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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독서 일기

공짜 선물을 마다하는 이유

by 김민식pd 2018. 9. 13.

회사에 자전거로 출퇴근을 합니다. 하루는 헬멧을 가지고 퇴근하다 아는 사람을 만났어요.

“어? 자전거 타고 가세요?” 

제 헬멧을 보더니 그 분께서 ‘집에 안 쓰는 헬멧이 있는데 드리고 싶다’고 하더군요. 괜찮다며 사양했어요. 

“진짜 좋은 헬멧인데요, 제가 더 이상 자전거를 타지 않아서요. 피디님께 드리고 싶어요.”

“저는 인터넷 쇼핑몰에서 최저가로 산 이 헬멧이 좋아요.”

아마도 그 분은 제 헬멧을 보고 좀 안타까웠나봐요. 그 분이 제 자전거를 보지 못해 다행이에요. 제 자전거는 10년 전에 지인에게 얻은 건데요, 그때 이미 10년된 중고 자전거였어요. 즉 20년이 넘은 낡은 자전거를 타고 다닙니다.

그 분이 주려고 했던 헬멧은 좋은 물건일 거예요. 고급지고 멋지겠지요. 그런 헬멧을 쓰면, 왠지 자전거가 부끄럽게 여겨질 수 있어요. 결국 새 헬멧 때문에 자전거를 바꾸고 싶을 거예요. 자전거를 바꾸면, 지금 입고 다니는 낡은 등산바지보다는 왠지 멋진 자전거용 바지를 새로 사야 할 것 같을 테고요.

공짜 선물을 마다하는 이유는, 나의 현재에 대한 강한 긍정입니다. ‘지금 나는 부족함이 없다. 나의 헬멧은 멋지고, 나의 자전거는 빠르고, 나의 복장은 쿨하다.’ 이렇게 믿고 삽니다. 욕심을 부리기 시작하면 끝이 없어요. 지금 현재 내게 주어진 것에 만족하고 삽니다. 


술 담배 커피를 하지 않고 도박이나 카지노는커녕 골프도 치지 않는 저를 보고 금욕주의자라 하는 사람도 있지만, 저는 사실 쾌락주의자입니다. 평생을 제가 좋아하는 일만 하며 살거든요. 저의 스승 중 한 분이 바로 에피쿠로스에요. <삶을 사랑하는 기술> (줄스 에번스 / 서영조 / 더 퀘스트)라는 책에 이런 말이 나와요.


에피쿠로스는 인간은 지구상에 단 몇 십 년을 머물렀다 사라지고 마는 존재이니, 살아가는 동안 반드시 해야 하는 일 따위는 없다고 말한다. 기쁘게 해줘야만 하는 사람 같은 것도 없고, 반드시 따라야 하는 율법 따위도 없으니 불행해져야 할 이유를 찾기보다는 즐기는 쪽, 행복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143쪽) 


저는 예능 피디로 오래 일했는데요. 쾌락의 위험성을 근거리에서 지켜보았어요. 술을 좋아하는 사람은 술 때문에, 노름을 좋아하는 선배는 노름 때문에 힘들어져요. 내가 좋아하는 게 곧 나의 약점이 됩니다. 쾌락을 좇으면서도 취향의 노예가 되지 않는 법을 찾는 게 제 평생의 화두입니다.


합리적 쾌락주의자는 온전한 마음의 평온을 얻기 위해 손쉽게 얻을 수 있는 것들만 욕망하는 법을 배운다. 에피쿠로스는 이렇게 썼다. “건강에 필요한 영양분을 제공하고, 위축되지 않고 삶의 요건들을 충족해주며... 운을 두려워하지 않게 해주는... 소박하고 값싼 음식에 익숙해져야 한다.”

욕망이 적고 단순할수록 충족시키기가 쉽고, 일을 덜 해도 되며, 친구들과 함께 보낼 시간이 많아진다. 

(147쪽)


제가 낡은 자전거에 익숙해지고, 싼 헬멧에 만족하며 사는 이유입니다. 비싼 취미보다 돈 한 푼 안 드는 놀이를 선호하는 이유에요. 더 좋은 것을 갈망하는 순간 우리는 돈을 더 벌어야하고, 그 순간 즐거운 시간을 누리는 자유를 포기해야 하거든요. 


<삶을 사랑하는 기술>, 지금 우리의 삶을 구원해줄 지혜를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찾아보는 책입니다. 독서야말로 삶을 사랑하는 기술이라고 생각해요. 철학도 그렇고요. 항상 갈대처럼 욕망에 따라 흔들리지만, 오래된 스승에게서 배우며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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