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이토록 즐거운 독서라니

by 김민식pd 2019. 4. 22.
외대 통역대학원 다니던 시절, 서울대 영어교육학과를 나온 친구가 있었어요. 시골에서 학교를 다닌 친구가 자신은 중고등학교 시절 단 한 번도 전교 일등을 놓친 적이 없다고 하기에 깜짝 놀랐어요.
"전교 일등을 놓친 적이 없다고? 나는 전교 일등은커녕 반에서 일등을 해본 적도 단 한 번도 없는데."
이번에는 친구가 놀랐어요. 
"일등을 해본 적이 한번도 없다고?"

오늘 글을 쓰면서, 제가 그 친구처럼 물정 모르는 소리를 하는 게 아닐까 조심스럽습니다. 도서관 저자 특강에 가면 다들 물어요. "책을 그렇게 많이 읽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독서가 즐거우니까요. 이토록 재밌으면서 유익한 취미도 없거든요. 책보다 재미난 것도 많은 세상이지만, 여전히 저는 책읽는 즐거움을 믿습니다. 저만 이상한 사람인줄 알았더니, 독서가 쾌락이라고 말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개인주의자 문유석의 유쾌한 책 읽기' <쾌락 독서> (문유석 / 문학동네) 

문유석 판사님은 책에서 다양한 책읽기의 즐거움을 말씀하십니다. 책을 많이 읽는줄은 알았지만, 순정만화도 즐겨 읽으신 줄은 몰랐어요. <유리 가면>으로 순정만화에 입문한 문 판사님은 이후 다양한 작품을 섭렵하는데요.

'황미나 작가의 <굿바이 미스터블랙>을 본 후로 생긴 좋은 버릇이 있다. 인생 살다 소소하게 즐거운 순간을 만날 때마다 "그는 아직 몰랐다. 그때가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는 것을"이라는 대사를 떠올리곤 하는 버릇. 나는 에드워드 다니엘 노팅그라함처럼 후회하지 말고 미리미리 알기로 했거든. "인생은 언제나 예측 불허, 그리하여 생은 그 의미를 갖는다"라는 <아르미안의 네 딸들>(신일숙)의 명대사도 오래 기억에 남는다. 어른이 되어 '레 마눌'을 모시고 살고 있는 지금까지도.'

(위의 책 102쪽)

순정만화의 대사까지 기억하시다니, 보통 덕후가 아니시군요. 저도 만화를 즐기며 책읽는 습관을 길렀어요. 허영만의 <국경의 갈가마귀>를 보며 나라 잃은 슬픔을 알았고요. <슬램덩크>를 보며 협업의 중요성을 깨달았으니까요.

요즘 아이들이 독서와 멀어지는 이유 중 하나는 엄마 아빠의 욕심 탓이 아닐까 싶어요. '서울대 추천 인문 고전 100선'이나 SKY 캐슬에 나오는 토론용 책만 읽다보면 독서가 지겨워집니다. 독서의 순수한 쾌락을 일깨워주는 일이 중요합니다. 

'독서에서 배운 것이 있다면 세상에 쉬운 정답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80년대 대학가의 조급함은 정답을 정해놓고는 신입생들을 그곳으로 빨리 이끌려 했다. 그것은 독서가 아니라 학습이다. 독서란 정처 없이 방황하며 스스로 길을 찾는 행위지 누군가에 의해 목적지로 끌려가는 행위가 아니다.'

(위의 책 132쪽)


부모의 조급함이 아이의 독서 습관을 망칠 수도 있어요. 아이에게 좋은 책을 강권하지 말아요. 그냥 아이가 좋아하는 책을 읽고, 책읽는 습관을 기르도록 놔두세요. 어떤 책이 좋고, 어떤 책이 재미있는지, 스스로 찾아가는 게 평생의 공부입니다. 

저의 추천 도서 목록 또한 정답이 아닙니다. 그냥 개인적 책읽기의 즐거움에 대해 이야기하는 공간입니다. 저의 독서일기를 보고 부담감을 느끼실 필요는 전혀 없어요.  책읽기는 즐거워야 합니다. 시험 공부처럼 정답을 향해 매진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즐거운 방랑이어야 하니까요.

'SF는 인류의 미래가 아니라 현재'라는 글에서 문유석 저자는 알파고를 보며 공포를 느낄 게 아니라, 새로운 즐거움을 찾아 나서야 한다고 말합니다. 

''미래에 우리는 무슨 일을 하지?'라는 질문만 하지 말고 '그런데 우리는 꼭 일을 해야 되나? 그런데 일이라는 게 뭐지?'라는 질문도 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왜 기계에게 일을 빼앗기는 상상만 할 뿐 기계에게 일을 시키고 우리는 노는 상상을 하지 못할까. 사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지금 시대에 우리가 '일'이라고 부르는 많은 것들이 과거 시대 사람들 눈에는 그냥 쓸데없는 놀이나 미친 짓일 뿐일 거다. 혀와 배꼽에 피어싱해주는 직업, 프로 스케이트보더, 먹방 찍어 돈 버는 유튜버들, 주기적으로 돌고 도는 유행의 패션 산업... 인간이 '문화'라고 부르는 것의 대부분은 쓸데없는 유희의 축적이다. 인간은 끊임없이 새로운 즐거움을 찾아내곤 했다. (...) 우리는 쾌락의 카탈로그를 늘리고 늘리며 세계를 풍성하게 만들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상상력도 재미도 없는 성공충들의 권력은 오래가지 않는다. 결국엔 즐기는 자들이 이길 것이다.'  

(위의 책 228쪽)

즐기는 자가 이길 것이다. 명쾌하신 말씀입니다. 독서도 마찬가지에요. 의무감으로 하는 사람보다는, 순수한 쾌락으로 접근하는 사람이 책을 더 즐길 것이라 믿습니다. 
어려서 일등은 한번도 못해봤지만, 독서만큼은 진짜 열심히 해보고 싶어요. 이건 정말로 재미난 어른의 공부니까요.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