짠돌이 독서 일기

이 만화, 드라마로 만들어줘요!

김민식pd 2023. 11. 6. 05:01

진로 특강을 가면 아이들이 묻습니다. “드라마 피디로 일하며 힘든 점과 좋은 점은 각각 무엇인가요?” 밤에 잠을 못 자는 게 제일 힘들어요. 미니시리즈를 연출할 때는 밤에 2~3시간씩 자면서 생활합니다. 졸린 눈을 비비며 새벽 3시까지 밤 촬영을 하고, 집에 들어가 잠깐 눈 붙인 후 6시에 울리는 알람을 끄고 일어날 때는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픕니다. 온몸이 외치는 것 같아요. “자야 해, 넌 아직 더 자야 해! 이러다 너 죽어.” 드라마 피디는 모두가 퇴근한 후에 남아 편집하고 대본 보고 콘티 작업하느라 밤을 새워야 해요. 목숨을 담보로 일하는 직업입니다.
다행인 건 이 일에도 끝이 있다는 거죠. 드라마는 16부작만 하면 종영합니다. 석 달 정도 바짝 고생하면 끝이 납니다. 다음 작품이 정해질 때까지는 한가한 시간을 보내는데요. 그럴 때 저는 회사 사무실에 앉아 만화를 봅니다. 높은 사람이 지나가다 봐도 뭐라 그러지 않아요. “음, 원작을 찾고 있구먼.” 요즘은 웹툰을 원작으로 하는 드라마도 많거든요. 근무시간에 만화를 볼 수 있다는 게 최고의 장점이라는 말에 아이들이 격하게 공감합니다. ^^ 저는 만화도 엄청 많이 보는데요. 마침 제가 즐겨보던 만화가 책으로 나왔습니다. 

<일어나요 강귀찬> (김한조 만화/파란의자)

책의 첫머리에 작가의 말이 나옵니다. 

‘나는 20년 차를 훌쩍 넘긴 경력의 만화가이다. 잡지 만화 전성기 끄트머리에 만화를 시작하여 대여점 만화의 흥망성쇠, 인터넷 만화방, 스포츠신문 만화, 학습 만화 열풍, 웹툰의 탄생과 급성장, 스마트폰 웹툰 전성기인 지금까지 만화사 흐름 속에서 반 발씩 걸쳐 왔다. 아, 나름 대안 만화 운동에 동참하기도 했다. 다만 어정쩡하게 주변을 맴돌았을 뿐이다.
시대의 변화와 시장의 흐름을 분석하며 치열하게 달려들었다면 결과가 달랐을까? 아니면 무언가 열심히 해 왔지만, 정답만 골라서 피해갔던 운 없는 만화가일 뿐일까? 아직도 잘 모르겠다.
나는 후회를 달고 산다.
“그때 그랬어야 했는데......”라든가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따위 후회들이다.
갖가지 후회 중 대부분이 돌이키거나 만회하기 어려운 것들이다. 그래서 항상 타임리프(?)하는 망상을 자주 하게 된다. 그럴 시간에 현재를 충실히 살라고 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때론 뼈저린 후회가 현재를 살아갈 에너지가 될 수 있다.’

글을 읽으면서 많은 상념에 빠져들었어요. 아, 어쩜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이렇게 똑같이 하시는 걸까? 작가의 이 글을 제 버전으로 바꿔보았어요.

‘나는 20년 차를 훌쩍 넘긴 경력의 피디다. 공중파 방송사 전성기 끄트머리에 연출을 시작하여 청춘 시트콤의 흥망성쇠, 버라이어티 쇼의 등장, 로맨틱 코미디 열풍, 드라마 한류의 전성기인 지금까지 드라마 연출 흐름 속에서 늘 한 발짝씩 뒤처져 살아왔다. 아, 나름 방송 민주화 운동에 동참하기도 했다. 다만 어정쩡하게 끝이 났을 뿐이다.
시대의 변화와 시장의 흐름을 분석하며 치열하게 달려들었다면 결과가 달랐을까? 아니면 무언가 열심히 해 왔지만, 정답만 골라서 피해갔던 운 없는 피디일 뿐일까? 아직도 잘 모르겠다.
나는 후회를 달고 산다.’

