곳마다 단어와 도끼를 써야 할 곳을 예리하게 찾아서 아주 명석하게 배치하고 있다. 그래서 그 도끼에 맞아도 오히려 힘이 나게 될 뿐 아니라, 이 혼란한 사회를 도끼로 찍어내는 통쾌함을 선사한다. 

- 가수 전인권.

-그녀의 글에는 기존 작가들과는 차원이 다른 원시적인 생명력과 문제의식이 살아 있다. 삶의 지혜가 반짝이는 글발은 또 얼마나 찰진지! 방송작가로 치자면 예능 작가의 재치와 드라마 작가의 입담에다 시사 다큐 작가의 문제의식까지 두루 갖춘 내공 깊은 고수라고 할까?

- <PD수첩> 작가, 정재홍

평소 에밀리님의 글을 남몰래 흠모하던 이들이 대거 커밍아웃하셨네요. 그중에는 <PD 수첩>의 한학수 피디도 있어요.

- 에밀리는 도끼 하나로 SNS 세상을 평정해가고 있다. 그녀의 도끼에는 인정사정이 없는데, 하루가 멀다 하고 재수 없는 아재들과 꼰대들이 맞아나간다. 이 도끼 앞에서 수많은 가식과 엉큼한 속내가 박살이 난다.

- MBC 한학수 피디

에밀리님의 글을 읽을 때는 통쾌하면서 한편으로는 움찔! 합니다. '이거 혹시 내 이야긴가?' 꼰대, 가부장들을 응징하는 에밀리님의 도끼날은 날카롭기 그지 없습니다.

 

# 반면교사

어느 날 직장 남자 후배를 길에서 우연히 만났어. 난 그의 바지 지퍼가 열려 있음을 발견했어. 파란 청바지와 그 안의 붉은 속옷은 흡사 우주의 생성 원리를 나타낸다는 태극을 연상시켰어. 

뭔가 생성된다는 걸 표시했다면 올바른 표시인 건 맞지만 나는 그 순간 그가 태극기 부대나 대한애국당으로 오인 받을까 너무나 걱정된 나머지 아주 부드럽게 은유적으로 지퍼가 내려갔음을 알려주었어. 그가 나의 이런 센스에 반할까 약간 두려워하기까지 하면서. 그런데 다음날 직장엔 웬 변태 '개줌마' 한 마리가 있다는 소문이 돌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년이 어이없게도 나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 그것도 남자 거시기만 쳐다보고 다니는 최악질 변태.

난 지금도 남자 얼굴과 가슴까지밖에 못 쳐다봐. 내가 좋아하는 배 나온 남자의 동그랗고 예쁜 배를 보는 즐거움을 빼앗겨 안타깝긴 하지만 시선을 더 아래로 내렸다간 직장 전산망에 변태 개줌마로 분류되고 전자발찌를 채우거나 전자안경(시선이 일정 높이 아래로 내려가면 눈탱이를 치는)을 씌울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 사로잡혀 있기때문이야.

내가 이 얘기를 하는 이유는 여자 연예인이 브라 했는지 안 했는지 등에 대해 관심 끄라는 거야. 내 꼴 나기 전에.

(178쪽)

누가 나 대신 호쾌하게 욕을 해주는 통쾌함! 이게 바로 길티 플레저 아닐까요?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도, 손가락은 부들부들 떨리고 이마에서는 식은 땀이 납니다. 에밀리님이 도끼를 들고 나타나 '이 작자가 겨우 이따위 리뷰로 내 책을 욕보여?' 하고 휘두를 것 같아서요. 황급히 마무리하고 사라집니다.

여러분, <꽃보다 도끼>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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