작가님의 글을 그대로 가져왔는데 내 이야기가 되네요. 갑자기 눈에 습기가...... 

 



인터넷의 대중화에 발맞춰 탄생한 웹툰은 만화의 주류가 되었고, 스마트폰의 등장과 함께 2020년대 현재, 만화라는 단어는 웹툰의 옛말이 되어 버렸어요. 시대가 변하는 줄 모르고 학습만화와 출판만화의 외길 인생을 살아온 우리의 주인공 강귀찬, 빠르게 변화한 세상과 부양해야 할 가족, 암담한 가정경제 현실을 뒤늦게 실감하며 황급히 웹툰 열차에 뛰어들려고 하는데... 문득 깨달음...
“가장 늦었다고 생각했을 때가 정말 늦었다.”

출판만화가로 살아온 작가님이 인생 3막을 시작하며 위기를 겪고 또 그걸 회복하는 과정에서 떠오르는 단상들을 묶은 만화입니다. 대한민국의 중년들이 겪을 법한 후회와 불안의 기록이지요. 온라인에서 연재하는 만화를 보면서 열심히 ‘좋아요’를 눌렀어요. 매 컷 한 장 한 장 다 ‘좋아요’를 누르기도 했는데요. 이 작가님 만화 스타일이 자학 개그를 남발하며 웃음을 유발하는 터라 때로는 ‘좋아요’를 누르면서 죄송하기도 했어요. 내가 지금 주인공의 시련에 대해 박수를 치고 있나? 하지만 제가 남긴 ‘좋아요’는 만화 속 상황이 아니라 작품에 대한 반응이라는 걸 이해해주시리라 믿었어요. 저의 진심이 통한 걸까요? 출판사에서 추천사를 청탁하셨어요. 저의 응원이 김한조 작가님이 연재를 지속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고요. 아, 정말 영광입니다. 책에 추천사를 썼습니다. 

‘24년을 피디로 일하다 구조조정으로 퇴사한 나는 이런 저런 후회를 안고 산다. 50대 초반에 벌써 외롭고 괴롭고 서글프면 기나긴 노후는 어떻게 견디지? 그때 이 작품을 온라인에서 만났다. 아, 나만 외롭고 힘든 게 아니구나.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에서 누구나 길을 잃고 헤맬 때가 있구나. 나를 일으켜 세운 만화가 책으로 나온다니 반갑다. 중년의 기쁨과 슬픔이 단짠 모드로 조합된 만화. 책 속의 농담과 위로가 넘어진 나를 다시 세우는 따스한 손길처럼 느껴진다. 든든한 작가님의 팔을 잡고 다시 일어나야겠다. 이 나이가 되도록 홀로서기는 여전히 어렵다. 그게 이 책이 필요한 이유다.’

종이책을 받고 감개무량합니다. 책꽂이 가장 눈에 잘 띄는 곳에 두었어요. 일하다 글감이 풀리지 않거나, 강의 준비를 하다 영감이 떠오르지 않을 때는 <일어나요 강귀찬>을 읽습니다. 중년 만화가의 고군분투기를 보며, 다시 힘을 내봅니다. 마치 작가님이 응원해주시는 것 같아요. “일어나요, 김민식!” 

나이 50이 넘어가면서 밤을 새우는 게 너무 힘이 들어 퇴직을 신청했습니다. 체력이 따라가지 않더라고요. 은퇴하고 잠을 푹 잘 수 있어 좋긴 한데요. 이렇게 재미난 만화를 보면 욕심이 납니다. “야, 이거 시트콤이나 드라마로 만들면 딱 좋은 작품인데!” 누가 좀 드라마로 만들어줘요.

강귀찬을 응원합니다. 치열하게 살아가는 우리 모두를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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